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12화 (12/80)

12.

‘티가 안 나게 조금만 먹는 거야.’

에시엘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포크를 집어 들어 토핑으로 얹어진 딸기 조각을 찍었다.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황금빛의 시럽이 중력에 이끌리듯 주륵 흘러내렸다. 그 모양새를 보며 감탄을 내뱉는 것도 잠시, 서둘러 입 안에 딸기를 넣었다.

“와아!”

과일을 씹기도 전에 혀에 먼저 닿은 시럽은 전생에도 현생에도 먹어 보지 못한 충격적인 맛이었다. 에시엘의 눈앞에 뿅 하며 별이 잠깐 스친 것도 같았다.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났다.

“헉. 다 먹어 버렸잖아! 어떡하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접시는 텅 비어 있었다. 에시엘은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치, 침착하자.”

에시엘은 빈 접시로부터 점점 뒷걸음질을 쳤다. 내뱉은 말과 달리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하려 할수록 도리어 새하얀 백지장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그때였다. 방의 주인이 돌아온 순간이.

“왜 침착하겠다는 거지?”

롬포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 울렸다.

“대, 대공님!”

에시엘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며 롬포드에게 테이블의 빈 접시를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는 문틀에 기대어 선 채 에시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롬포드 대공의 방이었어……! 아, 큰일 났다. 어떡해!’

“당황하는 꼴을 보아하니 또 사고를 친 모양이군.”

“…….”

“멋대로 방까지 들어와서 말이야.”

말을 마친 롬포드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 모습에 에시엘이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사고까진 아니구요. 조금 실수, 아니…….”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롬포드는 무심하게 걸으며 에시엘과의 거리를 점차 좁혀 왔다. 이에 에시엘의 심장이 긴장감에 물들어 사정없이 콩닥콩닥 뛰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롬포드는 채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벌써 코앞에 서 있었다.

“잘못했어요!”

지레 겁을 먹은 에시엘이 소리쳤다. 꼭 감은 눈 아래 길게 뻗어 있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대공의 음식을 탐내고 모두 먹어 버린 것은 둘째 치고 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을 용서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접시가 비었군.”

빈 접시를 향하던 롬포드의 시선이 노선을 틀어 에시엘에게 꽂혔다. 롬포드는 커다란 손을 뻗어 에시엘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고 문을 향해 에시엘의 몸뚱이를 투박한 손길로 거침없이 밀어 냈다.

“나가.”

‘어……?’

그런데 어깨에 닿은 롬포드의 손이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 손의 체온이 에시엘 자신보다 조금 높다고 알아차릴 즈음 어깨는 허전해졌다.

에시엘은 뒤돌아 걸음을 옮기는 롬포드를 보며 말했다.

“대공님, 어디 아파요?”

* * *

붉은 머리칼을 가진 작은 아이가 떨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겁을 먹은 모습이다.

접시에 뭐가 있었든 롬포드에게는 상관없다. 어차피 먹지 않을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주방장의 성의와 노력이었다. 고용주 겸 제 주인인 자의 건강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오히려 음식은 다 먹은 채, 빈 그릇만 가져다주면 좋아하리란 사실을 안다. 그렇게 한다면 주방장이 일하게 된 후로 유례없던 일임은 분명할 테니 나쁠 건 없었다.

떨고 있는 이 아이에게 그러한 이유로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제멋대로 방에 들어온 것에 화를 내며 칼을 들이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롬포드는 어쩐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꽤 깊이.

원래대로라면 고민 따위는 하지 않고 바로 칼을 집어 들었을 터였다. 본인의 침실에 타인의 자취가 남는 것은 상상이나마 일절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가당치도 않은 이유로 고심을 하고 있었다. 작고 가여운 아이라고 해서 죄책감이 들 리도 없건만, 대체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대, 대공님?”

롬포드의 귓가에 에시엘의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롬포드는 그 목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침대를 향했다.

에시엘은 큰 눈을 연신 깜빡였다. 순간일 뿐이지만 롬포드의 눈빛에서 늘 비치던 서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왜 아무 처분 없이 내쫓기만 하지? 그 롬포드 대공이 정말 아프다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롬포드는 침대에 다다라 그대로 그곳에 몸을 뉘었다.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지금은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오후 무렵이었다.

롬포드는 곧 낮잠이라도 자려는 건지 연신 몸을 뒤척였다. 언제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 위협할지 모르니 분명 이렇게 경계가 허물어졌을 때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에시엘은 고개를 갸우스름하게 기울인 채 오도카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가.”

롬포드의 단호한 축객령이 떨어졌었다. 그런데도 에시엘의 발걸음은 왜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탓에 얼핏 보이는 검은 머리칼이 새하얀 베개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커다란 손이 닿았던 어깨가 아직도 뜨끈한 것만 같았다. 에시엘은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롬포드의 말에 순응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새하얀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그의 가까이 다가갔다.

