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27화 (27/80)

27.

앞장서는 렌테를 따라 도착한 식사 장소엔 에시엘을 제외한 모든 이가 이미 자리해 있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은 롬포드와 그를 중심으로 오른쪽엔 테이시, 왼쪽엔 페루딘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에시엘은 그들과 대치하듯 덩그러니 선 채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세 남자가 제각기 다른 눈빛으로 에시엘을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앉아.”

롬포드가 에시엘을 향해 말했다. 이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떼려던 찰나, 다급하게 의자를 밀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여기 앉아.”

그 소음의 근원지는 페루딘이었다. 페루딘은 제가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곤 자신은 그 옆의 의자를 빼내어 잽싸게 앉았다.

에시엘은 천천히 다가가 페루딘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그들의 가운데에 앉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오른쪽에서 롬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슬몃 미소 짓는 얼굴이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에시엘이 괜스레 눈동자만 데록데록 굴릴 때, 준비된 음식들이 차례로 들어와 기다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레몬 드레싱을 뿌려 상큼한 향을 풍기는 샐러드부터 칠면조구이와 봉골레 파스타, 간단한 후식인 조각 케이크까지. 전부 소왕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었다.

순식간에 시각적, 후각적으로 제각기 위엄을 뽐내는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가득 들어찼다. 에시엘은 절로 샘솟는 침을 꿀꺽 삼켰다.

“먹자.”

곧이어 여분의 음식마저 가득 채워지자, 롬포드는 더없이 간결한 말을 내뱉어 식사를 알렸다. 에시엘은 재빨리 봉골레 파스타부터 공략하려 포크를 뻗으려 했다.

턱―.

“이 가문에서 비실대는 꼴은 볼 수 없다.”

돌연 에시엘의 접시 위로 칠면조구이의 다리 조각이 올려졌다. 제법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은 롬포드였다. 칠면조구이의 다리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에시엘의 팔뚝을 웃도는 크기였다.

“대, 대공님…….”

봉골레 파스타를 향해 뻗으려던 포크를 든 채, 에시엘은 롬포드의 얼굴과 칠면조구이의 다리를 얼떨떨하게 번갈아 봤다. 하지만 롬포드는 에시엘에게 강렬한 눈빛만 쏘아 댈 뿐이었다. 그것을 쉬이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에시엘은 어쩔 수 없이 제 그릇 위의 음식을 포크로 푹 찍었다. 그리고 살코기를 입속에 넣으려던 순간 제 앞의 테이시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 하하…….”

“…….”

어색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조용하게 식사가 이루어졌다. 식기가 달그락대는 소리와 페루딘이 포크를 틱틱거리며 장난을 치는 소리만 드물게 들려왔다.

머지않아 테이블 위로 뜨문뜨문 빈 접시들이 생겨났다.

에시엘은 부른 배를 문지르면서도 조각 케이크를 노려보고 있었다. 먹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것을 가져오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또다시 테이시와 눈이 마주쳤다.

테이시 역시 식사를 마친 듯 앞접시가 비어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에게는 아직 쓰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홍차만 연신 홀짝이고 있었다. 결국 에시엘은 조각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어 테이시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거 먹을래?”

“…….”

테이시의 시선이 일순 조각 케이크에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에시엘은 괜스레 작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 먹을래!”

오히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페루딘이 잽싸게 손을 뻗어 조각 케이크를 채 갔다. 에시엘이 테이시를 힐끔대며 다른 것을 집어 들기 위해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페루딘이 에시엘을 향해 조용히 소곤거렸다.

“야. 이따가 밖에 나갈래?”

페루딘이 시선은 케이크에 고정한 채 에시엘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포크로 케이크를 푹 찍어 제 입에 넣었다. 아버지인 롬포드의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에시엘은 생각에 잠긴 탓에 그 소곤거림을 듣지 못했다. 그 후로 페루딘이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끄응.’

조각 케이크는 분명 맛이 좋았지만 에시엘은 어쩐지 테이시가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살펴보게 됐다. 하나 테이시는 계속해서 쓰디쓴 홍차만 마실 뿐이었다.

이윽고 식사가 모두 끝나자 에시엘은 테이블 위의 그릇을 치우는 시종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저기, 있잖아요……!”

* * *

에시엘은 숨이 찰 만큼 열심히 잰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앞서가는 테이시를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뭐 저리 빠른 거야?!’

어린아이치곤 무척이나 빠른 걸음이었다. 결국 에시엘은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숨을 한껏 들이켠 뒤 테이시의 등에 대고 외쳤다.

“불이야!”

정말 불이 났을 리는 없었다. 단순한 거짓말이었지만 앞서가던 테이시를 멈추는 데에는 성공이었다. 에시엘은 걸음을 멈춰 선 채 미간을 살풋 찡그리고 있는 테이시를 향해 쪼르르 다가갔다.

