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넓은 방에 혼자 남겨진 클레드인은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딘가 앉아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 세브리트가 조심스레 닫고 나간 커다란 문만 보고 있었다.
“언제 오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클레드인이 손바닥을 펼쳐 제 눈 가까이 들어 올렸다. 머지않아 몹시도 밝은 빛이 조그만 구 형태로 생겨나 빛을 뿜어내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것이 열세 개째 사라지고 열네 개째 생겨나려던 찰나, 커다란 문이 열리며 세브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동시에 클레드인은 황급히 자신의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세브리트의 손엔 갖가지 과일이 담긴 그릇이 들려 있었다.
“루아네즈 님, 앉아서 기다리지 그러셨어요.”
세브리트는 곧장 소파로 향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통창 앞에 자리한 소파에선 냉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아요.”
클레드인이 세브리트를 따라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시원시원한 입매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릇에 담긴 알알이 떼어진 청포도 한 알을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음…….”
세브리트는 클레드인이 마치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보다가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시계를 가만 보던 세브리트의 다물린 입술 새로 시간을 가늠하는 의미 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세브리트의 시선이 시계에 머무르는 동안 클레드인은 눈치를 살피곤 조심스레 사과에 손을 뻗었다. 그것은 마치 들키지 않으려는 비밀스러운 행동처럼 보였다.
곧이어 클레드인은 사과를 쥔 손에 조그만 구를 만들어 냈다. 희미한 빛이 사과에 겹쳐졌다가 점차 서서히 그 안으로 깃들기 시작했다. 이에 클레드인의 입꼬리가 살풋 솟는 것도 잠시, 그는 사과를 빠르게 제 품속으로 숨겼다.
“아무래도 다 드시면 바로 이동하셔야겠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몇 시간이에요?”
클레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청포도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네 시간 정도 예상됩니다.”
“그렇구나…….”
세브리트는 뜸 들이며 말하면서도 클레드인의 기분을 살폈다. 고작 여덟 살의 아이가 감당하기엔 버거울 기나긴 수업이었다.
똑똑―.
커다란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에 세브리트가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자 클레드인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세브리트는 문틈 새로 몸을 반쯤 걸친 채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머지않아 사뭇 심각한 표정을 하곤 돌아왔다.
“루아네즈 님, 저 잠시 가 봐야겠습니다. 먹고 계시면 금방 오겠습니다.”
클레드인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세브리트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또다시 혼자 남겨진 클레드인은 품에서 사과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아까 세브리트 몰래 신력을 깃들여 놓은 것이었다.
“됐다.”
그가 간식을 먹겠다고 말하는 일이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신력은 인위적인 술수로도 서서히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대표적인 방법이 신력을 깃든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음식에 신력을 깃들여 놓은 사람의 힘이 강할수록 뛰어난 효과가 나타났다.
그래서 차기 대신관으로 지목된 클레드인에겐 더욱 주의와 보호가 필요했다. 클레드인은 함부로 힘을 남용해서도 오용해서도 안 되었고, 그가 먹을 음식의 반출입도 엄격하게 이뤄졌다.
클레드인은 만족스럽게 만지작거리던 사과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커다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브리트, 미안해요. 네 시간은 안 돼요.”
혼잣말을 하던 클레드인은 어깨를 으쓱이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 빠른 고갯짓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의 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뜀박질로 바뀌어 줄행랑에 박차를 가했다.
* * *
에시엘은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도 다급하게 잰걸음을 옮겼다. 페루딘에겐 넉넉하게 100초를 세어야 한다고는 했지만 워낙 멋대로인 성격의 아이가 순순히 응할지는 미지수였다.
‘찾기 전에 서두르자.’
그녀는 잡히지 않기 위해 가 보지 않았던 곳에 가서 숨어들 작정이었다. 정원을 지나치고 곧장 저택의 뒤쪽까지 이르렀다.
웅장한 레고니스가의 저택은 부수적인 여러 시설의 규모도 엄청났다. 이를테면 에시엘의 눈에 띈 마구간이 그중 하나였다.
‘저기가 좋겠다.’
마카이른 제국에 명성을 떨친 레고니스 가문답게 마구간 하나도 허투루 만들어 두지 않았다. 치열하게 치러질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선 말들의 컨디션 또한 늘 최상을 유지해야 했다. 그렇기에 마구간 근처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평야에 말이 방목되기도 했다.
에시엘은 조심스레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문이며 창문이며 내외부를 경계 짓는 어떠한 것도 있지 않았기에 더욱 출입이 용이했다.
