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 네놈이 정말…….”
황제는 이미 응접실에서 롬포드 대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롭게 차를 들이켜려는 의도와 달리 찻잔을 쥐고 있는 황제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는 ‘전장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롬포드가 어떠한 연유도 없이 황성에 올 인물이 아님을 알기에 생겨나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똑똑―.
“들어오게.”
황제의 허락에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롬포드는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제국의 충실한 검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그래. 얼른 앉게.”
롬포드는 황제가 앉은 상석과 근접한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황제는 가벼운 손짓으로 옆에 서 있던 시녀에게 롬포드의 찻잔을 채울 것을 명했다.
찻잔이 서서히 채워지는 모습을 보던 롬포드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에 황제는 슬쩍 미소 지으며 시녀를 물렸다. 그리고 애써 여유로운 척 떨리는 손을 숨긴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얼른 얘기해 보게.”
“뜻하지 않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황제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자 롬포드는 제 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탈세 내역이 적힌 장부였다.
“이 수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황제의 동공이 몹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냉혹한 대공이라면 저를 위협하는 수작에도 비교적 태연할 줄 알았는데 예상하던 롬포드의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일전에 자신이 품었던 생각이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그건……!”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큼, 크흠…….”
황제가 거짓된 모습으로 꾸며 내던 여유로움은 단번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인위적인 헛기침을 수차례 내뱉었다.
“확실히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업무가 많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롬포드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저, 저……. 제기랄 놈이……!”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황제는 이를 바득 갈았다. 황제의 무릎 위로, 분을 이기지 못해 바싹 그러쥔 그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 * *
롬포드가 황성을 떠난 시각, 저택에는 신관이 찾아왔다. 신관을 저택까지 모시는 일도 쉽지 않건만, 그것이 가능할 때 보통은 지위가 낮은 신관이 왕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롬포드의 명대로 치료에 능한 고위 신관이 내방했다.
마카이른 제국을 포함한 이 대륙에서는 신력과 마력을 가장 성스러운 능력으로 여겼다. 그중 신력은 오직 신관만이 운용 가능했으므로 그들 역시 영험한 존재로 칭송받았다.
신력의 정도가 엄청나든 미미하든 종종 신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긴 했다. 하나 그것을 성년까지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어떠한 신력이든 올바르게 다뤄 주지 않으면 성인이 되기 전에 모두 소멸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관은 더욱 신통한 존재로 여겨졌다.
“오셨습니까. 선뜻 와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마차는 편안하셨는지요.”
“네, 물론입니다. 대공께서 마차까지 보내 주신 덕분입니다.”
렌테의 대화법엔 허례허식이 없었다. 그는 그저 담백하고 부드럽게 귀한 손님을 맞았다. 곧 렌테가 ‘따라오시죠’라고 말하며 신관을 저택의 내부로 이끌었다.
신관은 주로 하얀 옷차림이긴 하나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머리칼이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쓴다는 것과 그 모자에 새파란 줄이 띠처럼 둘러져 있다는 부분이었다. 그 새파란 줄의 수가 적을수록 높은 지위를 가졌음을 뜻했다.
렌테와 동행하는 신관의 모자에는 두 줄이 자리했다. 아무 무늬도 존재하지 않는 대신관까지 포함한다 치더라도 높은 지위의 신관임은 분명했다.
이내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렌테는 출입을 알리기 위해 노크를 하곤 문을 열었다.
찬찬히 들어선 방은 무척이나 고요하여 아무도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흔한 말로 개미 한 마리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렌테가 찬찬히 방을 훑어보던 중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침대였다. 볼록하니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불은 미세한 움직임으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흠.”
가까이 다가간 렌테의 시야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작은 머리통이 들어왔다. 에시엘은 옅은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자고 있군요. 하하…….”
렌테는 제 뒤에 있던 신관을 향해 뒤돌아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에 신관이 가까이 다가와 침대를 들여다봤다.
“일단 이 아이의 치료를 부탁합니다.”
“그럼 잠깐 상처를 확인하겠습니다.”
신관의 말에 렌테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신관이 이불을 들추자 체구가 작은 아이의 몸이 여실히 드러났다.
곧이어 옷소매를 걷어 올리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선홍빛 생채기가 자리한 손목과 그 위로 옅어진 흉터가 있는 가녀린 팔뚝이 보였다.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어린아이의 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신관은 잔혹한 흔적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흉터를 더욱 자세히 살피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학대의 흔적이 보입니다.”
“학대……. 그렇군요.”
“그게…… 꽤 오랫동안 당한 듯 보입니다.”
신관은 렌테의 의미심장한 대답에 머뭇거리던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악랄한 대공이라지만 아이에게까지 손찌검한 건가 싶은 생각을 잠시 했으나 금세 지우면서 말이다.
“이 아이는 사실 볼모로 데려온 아이입니다. 말끔히 치유할 수 있는지요?”