“대공님. 왜 그래요?”

에시엘은 불과 몇 분 전 확연하게 느꼈던 이상함이 내심 마음에 걸려 석연치 않았다. 날을 세우던 평소의 롬포드와는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롬포드의 머리맡을 서성이며 괜스레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돌아누워 검은 뒤통수만 보이는 그의 낯빛을 살피고자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쭉 뺐다.

답이 없던 롬포드는 눈을 감은 채 곤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 숨이 약간 거친 것 같기도 하다.

‘자는 건가?’

괜한 오지랖일지 모른다. 롬포드는 그저 방대한 업무량에 지쳐 잠시 낮잠을 청하는 것일 수 있다. 혹은 모든 일을 끝내고 일찍 잠을 청한다거나. 그런 생각에도 에시엘의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에시엘은 자그마한 손을 꽉 쥐었다 폈다. 피가 몰렸다가 퍼진 손바닥은 하얗게 질렸다가 금세 혈색을 되찾았다.

그녀가 롬포드의 이마 위로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머리칼 아래 이마의 열기가 뜨끈했다. 반대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짚자 그 차이는 더욱 여실히 느껴졌다. 롬포드는 고열을 앓고 있었다.

“대공님, 이마가 뜨거워요! 아파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였다.

롬포드에게 평소 건강한 체력은 필수였다. 수시로 전장을 떠도는 탓이기도 했고, 업무량을 감당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건강 관리에 유념하는 그가 아픈 일은 드물었다. 생전 처음 아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말이다.

‘열이 나는 걸 보니 감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으려나?’

아프냐는 물음에도 롬포드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에시엘은 침대에 곤히 누운 그의 모습과 문가를 수차례 번갈아 봤다.

* * *

탁―, 탁―, 탁―.

빠르게 교차하는 낮은 구두 굽 소리가 연신 울렸다. 에시엘은 급히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감기에 특효약으로 ‘그것’만 한 게 없다. 지난 생의 자신 또한 할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것을 먹고 자라 전수받은 음식이었다.

보육 교사일 적 어린이집의 감기 걸린 아이들에게 줬을 때도, 처음엔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다들 환한 표정으로 빈 그릇을 내놓곤 했다. 맛도 좋고 영양도 좋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좋아하는 것이었다.

“도프니, 도프니!”

발걸음을 서두르는 만큼 다급해진 에시엘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그 소리에 스프를 휘젓고 있던 도프니가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엉? 무슨 일이냐?!”

“혹시 지금 여기에 배 있어? 과일, 과일!”

“배……?”

도프니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단어를 내뱉는 그의 어감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서, 설마 없어……?”

되묻는 에시엘의 표정 또한 도프니를 따라 한껏 찌푸려졌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곧 발까지 동동 굴렀다.

“있긴 하다만……. 준비해 놓은 것은 없고 뒤뜰의 나무에서 따 와야 하지. 왜 그러느냐?”

으리으리한 규모를 가진 대공저인 만큼 없을 리가 없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배는 대중적인 과일이 아닐 뿐이었다.

이곳에서 배는 몹시 평가 절하되는 과일이었다. 배를 먹느니 차라리 무를 먹겠다는 사람이 다수일 정도였다. 하지만 에시엘은 그것으로 감기의 특효약을 만들 수 있었다.

“뒤뜰?! 고마워!”

영문을 몰라 이상하게 여기는 도프니를 뒤로하고 에시엘은 곧장 뒤뜰로 향했다. 막상 나서고 보니 길을 모른다는 점이 당혹스러웠지만 그리 큰 역경은 아니었다.

“너 왜 여기 있어? 어디 가는데?”

주방을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에서 페루딘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의 옆구리에는 붉은 양장본의 예법서가 끼워져 있었다.

“페루딘! 뒤뜰은 어디로 가야 해?”

“뒤뜰? 네가 거긴 왜 가는데?”

“같이 가자, 앞장서!”

“뭐? 어어? 야, 알겠으니까 밀지 마!”

용을 쓰며 다짜고짜 등을 밀어 내는 에시엘의 행동에 페루딘은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새로운 놀잇감을 찾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뒤뜰은 1층의 쪽문을 통해 이어졌다. 그곳은 정원에 버금가는 광활한 텃밭과 다양한 과수목이 주를 이루었다.

‘어디 보자. 배나무는……. 찾았다.’

에시엘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뒤뜰을 훑었다. 구석진 곳에 다른 것들보다 확연히 적은 수의 배나무 열댓 그루가 있었다. 에시엘은 씨익 미소를 지은 뒤 배나무를 향해 달렸다.

페루딘은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갸웃하며 에시엘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냅다 달리는 에시엘의 모습에 당황해 ‘가, 같이 가!’ 하며 따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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