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설마…….”
“황제 폐하의 명령이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노예로……. 아무튼 여기저기를 떠도는 것보단 대공저가 낫지 않겠습니까.”
“네……?”
“넌 앞으로 계속 이곳에서 지내게 될 거다.”
소왕국을 멸망시킨 자가 그녀의 예상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에 당황하는 새에, 귓가를 파고드는 롬포드의 낮은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이에 그녀는 롬포드를 바라보며 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을 놓았다.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연신 들려온 탓이었다.
“……싫은가?”
롬포드의 목소리는 쉴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들려왔다. 금세 정신을 차린 에시엘이 롬포드와 시선을 맞췄으나 왜인지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그는 다급히 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평소답지 않게 힐끔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눈치라도 보는 듯한 모양새에 에시엘은 의아함이 생겨났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이제 네가 지낼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면 길거리뿐이니.”
“길거리요?!”
“그래. 길거리를 전전하는 게 더 좋은 건가?”
놀란 목소리가 들려오자 롬포드는 다시금 에시엘을 힐끔거리며 재차 물었다. 늑대의 소굴에 머무를 것이냐, 길거리에 나앉을 것이냐. 어린아이가 택하기엔 너무 극단적인 선택지뿐이었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보, 보육원도 있지 않나요?”
에시엘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라리 보육원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지들보단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 고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롬포드는 에시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요즘 보육원에선 밥도 제대로 안 준다던데.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애들 틈에서 제대로 씻을 수도 없을 테지.”
“아아, 그럴 리가…….”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롬포드는 티가 날 듯 말 듯 한 희미한 미소를 짓곤 서둘러 대화를 종료했다.
에시엘은 제 앞의 우유가 가득 담긴 컵을 바라봤다. 막막한 상황에 저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주사 맞을 아이에게 미리 쥐여 준 사탕을 좋다고 받아먹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결국엔 원작대로 되고 있어.’
그녀는 드레스 자락 위로 제 작은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아나이스 소왕국이 멸망했다. 비록 황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결국엔 소설의 내용과 현재 상황이 점차 비슷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원작을 떠올린 에시엘의 녹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말아 쥔 주먹 역시 잘게 떨리는 것도 잠시, 들려오는 렌테의 목소리에 에시엘이 눈을 번뜩 떴다.
“각하께서 붙여 주시는 에시엘 님의 시종입니다.”
렌테의 말에 응접실 문이 열리며 시종 한 명이 들어왔다. 갈색 머리칼을 올려 묶은 유순한 인상의 시종이었다.
“에시엘 님, 반갑습니다. 라비아나라고 합니다.”
이에 에시엘이 고개를 들어 시종을 바라봤다. 라비아나는 에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괘, 괜찮아요. 시종, 없어도…….”
에시엘은 라비아나와 마주쳤던 시선을 급히 바닥으로 떨구었다. 갑작스레 전해 들은 소왕국의 멸망 소식으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롬포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아까부터 제 기분을 살피며 저를 위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내가 괜찮지 않다.”
“…….”
“입적한 아이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저택을 돌아다니면, 가문의 위상이 떨어지는 건 당연해.”
그녀는 괜스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롬포드의 눈치를 보았다. 롬포드는 어쩐지 제게 꼭 시종을 붙여 주려는 듯했다. 그것이 정말 가문의 위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쯧. 가서 밥이나 먹여.”
롬포드는 무언가 못마땅한 것이라도 있는지 혀를 차며 손을 휘휘 저었다. 롬포드의 시선이 잠시간 에시엘의 가녀린 손가락에 닿았던 것을 그녀가 알 순 없었다. 머지않아 라비아나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에시엘 님. 모시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라비아나의 모습에 에시엘 또한 그 행동을 엉거주춤 따라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선 뒤, 삐딱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롬포드를 향해서도 꾸벅 인사를 했다.
“가, 가 보겠습니다아.”
롬포드는 그 모습을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 * *
그 시각, 레고니스 저택의 연무장.
해가 저물며 작은 창을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테이시의 결이 좋은 새카만 머리칼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어 윤기가 나며 반짝였다.
테이시는 날이 바짝 갈린 검을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만큼 수차례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테이시는 그것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힘에 부쳐 잘게 몸이 떨렸음에도 오직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테이시의 검술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제 나이 또래보다 월등한 실력임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같이 연무장을 향하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후우…….”
가쁜 숨을 내뱉은 테이시가 검을 내려놓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틈만 나면 오는 광대한 연무장을 새삼 느릿하게 둘러보았다.
일부러 기사들의 수련 시간을 피해 찾는 곳이었다.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가만히 연무장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주고 싶어서……. 헤헤.”
