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롬포드는 편지를 책상 위로 내버려 두며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필요 없다 하는군. 제 자식을.”
“정말 미친 거 아닙니까?!”
롬포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장 먼저 큰소리를 친 사람은 찰츠였다. 그는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이 들썩일 만큼 분노를 참지 못했다.
“찰츠 경. 자제하시지요. 화가 나는 마음은 이해하나, 각하의 앞입니다.”
렌테의 나긋한 어조와 달리 연륜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이 찰츠를 향했다. 이어 렌테는 롬포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군요. 고작 여덟 살인 아이인데 말입니다.”
“그 볼모, 여덟 살이었습니까? 그 나이치곤 터무니없이 작은 몸집이네요.”
하지만 렌테의 말을 이어받은 사람은 찰츠였다. 롬포드는 생각에 잠긴 듯 멋대로 던져 놓은 편지를 바라보며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자아이라고 한들, 고작 한 살 어린 둘째 도련님과도 체구가 한참 차이 나네요. 이건 명백한 아동 학대라고 보아도…….”
인상을 찡그리며 분노를 쏟아 내던 찰츠는 내뱉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멈추었다.
“어찌 자식을 버리겠다고 말합니까. 정말이지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
렌테 또한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쓸모없는 식솔만 늘린 것 같군요.”
“…….”
잇따라 렌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롬포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어 렌테는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말했다.
“각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렌테가 재차 되물었으나 롬포드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낯빛이 서리며 일말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얼마 못 간 그 정적을 깨트린 사람 또한 롬포드였다.
“재단사를 부르도록 해.”
“예? 각하, 의복은 일주일 전에 맞추시지 않았습니까.”
“브란체의 라줄리가 오는 것이 좋겠군.”
말을 마친 롬포드는 거침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브란체는 어린 귀족들의 전문 부티크로 통하는 상점 중 단연 으뜸인 곳이었다.
* * *
똑똑―.
에시엘의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에 에시엘은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뭐, 뭐지?’
이 저택에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전 노크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은 왕성에 있을 적에도 당연한 일이었다. 벌컥벌컥 열리던 문에 익숙한지라 예의를 차린 노크 소리는 어색하기만 했다.
에시엘은 문을 향해 쪼르르 다가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틈새를 통해 빼꼼히 내다보자 그곳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참 귀여운 아가씨군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저, 저기.”
거침없이 들어서는 이의 행색이 저택의 사용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평민이라고 하기엔 꽤 고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이내 낯선 여자는 손에 한가득 들린 짐을 턱― 하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누구세요……?”
에시엘은 제 초록색 눈을 깜빡이며 여자와 짐을 말똥말똥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는 브란체 부티크의 라줄리예요. 재단사랍니다! 대공님의 지시로 아가씨의 의복을 맞춰 드리려고 왔어요.”
계속해서 에시엘은 눈만 말똥히 뜨고 라줄리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레 의복을 맞춰 준다며 등장한 여자가, 심지어는 롬포드의 부름으로 온 것이라는 사실 또한 믿기지 않았다.
“따로 전달받은 게 없으신가요?”
얼떨떨한 듯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 의아한지 라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게, 저는……. 저는 에시엘 아나이스예요.”
에시엘은 괜스레 기가 죽어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와, 예쁜 이름인데요? 그럼 이제 치수를 측정할게요! 잠시 팔을 벌려 주시겠어요?”
생긋 미소 지은 라줄리는 바닥에 내려놓은 짐을 뒤적거리더니 곧 줄자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에시엘은 엉거주춤한 움직임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라줄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에시엘의 몸 곳곳을 측정했다. 어깨, 팔, 허리, 다리 등 이곳저곳의 치수를 재고 메모장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정말……. 전해 들은 것보다도 훨씬 체구가 작으시네요.”
사뭇 진지하게 제 턱을 매만지며 라줄리가 말했다. 잠시 고민이 가득한 얼굴을 하던 라줄리는 머지않아 추가적인 사항을 메모장에 적어 놓는 듯했다.
“이게 맞을지 모르겠네요? 제일 작은 거로 가져오긴 했는데…….”
라줄리는 또다시 짐을 뒤적거렸다. 물건을 찾는 동안에도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부산스러운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무언가를 꺼내 들곤 탁탁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움이 묻어 나오는 아이용 드레스였다. 미리 만들어 둔 옷을 용도별로 챙겨 왔는지 가짓수가 제법 되었다. 라줄리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춤복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열흘은 걸리니까요. 여벌로 조금 가져왔답니다.”
“조, 조금이요?”
