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마카이른 제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롬포드 대공이 소왕국에서 데려온 볼모를, 회의차 대공저에 방문했던 밀러먼드 가문의 사람이 해코지했다가 오히려 뼈도 못 추렸다는 소문이었다.
본디 소문은 점차 과장되기 마련이다. 차츰 크기를 부풀린 소문은, 급기야 그들의 새끼손가락이 하나씩 잘려 나갔다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롬포드의 드높은 악명에 벌벌 떨면서도 금세 수긍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해코지를 당했다는 볼모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체 그 볼모가 무어라고 손가락까지 자른 것일까 하면서.
“야! 에시엘!”
호들갑스럽게 에시엘을 부르며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사람은 페루딘이었다. 제국에 퍼지던 소문을 듣고 길길이 날뛰다가 결국엔 그녀의 방에 오게 된 것이었다.
“으응?”
에시엘은 페루딘이 들어선 문가를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오늘 아침 또 방문한 신관의 치유를 받고 하릴없이 쉬던 참이었다.
“괜찮아?!”
“뭐, 뭐가?”
페루딘은 방이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외쳤다. 화가 난 것인지, 숨이 찬 것인지 낯빛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에시엘의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났지만, 우선은 페루딘을 따라 얼결에 앉아 있던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누구야, 어디 있어! 괴롭힌 애들 다 데려와!”
페루딘은 더욱이 언성을 높이며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거렸다. 전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금방 주먹다짐이라도 할 모양새였다.
에시엘이 페루딘의 말에 상황을 파악하려 눈을 끔벅이는 동안 일말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밀러먼드 가문의 부인과 영식이 괴롭혔던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페루딘은 그새를 못 기다리곤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팔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심지어는 머리칼이 쥐어뜯기진 않았는지 살피고 있었다.
“신관도 왔다 갔고, 나 괜찮은데…….”
“야! 멍청한 게, 너도 같이 때려 줬지?”
에시엘이 고개를 살짝 올려다보니 페루딘의 얼굴은 어느새 가라앉아 뽀얗게 돌아왔다. 하지만 화가 난 듯 찡그린 눈매 사이 주름진 미간은 여전했다.
“아니, 같이 때리진 않았는…….”
“뭐?! 그럼 맞기만 했다고? 야, 앞장서!”
에시엘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페루딘은 펄쩍 뛰며 문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도 에시엘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끌고 나가기 위해 손목을 잡아채려 했다.
“히힛.”
불현듯 에시엘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리곤 방싯 미소 지었다.
“……왜, 왜 웃어? 너 웃음이 나와?”
“고마워서! 지금 내 걱정해 주는 거잖아.”
“뭐? 걱정이라고? 아, 아닌데?! 절대 아닌데!”
페루딘은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물곤 질색하며 부정했다. 어린아이인 페루딘은 강한 부정은 오히려 강한 긍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럼 왜 화를 내?”
“이, 이게……! 다, 당연히…… 걔네가 우리 가문을 얕봤으니까!”
잠깐 새에 페루딘의 빨간 눈동자가 이리저리 쉼 없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마땅한 핑곗거리를 떠올리기 위함인 듯했다.
“으음, 그렇긴 하지.”
이에 에시엘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부정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에시엘은 페루딘이 여전히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다는 생각 따위를 했다.
“그럼 너 괜찮은 거 맞지?”
페루딘은 괜스레 방을 휘휘 둘러보며 물었다. 잔뜩 흥분했을 때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후자인 지금,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응. 나 완전 튼튼해!”
에시엘은 팔꿈치를 굽히곤 있지도 않은 근육을 자랑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 * *
가신들의 정기 회의 날로부터 며칠 후.
도프니에게 쿠키 만드는 법을 배운 에시엘은 방으로 돌아가려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주방에 갈 때면 뜻하지 않게 매번 맛 좋은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어 배는 곯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곰돌이 모양으로 구운 제법 귀여운 쿠키도 들고 왔다.
‘비상식량으로 아껴 둬야지.’
에시엘은 쿠키를 보며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손에 느껴지는 뜨끈한 온기가 마음에 한층 여유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다 재차 쿠키를 내려다봤을 땐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에이. 그래도 나눠 먹어야 맛있지.”
고개를 주억거린 에시엘은 곧장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좁은 보폭을 서둘러 보채어 바삐 걸었다.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연무장이었는데 테이시는 역시나 그곳에 있었다. 에시엘은 슬몃 미소를 지었다.
검술 수련을 하는 모양인지 테이시는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연습한 것인지 휘날리는 머리칼 몇 가닥은 땀이 흐른 이마에 붙어 있었다.
