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체리아나는 자신의 지위도 잊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편인 오스월 자작이 제가 이 사달을 일으킨 것을 알게 된다면 가벼운 꾸지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체리아나는 멍한 눈을 하고 ‘안 돼, 안 돼…….’ 같은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쳐다보던 롬포드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한 발자국 내딛으려는 찰나, 잠시 그 움직임을 멈춘 롬포드가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따라와.”
그는 에시엘을 향해 말했다. 에시엘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체리아나와 롬포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네, 네에!”
얼결에 답한 에시엘은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제 자신이 혼날 차례인가 싶어 걱정이 앞섰다.
걷는 내내 롬포드는 에시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시엘은 그가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한 마음은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볼모가 소란까지 피웠으니 이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는 건가?’
롬포드는 그의 성격답게 요란 떠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치를 떤다는 표현이 제격일 만큼 싫어했다. 에시엘은 소설을 통해 그가 소란 피우는 자와는 애초에 상종도 하지 않고 목에 칼을 들이민 전적을 알고 있었기에 초조함이 더욱 사그라지지 않았다.
에시엘은 생각에 잠긴 채 앞서가는 롬포드의 뒷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어쨌든 소왕국에서보다 좋은 방에서 지내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으니 여한이 없다는 생각들이 주를 이뤘다.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몰라 잔뜩 긴장했기에 절로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단단한 무언가에 작은 머리통을 콩 부딪쳤다. 이에 반 발자국 뒤로 밀린 에시엘은 제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앞서가던 롬포드가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롬포드가 뒤돌아 에시엘을 내려다보며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시야에 한눈에 봐도 패악을 그대로 받아 내어 헝클어진 머리칼과 여기저기 상처 난 작은 몸이 들어찼다.
“앗, 죄, 죄송…….”
“……신관을 또 불러야겠군.”
“네?”
에시엘이 제대로 듣지 못해 재차 되물었지만 롬포드는 더 이상의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작은 머리통을 향해 손을 뻗어오자 에시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
한데 에시엘의 예상과 달리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롬포드는 서툰 손길로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정돈해 주고 있었다. 다만 몹시도 서툰 손길이었기에 정돈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용서를 구할 필요 없어. 네 잘못이 아니니.”
에시엘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어 큰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롬포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제 앞의 문을 열 뿐이었다. 에시엘의 방이었다.
“들어가.”
큰 손이 에시엘의 등을 밀어 내자 얼결에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롬포드는 주저 없이 문을 닫았다. 홀로 방에 들어선 그녀가 멀거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뭐지?”
고요한 방 안에 에시엘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 생겨났다. 이제는 진정 죽음으로 내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이를 자작 부인이라 칭한 것을 보면 그녀가 귀족 가문의 사람인 것은 분명한데, 롬포드는 오히려 에시엘의 편을 들어주었다.
에시엘은 골똘히 생각했다.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직 소왕국과 협상을 하지 못해서인 걸까.’
하지만 그저 추측이었기에 명확한 의중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볼모로서의 제 역할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롬포드는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한 듯 평소에도 빠른 걸음이 더욱 빨라져 있었고, 냉정한 얼굴 또한 더욱 차가운 낯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살벌한 모습에 블레게스의 뒤처리를 끝내고 따라붙은 렌테조차도 쉬이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조금씩 눈치를 살피던 렌테가 입을 열었다.
“각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에 롬포드는 무서운 속도로 재촉하던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을 뒤따르던 렌테에게 되레 물었다.
“밀러먼드 가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지?”
“그리 중한 정도는 아닙니다.”
대답을 들은 롬포드의 고개가 위아래로 어슴푸레하게 움직였다.
곧 롬포드는 다시 회의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밀러먼드 가문의 영향력이 희미하다라. 제 생각도 그러했다. 그런 가문이 다시는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지 못하게 만드는 것쯤은 쉬웠다.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별일이 아닐 테지.
빠르게 도착한 회의실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여러 가문의 내로라하는 가신들임에도 시장통을 방불케 할 정도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롬포드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향하자 갖은 소음이 사그라들었다. 그의 모습을 흘겨보던 가신들은 압도적인 긴장감에 저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내 롬포드가 자리에 앉았다. 다급히 사라졌던 롬포드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어느 하나 쉬이 물어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롬포드는 가신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자가 있었다. 다름 아닌 오스월 자작이었다. 오스월은 롬포드와 눈이 마주치자 제 앞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목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런 그에게 동상이몽이란 말이 제격이었다.