“와, 걸음 진짜 빠르다.”

“…….”

“부, 불은 안 났어. 장난이야! 하핫.”

에시엘은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는 테이시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손에 든 것의 모양새를 살피더니 다시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이거, 아까 못 먹었잖아.”

그녀가 내민 것은 시종에게 부탁해 따로 챙겨 온 조각 케이크였다. 동그란 통에 담긴 그것은 에시엘의 잰걸음에도 다행히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걸 왜 줘?”

조각 케이크를 빤히 보던 테이시가 말했다. 마치 자신과 일절 상관없다는 듯한 투에 오히려 에시엘의 낯빛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응? 계속 쳐다보길래……. 먹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어?”

“…….”

에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물었다. 일말의 거짓됨도 찾을 수 없는 순진무구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테이시는 케이크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본 적이 없었다. 그저 거절을 면하기 위해 에시엘이 큰 그림을 설계한 것이었다.

그녀는 시종에게 부탁해 조각 케이크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맛있어 보이는 것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로 전해 받은 것이 초콜릿 퍼지 케이크였다. 작은 조각임에도 달콤한 냄새를 양껏 풍기고 있었으므로 분명 먹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에시엘이 한 번 더 조각 케이크를 들이밀자, 단번에 테이시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네가 잘못 본…….”

“에이, 남기면 아깝잖아!”

에시엘은 테이시가 혹여나 돌아설까, 잽싸게 말을 끊어 내곤 부득부득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 순간 찰나이지만 굳은살이 가득 박여 거친 손바닥이 만져졌다. 놀라는 것도 잠시, 에시엘은 케이크가 담긴 통을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절대 버리지 마!”

그녀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엄포까지 놓았다. 동그란 눈을 더욱 부릅뜬 채 테이시를 바라보며 짤막한 집게손가락으론 케이크를 가리켰다.

곧이어 에시엘은 테이시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뒤돌아 후다닥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복도의 가까운 코너를 돌아 몸을 숨기고선 제 가슴팍에 손을 얹어 쓸어내린 뒤 숨소리마저 죽였다.

‘들키면 안 돼!’

에시엘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벽 너머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혼자 남겨진 테이시의 행동을 훔쳐보려는 것이었다.

테이시는 제 손에 억지로 쥐어진 동그란 통을 가만 보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를 양껏 풍기는 초콜릿 퍼지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듯했다.

‘먹어라, 먹어라……!’

에시엘은 여전히 숨소리를 죽인 채 맘속으로 간절히 희망했다. 어쩐지 긴장되는 분위기에 벽을 붙잡은 손바닥에선 저도 모르게 땀이 배어 나왔다.

동그란 통을 가만 보던 테이시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시엘의 눈에는 그 모양새가 마치 슬로우 모션이라도 걸린 듯이 무척이나 느릿해 보였다. 빨리 감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테이시는 이내 조각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그의 입속에 향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문 테이시는 마치 긍정의 의미처럼 희미하게 고갯짓을 끄덕였다.

‘됐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해.’

에시엘은 작은 주먹을 살포시 말아 쥐었다. 비록 자신의 눈앞에서 먹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확실한 사실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그는 원작대로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게 맞았다.

어쩌면 이런 점을 이용해 더 큰 환심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훗날 그에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롬포드 대공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가문에 입적시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시켜 새 옷을 만들어 주고 시종까지 붙인 것을 보면 당장 죽이지는 않을 듯했다.

그런 점은 에시엘에게 몹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쩌면 롬포드 대공의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거라는 걱정도 피어올랐다. 갑작스럽게 입적시킨 만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도 쉬울 테니까.

‘그래, 그 전에…….’

에시엘은 더욱 굳게 다짐했다. 롬포드 대공의 생각이 바뀌기 전에, 그나마 맘 놓고 살아 숨 쉴 수 있을 때 이 늑대 소굴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그리고 이곳을 나가려면 자신의 노력 외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롬포드 대공은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속을 파악할 수 없는 사람일뿐더러 자신을 볼모로 잡아 온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페루딘의 도움을 받자니 그는 자신을 돕기엔 너무 어린아이였고 힘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도울 사람으론 테이시가 적격이었다. 장차 가문을 세습하기 때문에 힘도 커질 것이었고, 달콤한 음식만 있다면 그의 환심을 사는 일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좋았어!’

에시엘은 이곳을 빠져나갈 미래를 생각하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내리지 않았다. 볼록 솟아오른 빵실한 볼살에서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여실히 묻어났다. 흥겨운 마음에 작은 발마저도 신나게 스텝을 밟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다시 제 방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으앗!”

에시엘의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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