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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13화 (13/80)

13.

배나무에는 이제 막 탐스러운 빛을 내는 과실이 둥실 달려 있었다.

‘좋았어.’

에시엘은 주저 없이 나무에 달려들었다. 제 키보다 몇 곱절은 큰 나무였지만 배는 반드시 따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무의 절반도 채 오르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친 나무에 쓸리며 팔뚝과 발목 부근에 생긴 달갑지 않은 생채기는 덤이었다.

“아야…….”

안 그래도 상처투성이인 팔뚝이다. 그러나 상처에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시엘이 다시 달려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페루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냐, 이 멍청아. 그렇게 하면 다치거든! 기다려 봐.”

“기다리라구?”

페루딘은 어딘가로 향하더니 금방 다른 누군가와 함께 돌아왔다. 뒤뜰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키도 작고 마른 체형이건만 한쪽 어깨에 사다리를 거뜬히 들쳐 메고 있었다.

“몇 개?”

페루딘이 에시엘을 향해 물었다.

“그, 그럼 두 개만 부탁해!”

“들었지? 두 개.”

머뭇거리며 내뱉은 에시엘의 대답에 페루딘이 관리인을 향해 손가락을 브이 자로 펴 보였다.

그 후로 모든 것은 일사천리였다.

에시엘의 팔다리에 생겨난 생채기가 무색할 만큼, 관리인은 사다리를 이용해 너무나도 손쉽게 배를 따 와서 건네주었다. 그것을 품에 안은 에시엘은 붉은 머리칼이 세차게 흩날릴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근데 그걸로 뭐 하게?”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페루딘이 말했다.

“으응, 뭘 좀 만들 거라서.”

“만들어? 뭘?”

에시엘이 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페루딘의 귀 끝이 불그스름해졌다. 그는 무언가 기대라도 하듯 은근히 묻는 투였다.

“그게…….”

“뭐냐니까? 얼른 말해 봐.”

에시엘을 재촉하는 페루딘의 입가에 슬몃 미소가 생겨나는 것도 잠시.

“아! 나 급해서 먼저 가 볼게! 도와줘서 고마워!”

돌연 황급히 떠나는 에시엘이었다. 그녀는 어딘가 벙찐 페루딘이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방긋 웃으며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품에 안은 배만큼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소중하게 안은 채였다.

* * *

에시엘은 발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그녀의 얼굴만 하다고 해도 무방한 크기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그릇에 담긴 노란빛 액체를 노려보며 내용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감기엔 역시 배숙이지!’

통후추가 박힌 배가 그릇에 동동 떠 있다. 그것을 보는 에시엘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일었다. 입매를 당겨 매끄럽게 미소 짓자 젖살이 덜 빠진 볼살이 통통히 솟아올랐다.

조심하며 걷느라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다다른 롬포드의 침실은 여전히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에시엘은 뒤돌아 등으로 문을 밀어 내며 찬찬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까와는 다르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앉은 롬포드는 방에 들어서는 에시엘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자리 잡은 주변으로 글씨가 빼곡한 서류들이 그득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온 건가?”

롬포드의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그게요. 아프신 거 같아서요, 만들었어요.”

에시엘은 더욱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롬포드의 가까이 당도했다. 그리고 그에게 쟁반을 들이밀자 끌려 올라간 옷소매 아래 나무에 긁힌 생채기가 설핏 드러났다. 에시엘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결국엔 시선도 마주하지 못한 채 쭈뼛거리며 말했다.

“드세요오…….”

롬포드의 시선이 흘끔 그 생채기에 향하는 것도 잠시, 에시엘이 들이민 쟁반에 닿았다. 조막만 한 그릇만큼이나 작은 아이가 자신을 위하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배……군.”

도프니의 반응과 비슷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그릇을 뒤엎을 듯싶은 모습이었다. 배가 평가 절하된 과일이라는 사실을 에시엘은 여전히 까맣게 몰랐다.

“이, 이거 먹으면 아픈 거 다 나아요!”

롬포드는 에시엘이 들이민 쟁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에시엘의 잘게 떨리는 자그만 손을 지나서,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손목의 생채기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네 멋대로 행동한 거지?”

차디찬 음성이었다. 에시엘은 순간 저도 모르게 놓칠 뻔했던 쟁반을 꽉 쥐었다.

“아까 대공님 이마가 뜨거웠어요. 그래서 이거요.”

“……뭐지?”

롬포드가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에시엘의 손에 들린 쟁반에 시선을 던졌다. 성가시다는 듯 구겨지는 미간에 에시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만병통치약이에요……!”

잔뜩 긴장한 에시엘은 혹여나 손에 든 것을 놓칠까 봐 한층 힘을 주며, 롬포드 쪽으로 더욱 가까이 쟁반을 들이밀었다.

“만병통치약? 이게?”

롬포드의 시선이 그릇에 담긴 노란빛 액체에 닿자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의 색깔이며 통후추가 박힌 배의 모양새며, 영 탐탁지 않았다.