훈련용 짚 인형이 줄지어 선 곳에, 굽이치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곰돌이 모양의 쿠키를 내밀던 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웃는 표정의 곰돌이 쿠키가 미소 짓는 아이의 표정과 얼핏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테이시는 다소 거칠게 인상을 구겼다. 머릿속에 쿠키를 내밀던 아이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는 다 그저 퍽 맛이 좋았던 쿠키 때문이라고, 아이는 그저 성가시고 귀찮다고 되뇔 뿐이었다. 쿠키는 레고니스 가문 전속 주방장의 솜씨이니 맛있는 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테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너른 연무장을 훑은 뒤, 걸음을 옮겼다.
* * *
“에시엘 님, 머릿결이 좋으시네요.”
“으응…….”
라비아나는 에시엘의 붉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빗질해 주며 말했다. 에시엘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느낀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가만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에시엘은 시종을 부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 번도 곁에 있었던 적이 없어서 오히려 불편하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하지만 롬포드가 거의 강제로 붙여 주다시피 한 시종이기에 받아들여야 했다.
“그, 그럼 계속 같이 있는 거예요?”
“예, 그럼요! 근데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어째서 말씀을…….”
심지어는 같이 존댓말을 쓰다가 기겁을 하며 놀라 발을 동동거리는 라비아나 때문에 급히 말을 낮춰야 했다.
에시엘은 거울 속의 제 모습과 쉬지 않고 움직이는 라비아나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며 일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다 곧 들려오는 라비아나의 상기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깐 말씀 못 드렸지만…… 에시엘 님을 모시게 되어 좋아요. 무척이나요!”
“응? 무척이나?”
“사실 제가 남동생만 여럿이라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아, 그렇다고 해서 에시엘 님을 동생처럼 대하겠다는 얘긴 아니고요…….”
에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라비아나는 제 볼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일말의 거짓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에시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나를 여동생이라고 생각해 줘! 난 괜찮아. 헤헤.”
“세상에……. 이런 귀여움으로 주인님의 마음마저 사로잡으신 건가요? 아무렴 지당한 이유네요!”
에시엘의 말을 들은 라비아나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그녀는 에시엘의 양손을 꽉 붙들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에 감동한 모양이었다.
“드디어 이곳에도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 줄 분이 나타난 걸까요? 삭막한 저택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는…….”
“하핫, 라비아나는 레고니스 가문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아마도요? 에시엘 님, 궁금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라비아나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거울을 통해 에시엘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엔 아직 궁금한 게 많을 어린아이가 조심스레 묻는 모습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헤헤……. 아니야!”
에시엘이 순진무구한 웃음을 짓자, 라비아나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더는 묻지 않았다. 라비아나는 이내 옷장 쪽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드레스를 뒤적거리는 듯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늘 그렇듯 에시엘이 일어나 문으로 향하려 하자, 라비아나가 어깨를 살포시 누르며 자리에 앉혔다.
“이젠 제가 나가 볼게요.”
“으응.”
에시엘은 얼떨떨하게 다시 자리에 앉아서 문으로 향하는 라비아나를 쳐다봤다. 곧이어 라비아나가 문을 열어 주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렌테였다. 렌테는 천천히 들어서며 인사를 건넨 뒤 말했다.
“각하께서 에시엘 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대공님이 저를요?”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뜬 에시엘이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롬포드가 자신을 찾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예.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 식사요? 같이 먹어요?”
“그렇습니다. 공자님들도 함께할 예정이십니다.”
에시엘은 눈을 끔벅거리며 할 말을 찾았다. 제 방까지 찾아온 렌테와의 대면도 갑작스러웠으나 더욱 느닷없는 것은 자신의 몫까지 준비된 식사였다. 제아무리 가문에 입적되었다지만, 볼모로 잡혀 온 자신이 그들과 함께해도 괜찮은지에 대한 의아함이 있었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신 겁니까?”
“아, 그게…….”
“에시엘 님을 얼른 준비해 주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에시엘의 머뭇거림에도 렌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라비아나에게 말했다. 이에 라비아나가 알겠다며 답하자 렌테는 방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벙쪄 있는 에시엘을 뒤로한 채, 라비아나는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놀림을 서두르면서도 에시엘에게 연신 극찬과 박수를 보냈다.
“어머나, 아주 예쁘세요!”
순식간에 에시엘의 눈동자 색을 닮은 진한 초록색의 드레스를 입혀 주곤 머리칼도 한쪽으로 곱게 땋았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마치 애당초 가족의 사랑을 잔뜩 받은 아이 같았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에시엘이 문을 열고 나섰다. 그 앞에는 렌테가 초조한 모습으로 손에 쥔 회중시계를 수차례 확인하고 있었다. 에시엘은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