“그렇다면 지내던 곳에서 당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물론 치료는 가능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흉터는 지속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렇습니까……. 그 사항은 대공 각하와 논의하여 추후 연락을 드리지요.”
렌테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신관은 아이의 이마에 손을 뻗었다. 상처의 범위에 따라 접촉 부위의 선택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곧 신관의 손바닥에서 빛을 내는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신력이었다. 그 빛은 작은 구의 형태에서 점차 커다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정 크기가 되자 더 커지지 않았다. 에시엘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 보이던 빛은 제 역할을 다했는지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더불어 아이의 가녀린 팔에 자리 잡고 있던 흉터들이 점차 옅어졌다.
이윽고 빛이 모두 없어졌을 때, 신관은 다시 에시엘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되었습니다. 피부가 뽀야니 더욱 보기 좋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신전엔 기부금을 넉넉히 보내도록 하지요.”
신관이 미소 지으며 말하자 렌테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이어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신관은 방을 나섰다.
* * *
“에시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페루딘이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었는지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가 몹시 우렁찼다.
“으악,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사람은 당연하게도 에시엘이었다. 느지막이 눈을 뜬 에시엘은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너 다쳤어?”
페루딘은 에시엘의 앞으로 재빠르게 다가가며 물었다. 제 작은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녀는 다짜고짜 괜찮냐 묻는 물음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방 안엔 자신과 페루딘뿐이었다.
“다치다니? 내, 내가?”
“우리 집에 신관이 왔었다던데!”
“뭐? 신관님이 어떻게?”
에시엘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신관은 자신이 잡지 못한 동아줄이었다. 비록 이미 기회를 한 번 놓쳤음에도 에시엘의 마음 한편에서 어쩌면, 같은 일말의 기대감이 생겨났다.
“그래서? 신관님은 지금 어디 있어?”
그녀는 정리하던 이불을 팽개치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기세였다. 벌써 떠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진 탓이다.
“뭐? 당연히 갔지. 아버지가 불렀었대. 근데 어디 다쳤냐니까? 너를 치유했다던데?”
“어?”
어쩐지 미약한 아픔도 느껴지지 않던 몸엔 상흔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모두 치유되어 말끔했다. 깊은 흉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왜 나를 치유해 준 거지?’
에시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탓에 조막만 한 손으로 그저 제 팔을 매만질 뿐이었다. 의아한 제 맘과 다르게 멀쩡한 팔의 촉감은 보드라웠다. 그것이 너무 생소해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와아…….”
와중에 페루딘은 상처라도 찾는 듯 에시엘의 팔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었다. 심지어는 에시엘을 중심 삼아 한 바퀴를 빙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유한 거야, 다친 데가 없는 거야……?”
그리고 혼잣말을 내뱉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반면 에시엘은 상처가 말끔히 치유된 몸과 별개로 밀려오는 실망감과 후회스러움을 숨길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이 깨어 있었더라면 저택을 찾아온 신관에게 신력을 내보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시질 않았다.
‘아니야. 나중에 또 기회가 있겠지.’
“그런데 너……. 그때 배로 뭘 만들었어?”
이내 의자에 털썩 앉은 페루딘은 어쩐지 풀이 죽어 있는 에시엘의 모습을 흘겨보곤 말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페루딘에게도 배는 도무지 맛이 있다고 느끼기 어려운 과일이었다.
그런데 에시엘은 그것을 두 개나 품에 안고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중하다는 듯 배를 챙기던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워 쉽사리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배?”
“내가 도와줬잖아, 그때. 사다리로.”
에시엘의 녹옥색 눈동자가 페루딘을 향했다. 이에 페루딘의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기대감까지 생겨났다. 눈이 마주친 그는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향해 헛발질했다.
“아아! 대공님이 아프셔서 차를 끓여 줬어.”
“뭐? 아버지한테 줬다고?!”
페루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재빠르게 답했다. 아무래도 에시엘이 배로 만든 무언가를 준 대상이 롬포드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나한테 주려던 게 아니야……?”
“……엉?”
“내 거는? 나는 왜 안 줘!”
“어어?”
“내가 사다리까지 쓸 수 있게 해 줬는데!”
아마도 페루딘은 에시엘이 배로 무언가를 만들어 줄 사람이 자신이라고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찬란한 금발 때문인지, 그 모습이 마치 성질이 사나운 아기 사자 같았기에 에시엘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네가 아프면 너도 꼭 해 줄게!”
“아프면……?”
페루딘은 에시엘의 말을 의미심장한 투로 되새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던 에시엘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오늘은 같이 못 놀아. 약속이 있거든.”
“뭐? 누구랑? 대체 누군데?!”
“비밀!”
에시엘은 복수라도 하듯 혀를 내밀며 자신을 약 올릴 적 페루딘의 모습을 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