“오스월 자작.”
“예. 대공 각하.”
오스월은 충직한 신하처럼 근엄하게 답했다.
“철광 사업을 맡겼던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는 제법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엔 오늘따라 아량 넓은 모습을 보이는 롬포드가 일을 잘 해내고 있는 자신을 칭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스월은 롬포드가 덧붙인 말에 벙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철회한다.”
“예?! 어, 어째서 말입니까?”
오스월은 놀란 탓에 옴짝달싹하는 몸을 절제해야 했다. 주변의 가신들 또한 한껏 커진 눈을 숨기지 못했다.
철광 사업은 레고니스 가문에서 가장 유력하게 밀고 나가던 사업이었다. 제국의 검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전쟁에 쓰이는 무기 생산에도 힘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차 영역을 넓히기 위해 다른 가문과 분업을 시도했다.
그중 밀러먼드 가문이 선발된 이유는 가문 특유의 내력으로 인해 남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무지막지하게 큰 키를 소유했다든가 0.1톤은 거뜬히 넘을 체중을 가졌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제 집안의 사람조차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는 자에게 대체 뭘 맡기지?”
“예? 지, 집안의 사람이라니요?”
오스월은 이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내리친 테이블에선 둔탁한 소음이 크게 울렸다. 롬포드의 시선이 힐긋 테이블에 향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는 곧 오스월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낯을 훑었다.
“저보다 약한 이를 박해하는 것이 수준급이더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통 이해할 수가…….”
그때 오스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함께 대동한 제 부인과 자식이었다.
“서, 설마…….”
오스월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테이블 위로 말아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대공의 어린 공자들과 친해지는 것 외에는 잠자코 있으라 했건만, 그새 롬포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다른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쯧. 고작 이 정도에 그치는 걸 감사히 여겨.”
롬포드는 냉엄하게 경고하며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하지만 오스월은 그의 처사에 순순히 응할 수 없었다. 레고니스 가문의 힘이 실려 있던 철광 사업이 철회된 것만으로도 제 가문엔 엄청난 타격이 올 터였다.
롬포드를 뒤따른 렌테가 또다시 소란스러워지려는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자, 그 앞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체리아나가 서 있었다.
“대공 각하!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체리아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뒤쪽의 문이 벌컥 열리며 오스월이 뒤따라 나왔다. 오스월의 부릅뜬 눈이 체리아나를 향했다.
“체리아나!”
“여, 여보. 걔는 그냥 볼모였다구요……!”
오스월의 호령에 체리아나는 한껏 억울함이 깃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스월은 차마 부인을 꾸짖지 못한 채 롬포드의 눈치만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들을 지켜보던 롬포드의 핏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냥 볼모라.”
“대, 대공 각하, 부디 아량을 베풀어…….”
오스월은 다급하게 롬포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더없이 간사를 떨었다. 롬포드가 철회한 사업을 다시 되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 그가 명을 번복할 리 없을 거라는 사실은 오스월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와중에 체리아나는 제 남편의 가긍한 모습을 차마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이 설령 제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도, 밀러먼드 가문에 대한 긍지가 유난히 치솟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대공 각하! 어째서 볼모 따위를 감싸시는 거죠?”
체리아나는 회심의 한 방이라도 날리듯 악에 받쳐 말했다. 제 눈에 비치던 에시엘은 고작 볼모에 지나지 않았다.
“감싼다고? 그것참…… 시답잖은 질문이군.”
롬포드는 어쩐지 뜸을 들였다. 당연히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음에도 뜸을 들이는 제 모습이 의아했지만 곧 생각을 지워 냈다.
“체리아나 자작 부인은 내 저택에서, 감히 내 것에 손을 대었단 말이지.”
“…….”
“내 허락 없이.”
대공저에서 대공의 것을 함부로 건드렸다. 설령 그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었고, 볼모였다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롬포드의 싸늘한 시선이 눈앞의 벌벌 떠는 이들을 향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도록 해.”
“아, 아…….”
“다음번엔 진정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롬포드는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오스월은 망부석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여 넋이 나간 꼴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