“네! 아무래도 치수가 작은 옷은 넉넉지 않아서 많이는 못 챙겼답니다.”
라줄리는 꽤 많은 옷가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절대 적지 않은 옷을 보고 놀라는 에시엘을 뒤로한 채 그녀는 옷장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옷을 걸었다. 라줄리는 옷을 정리하면서도 하나하나 부연 설명을 잊지 않았다.
깔끔히 정리된 옷장을 보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것을 빤히 응시하다가, 에시엘과 옷가지를 연신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왜, 왜요?”
“아무래도 이거 입어 보는 게 좋겠어요! 하나 골라 보시겠어요?”
라줄리는 에시엘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심 에시엘이 입고 있던 지저분한 드레스가 신경이 쓰인 탓이었다.
“괜찮아요, 얼른요!”
망설이며 선뜻 지목하지 못하는 에시엘의 모습에 라줄리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녀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생긋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이윽고 에시엘이 머뭇거리며 집게손가락을 뻗었다.
* * *
탁탁탁―.
빠르게 내달리는 에시엘의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녀가 서두르고 있는 이유가 무언가에 쫓긴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에시엘은 기분이 좋은지 광대가 볼록이 솟아오를 정도로 한껏 미소 짓고 있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 때문이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보다 채도가 연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한껏 풍기는 분홍색 드레스였다.
‘얼른 가서 자랑해야지!’
드레스는 색이 고울 뿐만 아니라 장식을 이루는 레이스나 단추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정교함이 묻어났다. 아이의 약한 피부를 신경 쓴 듯 몸에 닿는 부드러운 원단 또한 몹시 고급스러웠다. 에시엘에게 이런 드레스는 난생처음 갖는 것이었다.
주방까지 향하는 길목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했다. 에시엘은 주방의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외쳤다.
“도프니!”
주방 고용인들의 이목이 한껏 집중됐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에시엘은 드레스를 자랑하고 말겠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에시엘? 어쩐 일이냐?”
도프니는 한 손에 국자를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찾아오지 않던 시간에 온 아이의 모습은 어쩐지 신이 나 보였다.
“히히. 이거 봐!”
에시엘은 드레스 끝자락을 살짝 쥐고 배시시 웃었다. 뛰어온 탓인지 잔뜩 설레기 때문인지 약간 상기된 에시엘의 볼이 발그스름했다.
“어어……? 어어!”
그 말에 그녀의 모습을 훑던 도프니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며 미소가 생겨났다. 도프니는 저도 모르게 국자를 조금 들어 올렸다.
“어때, 어때?”
에시엘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답을 보챘다. 에메랄드색을 띤 에시엘의 눈동자가 청청히 빛났다.
“웬 드레스냐? 정말 예쁘구나, 하하하!”
도프니는 만족스러운 투로 웃으며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던 에시엘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헤헷. 응! 이거, 대공님이…….”
“내가 뭘 어쨌다는 거지?”
순간 들려오는 쌀쌀맞은 목소리에 에시엘과 도프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주방에 정적이 흘렀다.
에시엘로선 공기의 흐름마저 바꿀 만큼 낮은 목소리의 주인이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롬포드가 서 있었다. 그는 차디찬 기운을 담은 붉은 눈동자로 에시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하. 오, 오셨습니까.”
가장 먼저 정적을 깨트린 사람은 도프니였다. 그는 곧장 행색을 단정히 하며 롬포드에게 인사를 건넸다.
곧이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주방의 고용인들도 일을 제쳐 두고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그저 힐끗 바라보고 말 뿐인 롬포드는 금세 다시 에시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던 롬포드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제 저택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기애애한 기운의 근원지를 찾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이 조막만 한 볼모가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얘기해 봐.”
“네, 에?”
“뭘 어쨌다고?”
롬포드는 집요하게 재차 되물었다. 여전히 따뜻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눈빛이었다.
도프니를 포함한 주방의 고용인들 모두가 숨 막히는 상황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시엘은 롬포드의 시선을 피해 데록데록 굴리던 눈동자를 겨우 그의 구두 앞코에 고정시켰다.
“그, 그게…… 재단사라는 사람이 왔다 갔는데요. 옷을 맞춰 준다고 했는데요, 아니. 만들려면 오래 걸린다고 해서요, 이 드레스를…….”
“얘기하고 싶은 게 뭐지?”
롬포드는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이며 에시엘의 말을 끊어 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영 마땅찮은 모양이었다.
“그게, 그 사람을 대공님이 불렀다고 들었거든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롬포드의 시야에 오물쪼물 움직이던 입 대신 작은 머리통이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