에시엘은 가만히 그 모습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만약 이 아이라면, 어쩌면 추후 자신이 도망갈 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깟 비상식량도 아깝지 않았다. 그날을 위해서라도 테이시와 친해지는 것은 에시엘에게 중요한 과제였다.
그녀는 희미하게 도리질을 치곤 곧 활기찬 발걸음으로 테이시에게 다가갔다.
“안녕!”
“…….”
그러나 에시엘이 활기차게 인사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테이시의 반응은 미미했다. 그는 검을 휘두르다 멈추고 그저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
“나, 이거 또 가져왔어!”
에시엘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보이며 제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곰돌이 쿠키는 어느 누가 봐도 퍽 귀여운 모양새였다.
“주고 싶어서……. 헤헤.”
테이시는 에시엘이 내민 쿠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붉은 머리칼의 아이는 어쩌자고 자꾸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상대하지 않는데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한 걸음 밀쳐 내면 오히려 세 걸음을 다가오고 있었다.
“자!”
에시엘은 테이시의 손을 붙들어 쿠키를 직접 쥐여 주었다. 쿠키가 산산조각이 났던 지난날의 기억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던 테이시가 웃고 있는 표정의 곰돌이 쿠키를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야! 놀……자?”
페루딘은 에시엘과 테이시의 이목을 단번에 끌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나타났다. 복도를 지나다 발견한 붉은 머리칼에 장소가 어디이던 신경 쓰지도 않은 채 무작정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가 의외의 인물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씩씩하던 페루딘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제 형과 에시엘을 수차례 번갈아 보았다. 대체 무슨 연유로 같이 있는 것인지 궁금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형아. 왜 얘랑 같이 있어?”
호기심을 참다못한 페루딘의 물음에 테이시가 손에 들린 쿠키를 품 안으로 감췄다. 그러곤 두 아이의 등을 문가를 향해 밀어 냈다.
“둘 다 나가.”
“엉? 아, 왜! 형아!”
페루딘의 부름에도 테이시는 대꾸가 없었다. 결국 에시엘과 페루딘은 테이시에 의해 등 떠밀려 연무장을 떠나야 했다.
“쳇.”
페루딘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에시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놀자! 나가서 숨바꼭질하자!”
“으응. 그래.”
에시엘은 연무장을 힐끗 쳐다보곤 페루딘의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신전.
“루아네즈 님. 잊지 않으셨죠?”
“뭘요?”
“잠시 후에 대신관 수업이 있으십니다.”
눈을 말똥히 뜬 채 되묻는 어린아이에게는 아직 풋내가 물씬거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답하는 이는 짐짓 엄한 표정과 목소리로 일정을 알렸다.
“싫다…….”
어린아이는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자신의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와 더불어 쭉 내민 입술을 우물대기도 했다. 미약한 움직임을 따라 아이의 은백색 머리칼도 하늘하늘 흔들렸다.
수업을 싫어하는 기색을 말과 행동으로 역력히 내보이는 이 어린아이는 클레드인 루아네즈였다.
3년 전인 제국력 294년, 그는 역대 어느 대신관들보다도 뛰어난 신력을 가졌다고 평가되어 차기 대신관으로 지목된 아이였다.
클레드인은 지금보다 더 어릴 적 보육원으로 보내졌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로 인해 부모를 여의고 혼자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신력을 가진 자들을 찾아다니던 신관들이 그를 발견했다.
보육원장은 신전에서 제시한 많지 않은 금액에도 만족해하며 아이를 팔아넘기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암중공작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시절 아직 다섯 살 무렵이었으나 선택권이 없는 어린아이였기에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클레드인은 끔찍한 마차 사고와 더불어 이젠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는 과거를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의 존재가 중요했다.
클레드인의 잠재돼 있던 신력은 현재 엄청난 권력이 되었다. 그 힘이 얼마나 더 세졌을지는 감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신관은 어린 클레드인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다가도 그의 능력에 한해서는 벌벌 떨기에 급급했다.
“세브리트.”
클레드인은 어딘가 분주한 듯 움직이는 제 앞의 갈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 세브리트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부신관인 세브리트의 업무는 주로 대신관을 보필하며 일을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어린 클레드인을 돌보며 대신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예.”
“……간식이라도 먹게 해 줘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클레드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기 대신관의 신분인 아이는 먹는 것마저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였다.
세브리트는 클레드인이 간혹 보이는 이러한 모습을 마주할 때면 그가 그저 영락없는 아이라고 느껴졌다. 코끝이 시큰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미룰 순 없었다. 현 대신관의 수명이 다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만 얼른 준비해 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괜스레 콧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린 세브리트가 간식거리를 챙기기 위해 서둘러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