“마, 말이다…….”
발소리를 느낀 말들이 저마다 히힝― 하는 잔잔한 울음소리를 냈다. 에시엘은 몸을 흠칫 떨었다.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처음 마주하는 말이 낯설어 두려운 맘이 조금씩 생겨났다.
“아, 안 되겠다.”
에시엘은 연신 말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뒷걸음질쳐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뺑 돌아 마구간의 뒤쪽으로 향했다. 지레 겁을 먹었지만 페루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택한 장소는 바꾸지 않을 모양이었다.
마구간의 뒤쪽에는 말들의 먹이로 쓰일 지푸라기 더미가 빼곡히 쌓여 있고, 맞은편엔 그림 같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자신을 찾아다닐 페루딘을 피해 숨어들기도, 어쩌면 잠깐 농땡이를 피우기도 제격인 곳이었다.
에시엘은 행복한 상상에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껏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지푸라기 더미를 향해 다가가 마치 침대 위로 다이빙을 하듯 풀싹 뛰어 앉았다.
“윽!”
그 순간 어떤 비명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뭐, 뭐야?”
에시엘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에시엘을 놀리기라도 하듯 주변엔 정적이 흘렀다. 이따금 새의 지저귐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푸라기 더미 위에 다시 한번 조심스레 앉았다.
“아아!”
되풀이되듯 들려오는 소리에 에시엘은 또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지푸라기 더미를 두려움 섞인 눈초리로 빤히 바라봤다. 지푸라기가 말을 할 리도 없는데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일까.
“어……?”
순간 에시엘의 시야에 노란 지푸라기 사이로 빛이 나는 무언가가 언뜻 들어왔다. 에시엘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집게손가락을 꼿꼿이 세우곤 그것을 향해 점차 다가갔다. 그리고 한껏 집중해 손가락으로 그것을 푹 찔렀다.
돌연 무언가 튀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공중에는 지푸라기가 흩날렸다.
“으악!”
“으앗!”
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란 에시엘은 그대로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곤 큰 눈을 연신 끔벅거렸다.
그런 에시엘과 대치하듯 맞은편에 똑같이 주저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클레드인이었다. 그 역시도 놀란 탓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헉…….”
“어, 어…….”
에시엘은 입술을 겨우겨우 움직여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푸라기 틈에서 반짝이던 무언가는 클레드인의 머리카락이었다.
숨을 고르던 클레드인은 얼떨떨한 상태로 에시엘을 바라봤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그의 외양만큼이나 고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
“누, 누구…….”
에시엘 또한 클레드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도리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치며 한껏 경계 태세를 갖췄다. 레고니스 가문의 저택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였다.
반면 클레드인은 대답할 생각도, 행색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그저 드넓은 평야를 배경 삼아 놀란 채 제 눈앞에 서 있는 붉은 머리칼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저, 저기……. 여기 있으면 안 돼!”
고요함을 깨트리듯 에시엘이 말했다. 아이를 찬찬히 살펴본 결과, 넋이 나간 듯한 바보 같은 표정이 위험한 인물처럼 보이진 않았다.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대답이 없는 아이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괜찮아……? 나, 나 때문에 놀란 거야? 손잡아 줄게! 자!”
그녀는 클레드인이 주저앉아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클레드인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자그마한 손을 빤히 바라봤다. 낯선 아이에게 겁을 먹은 탓인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이 클레드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마워. 너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클레드인은 그 손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옷에 붙은 지푸라기를 대충 털어 낸 뒤, 시원시원한 입매를 끌어 올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 그게…….”
순간 에시엘의 시선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하며 바람결에 살랑이는 아이의 은백색 머리칼을 좇았다. 그러다 눈을 돌려 다시 마주한 새파란 하늘을 닮은 푸른빛의 눈동자는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릴 정도로 푸른색의 눈동자였으나 오히려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에시엘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곤 말을 이었다.
“으응, 괜찮아. 근데 왜 여기 숨어 있었어?”
“아, 그게…….”
“아! 너, 여기 엄청 무서운 사람이 사는 건 알아?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에시엘은 최대한 속삭이며 매우 중대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클레드인은 작게 소리 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에시엘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당연히 알고 있지. 너 여기, 지푸라기 떼 줄게.”
“어? 고, 고마워.”
지푸라기를 떼 주는 클레드인의 모습을 보던 에시엘은 괜스레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지푸라기 더미에 숨어 있던 아이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어쩐지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한 모습에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