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에시엘 님! 일찍 오셨군요. 역시 부지런하십니다. 이러다간 저보다 더 빨리 제빵사로서 득도하시는 거 아닙니까?! 가만……. 그렇게 되면 제국의 최연소 제빵사가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제게 엉겨 붙는 페루딘을 겨우 밀어 내고 주방에 다다랐을 즈음 마주친 로슈아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더불어 그는 아부라고 느껴질 만큼의 과한 칭찬에도 능했다. 심지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법 진지한 투로 말했다.
“히힛, 고맙습니다. 케이크 만들면 로슈아한테도 꼭 줄게요!”
에시엘은 과한 칭찬에 달아오른 불그스름한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제는 전에 없던 많은 관심에 익숙해질 법했지만 아직은 쉽지 않았다.
“크윽……. 그렇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지요. 안 되겠어요. 저 연습하러 가겠습니다! 에시엘 님께 환상적인 케이크를 만들어 드리려면 얼른 짤 주머니로 크림을 더욱 정교하게 짜내는 연습을…….”
로슈아는 감동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난번의 쫀쫀한 휘핑크림을 만들겠다던 목표는 아무래도 이미 이룬 모양이었다. 그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와중에도 입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주방장님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에시엘 님!”
“응. 안녀엉.”
인사하며 사라지는 로슈아를 향해 에시엘이 손을 방방 흔들었다. 그리고 주방의 문 가까이 다가가 그곳을 기웃거렸다. 곧 그녀는 제가 찾던 사람을 발견하곤 이름을 불렀다.
“도프니!”
에시엘은 해사하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더 있었다. 분명 주방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인물이었다. 멈칫한 에시엘은 어색하게 웃음을 거두었다.
“웃는군.”
롬포드 대공이었다. 그는 냄비를 들여다보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에시엘의 목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참이었다.
“처음 보는데.”
“대, 대공님?”
“그래.”
뜻밖이었다. 당황스러움에 불러 본 ‘대공님’이란 호칭에,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대답이 들려왔다.
“……이제 안 아파요?”
에시엘의 깜짝 놀라 다물어질 줄 모르던 입이 가까스로 제 의무를 다하며 말을 뱉어 냈다.
“보다시피.”
“다, 다행이에요! 그리고 으음, 신관을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
그저 형식적인 물음과 답으로 끝난 대화였다. 이어지는 정적에 에시엘은 괜스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원래 저렇게 웃었나.”
의문문인지 아닌지 알아차리기 힘든 롬포드의 물음이 도프니에게 향했다. 웃는 낯으로 주방을 들어서던 에시엘의 모습을 떠올리며 묻는 듯했다.
“예, 예. 곧잘 웃으십니다.”
“그렇단 말이지.”
용케 알아들은 도프니가 답했다. 정직하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매서운 롬포드의 시선이 돌아왔다. 도프니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일단 좀 더 해 봐. 이만 가지.”
“예, 알겠습니다.”
롬포드는 주방을 나서려는 듯 걸음을 움직였다. 도프니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고 멀뚱멀뚱 서 있던 에시엘도 허둥지둥 인사를 했다.
‘냄비에 들어 있는 게 뭐길래 그러는 거지?’
도프니는 냄비 속을 휘젓더니 끓이던 것을 작은 그릇에 소량을 덜어 간을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도프니, 그게 뭔데?”
“주인님께서 시키신 건데, 배를 끓인다고 맛이 있을는지는…….”
에시엘이 지난번 주었던 배숙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또 누가 아픈 사람이 있나?’
에시엘의 마음속에 의문점이 생길 즈음, 도프니는 냄비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다른 곳에 밀어 둔 뒤 말했다.
“자, 그럼 오늘은 케이크를 만들어 볼까?”
“으응. 잘 만들 수 있겠지?!”
“물론! 못하더라도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도프니는 너그럽게 미소 지었다.
곧 주방의 공중에는 하얀 밀가루가 일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에시엘이 해낼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조금 엉성한 케이크는 반나절이 꼬박 지나고서야 완성되었다. 겨우 양 손바닥을 합친 크기 정도로 작았지만, 제법 그럴듯했다. 케이크의 윗면에는 짤 주머니로 서툴게 그려 낸 강아지인지 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고생했구나, 하하.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네.”
“음……. 아! 나, 이거 가져갈래.”
도프니는 에시엘의 볼에 하얗게 묻은 밀가루를 닦아 주곤 ‘얼마든지!’ 하며 케이크를 접시에 옮겨 주었다.
에시엘은 도프니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접시를 그러쥐었다. 주저 없이 주방을 나선 그녀는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어린아이의 보폭으론 뭐든 서둘러야 했다.
‘팬케이크를 먹는 걸 보면 케이크도 좋아하겠지?’