“어, 얼른요. 이러다 다 식어요!”

초록빛의 녹음 가득한 눈동자가 롬포드를 향해 반짝였다. 에시엘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힘들게 구한 배인 만큼 반드시 먹이고 말리라.

“네가 만들었다고.”

“네에.”

롬포드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재빨리 대답이 들려왔음에도 그는 그것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쟁반을 들이미느라 보였던 에시엘의 손목 위로 생겨난 생채기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감기 기운 탓에 정신이 흐리멍덩한 와중에도 아이의 고운 손목에 생겨난 상처에만 눈길이 갔다.

물론 에시엘은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해 초조하기만 했다. 그가 어서 배숙을 먹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아무리 악랄한 대공에게 볼모로 잡혀 왔다지만 에시엘은 본디 아픈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할 만큼 무정하진 못했다.

한 번 더 재촉하려는 생각으로 올망졸망한 입술을 떼려던 순간 롬포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두고 나가.”

롬포드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에시엘은 어쩐지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몇 번이고 입술을 들썩이며 말을 건넬까 싶었으나 단호한 모습에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에시엘은 그의 눈치만 보다가 침대 옆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돌아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인 그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다 먹어야 하는데…….”

얌전히 나가다 걸음을 멈춰 선 에시엘은 문틈 새로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이에 롬포드의 한쪽 눈썹이 또다시 꿈틀했지만 에시엘은 개의치 않는 듯 말을 이었다.

“다 먹고 누워서 자야 해요…….”

“…….”

“꼭이요, 잘 자는 것까지 해야 만병통치약이에요!”

에시엘은 여전히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동그란 눈을 끔벅였다. 어이가 없는 모습에 롬포드가 얼굴을 팍 구기고 성을 내려던 순간, 낌새를 눈치챈 에시엘이 다급히 외쳤다.

“저, 저 이제 갈게요!”

그 뒤로 복도에는 줄행랑치는 에시엘의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롬포드는 구겨진 표정 그대로 잠시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런데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어쩐지 아이의 풀이 죽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자꾸만 들려왔다.

“다 먹어야 하는데…….”

이와 동시에 축 처진 어깨를 하곤 터덜터덜 문가로 향하던 아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롬포드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내던졌다. 그러자 흩날리는 종이 사이로 아이가 내려놓은 쟁반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하찮은 미물, 그쯤에 그치던 아이가 직접 만들었다던 약이라는 음식이었다.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던 롬포드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쟁반을 들이밀던 에시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어쩐지 자꾸만 신경 쓰이는, 아이의 희고 여린 피부 위에 생겨난 불그스름한 생채기였다. 분명 그보다 더한 상처나 핏자국은 전장을 누비며 수도 없이 보았음에도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롬포드는 아이의 얼굴을 연상케 하는 동그란 그릇으로 손을 뻗어 천천히 들이켰다. 곧이어 그는 액체가 반쯤 남은 그릇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롬포드는 허공을 응시하던 눈을 스륵 감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꾸만 떠오르는 아이의 잔상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뜻대로 될 리는 없었다.

“렌테.”

롬포드는 짜증스러운 투로 렌테를 호령했다. 이에 렌테가 부리나케 침실로 들어섰다.

“예. 각하.”

“신관을 불러. 치유에 능한 자로.”

“신관이라니요? 각하께서 어디 다치셨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이십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명령에 렌테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영험한 자로 일컬어지는 신관을 저택까지 모시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른 시일 내로 부르는 게 좋겠군.”

더는 가타부타 설명이 없었다. 롬포드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젓곤 잠을 청하려는지 침대 헤드에 기대었던 몸을 빠르게 뉘었다.

* * *

덜컹, 덜커덩.

마차는 안전하지만 빠르게 내달렸다. 롬포드는 그런 마차에서조차도 글씨가 빼곡한 서류를 훑던 중이었다. 뜻하지 않은 감기에 시달리느라 확인하지 못한 업무들이 많은 탓이었다.

아직 성치 못할 롬포드를 염려해 마차에 동승한 이는 기사단장인 찰츠였다. 롬포드에게 있어 집사인 렌테가 오른팔 격이라면 기사단장인 찰츠는 왼팔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롬포드의 행동거지를 살피던 찰츠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각하. 분명 감기에 드셨다 들었는데 어쩐지 컨디션이 전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롬포드가 심드렁한 투로 답했다. 피식 희미한 웃음을 흘린 롬포드의 모습은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예. 다행입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게 있긴 한가 보군.”

롬포드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곧 서류가 넘어가며 팔랑이는 소리에 그의 혼잣말은 자취를 감췄다.

머지않아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목적지인 황성에 당도한 것이다. 롬포드가 마차에서 내려서자 황성을 지키던 기사들이 다가왔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

롬포드를 호위하듯 앞선 찰츠가 말했다. 그러자 약조의 여부를 간단히 확인한 그들이 길을 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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