그녀는 롬포드의 침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팬케이크를 다 먹어 버린 게 미안해서 사과의 의미로 케이크를 주려는 생각이었다. 그 팬케이크가 어차피 버려질 것이었다는 사실은 미처 꿈에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드넓은 저택에서 무의식중에 향했던 침실의 위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에시엘은 곳곳의 그럴싸한 문을 모두 열어 보던 중, 우연히 살핀 어느 장소에서 롬포드를 똑 닮은 검은 뒤통수를 발견했다.
“어?”
살짝 열린 틈으로 본 머리칼은 분명 새카만 흙빛이었다. 하지만 체구를 보니 롬포드는 아니었다. 롬포드와 닮은 남자아이는 손에 쥔 검을 휘두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레고니스 저택의 연무장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움직임이 어린아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잽싸고 기민했다. 그런 그의 앞에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채 지푸라기가 다 튀어나온 훈련용 짚 인형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휘두르는 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시엘은 남자아이가 훈련하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봤다. 연무장에는 후웅, 후웅 하며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짚을 향해 내다 꽂아 서걱거리는 소리만 연신 울렸다.
머지않아 남자아이는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힘들 훈련임에도 내색 하나 하지 않고 가만히 숨만 고르고 있었다.
에시엘은 그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아이의 시선이 에시엘을 향했다. 새카만 머리칼과 대비되듯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남자아이는 분명 레고니스 가문의 장남이리라.
“뭐야.”
“어……. 아, 안녕.”
에시엘은 쭈뼛거리며 답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듯한 아이의 눈빛이 강렬했다.
“그, 그게, 나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네. 미안!”
“…….”
숨이 막히는 듯한 정적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려는 찰나, 에시엘은 들고 있던 접시와 남자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음, 이거 먹을래?”
에시엘은 접시에 담긴 케이크를 남자아이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이는 케이크를 힐긋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서 본 남자아이는 유난히 몸집이 작은 에시엘과 세 뼘은 족히 차이가 나는 듯했다.
남자아이는 에시엘이 들이민 케이크를 이상하리 만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
“괜찮으니까 너나 먹어.”
무심히 말을 내뱉은 아이는 에시엘의 어깨를 밀치며 연무장을 나섰다. 그 탓에 접시를 놓치자 케이크는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졌다.
푸욱―. 생크림이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접시가 뒤집혀 있었다. 에시엘의 드레스에 생크림이 묻은 것도 당연했다.
“어, 어……!”
에시엘의 손이 갈피를 잃고 어정쩡한 모양새로 공중에 뻗어 있었다.
혼자 남겨진 연무장에서 에시엘은 팔을 내릴 생각도 못 하고 허망한 눈으로, 뒤집힌 접시와 엉망이 된 자신의 드레스를 바라봤다.
* * *
렌테는 걸음을 바삐 움직여 집무실을 향해 갔다. 바쁜 발걸음만큼 서둘러 노크를 하자 머지않아 문 반대쪽에서 출입을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렌테는 말없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집무실에는 롬포드 외에 찰츠도 함께였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의 전쟁이든 간에 자신들의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 회의를 하던 참이었다.
“각하. 신관이 이르길 그 볼모에게 지속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더군요.”
“어째서지?”
“그게…… 몸에 남은 흉터가 학대의 흔적이 확실하다 합니다.”
“학대가 확실하다?”
순간 롬포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시종들이 보았던 것이 틀리진 않았나 봅니다.”
“…….”
“각하. 어떻게 할까요.”
정적이 흐르는 집무실 안, 렌테와 찰츠의 이목이 롬포드에게 쏠렸다. 길게 뻗은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는 그의 모습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신관에겐 왕진 보수를 두 배로 주고, 신전에는 정기 후원을 하지.”
이에 렌테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제 품에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었다.
“그리고 각하께 편지가 왔습니다.”
“누군가.”
“아나이스 소왕국입니다.”
롬포드의 눈동자가 이에 반응하듯 희미하게 이채를 띠었다. 그리고 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내밀어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 볼모, 지난밤에 꼴이 엉망인 채로 방을 향하더군요.”
“엉망이라?”
거침없는 손길로 봉인을 뜯어내던 롬포드가 되물었다.
“드레스에 뭘 묻힌 모양인지 꾀죄죄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롬포드의 한쪽 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그는 다시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아끼면서 애지중지 키운 하나뿐인 딸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행동거지가 점잖고 몸가짐이 바르기에 딱히 챙기시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구태여 아이를 돌려보내려 발걸음하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저희 왕국에 제시한 협상 조건을 철회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온갖 번지르르한 말로 쓰여 있지만 결국엔 에시엘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됐음을 알리는 이야기였다. 편지에 담긴 아이에 관한 내용이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 하나로 에시엘이 볼모의 역할을 할 수 없음이 자명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