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내일 아침이면 신관이 올 테니까, 여기로 몰래 데려올게!”
에시엘은 제법 기발한 생각이라도 떠올린 양 눈을 빛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에시엘의 흉터 치유를 위해 정기적으로 내방하던 신관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위 신관이라고 했으니 어떤 병이든 쉽게 치유할 수 있으리라.
“피―.”
하지만 페루딘은 눈을 가늘게 뜨곤 입술을 쭉 내밀 뿐이었다. 어떤 연유로 신관이 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신관의 치유가 아니었다. 그런 페루딘의 표정은 마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심통 난 아이 같았다.
“어때? 좋은 생각이지?”
“아니. 신관 따위 됐거든?”
에시엘이 확답을 받으려는 듯 재차 되물었음에도 페루딘은 계속해서 샐쭉샐쭉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더니 기어이 ‘흥―’ 하며 콧방귀를 뀌곤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녀는 도무지 페루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평소에는 제멋대로이기만 한 아이라도 아버지만큼은 무서운지 도통 치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시엘은 미간을 살풋 찡그리다가 손을 뻗어 노란 머리칼이 덮인 이마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반대 손으로 짚은 제 이마와 견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페루딘의 이마는 오히려 자신의 이마보다도 시원한 듯했고, 약간의 식은땀도 흘리지 않아 뽀송뽀송했다.
“어, 어…….”
페루딘은 갑작스럽게 닿은 손길에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이마와 맞닿은 작은 손바닥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혹시…… 근육통이야?”
이마에서 손을 물린 에시엘이 침대에 턱을 괸 채 설마 하는 눈빛을 보냈다. 설사 근육통이 맞는다면 페루딘이 아픈 이유는 지난날 자신을 업어 준 것 때문일 테니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으음. 그럼 어디가 아픈지 알려 주면 안 돼?”
에시엘은 페루딘이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더욱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뾰로통 내민 입술을 보아하니 엄청나게 아픈 건 아닌 듯했지만, 아직까진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어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나도…….”
“으응?”
정적 속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에시엘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아픈데.”
“뭐어? 어디? 어디가 아파?”
에시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페루딘이 신관을 불러 달라는 부탁을 한다면 금방이라도 대공의 집무실로 달려갈 기세였다.
페루딘의 시종이 신관을 부르지 않고 저를 찾아온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무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에시엘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다.
“……배.”
“응?”
“……배, 있잖아…….”
“배?”
에시엘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며 말하는 페루딘은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이에 에시엘은 그의 말을 되뇌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페루딘이 말하는 배와 자신이 생각하는 배가 같은 것인지 의문스러워졌다.
“배가 아파?”
“아니, 이 바보야!”
페루딘이 돌연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덮고 있던 이불까지 내팽개치며 씩씩대는 모습을 보아하니 몹시도 답답한 모양새였다. 그 우렁찬 외침에 놀란 에시엘은 괜스레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다시금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으음. 그럼……?”
“배, 그거! 나도 아프면 해 준다고 했잖아!”
페루딘은 입술을 쭉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팔짱까지 낀 그는 잔뜩 심통이 나 있었다. ‘멍청이, 거짓말쟁이, 약속도 안 지켜’라며 조용한 소리로 툴툴거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마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시엘은 일순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머지않아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페루딘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따라 하듯 웃었다.
“너어, 배숙이 먹고 싶었구나?”
에시엘은 페루딘을 놀리듯 고개를 갸우스름히 기울인 채 헤실헤실 웃었다. 게다가 땅에 닿을 듯 말 듯 한 다리까지 앞뒤로 흔들어 그네를 타는 시늉을 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아무래도 페루딘은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만들어 주는 배숙을 먹고 싶어서 말이다.
“됐어! 안 먹어도 되거든?”
“에에? 정말로?”
에시엘은 여전히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에시엘의 굽이치던 붉은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얄미울 법한 모습에도 페루딘은 말없이 제 미간을 찌푸리며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정말이지이?”
“씨이…….”
눈을 똥그랗게 뜬 에시엘이 얼굴을 들이밀며 되물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묻는 양 말끝을 늘이는 모습에 참지 못한 페루딘의 음성이 잇새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롬포드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배숙이 부러워 꾀병까지 부린 마당에, 이제 와 고민을 하는 듯했다. 페루딘은 새하얀 이불을 꼼지락거리며 연신 에시엘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애는 애구나.’
에시엘은 미소를 띤 채 페루딘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하게 고갯짓을 했다. 페루딘은 훗날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살인귀로 자랄 테지만, 지금은 그저 귀여운 심술을 부리는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됐어, 거짓말쟁이. 앞으로 너랑 안 놀 거야.”
“으응?”
생각에 잠겨 있던 에시엘을 꺼내 오듯 갑작스러운 선언이 들려왔다.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다.
“너, 가! 필요 없어!”
페루딘은 제법 단호한 말투와 행동으로 토라진 티를 냈다. 팔짱을 낀 채로 또다시 고개를 홱 쳐들며 제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고 있었다.
‘지, 진짜 삐졌다!’
에시엘은 큰일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덧붙일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지난 생에서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삐지면 달래 주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너 아프잖아! 꼭 만들어 주고 싶은데…….”
그녀는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을 숨기곤 제법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이라는 단어를 한껏 강조하며 페루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강하게 어필을 했다. 더불어 침대맡에 턱을 괴곤 큰 눈망울을 반짝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에 페루딘이 살짝 움찔하는가 싶더니 슬몃 고개를 돌려 에시엘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마치 엄청난 선심을 쓰는 양 말했다.
“……뭐, 네가 꼭 해 주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해.”
“응! 잠깐만 있어. 얼른 만들어…….”
“잠깐!”
“으응?”
에시엘은 서둘러 나가려다 발걸음을 멈추곤 엉거주춤하게 페루딘을 돌아봤다. 새하얀 이불에 주름이 질 만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그 머뭇거림은 에시엘이 다시금 침대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 사라졌다.
“……이제 나한테만 만들어 준다고 약속해.”
페루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며 말했다. 하지만 얼굴이 붉게 물드는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여름이니까 더운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었다.
“응, 그럴게! 약속! 헤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에시엘은 해맑게 웃어 준 뒤 방을 나섰다.
* * *
“자!”
에시엘은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조심스레 들이밀었다. 어느새 캄캄해진 밤이건만, 자신이 배숙을 만들어 올 동안 페루딘은 잠자리에 들지도 않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그는 반쯤 감긴 눈을 비비고는 쟁반을 받아 들었다.
“대공님한테 드린 것보다 훨씬, 훨씬! 좋은 거야.”
에시엘은 부러 과장하며 말했다. 자신을 기다려 준 페루딘이 귀여운 탓이었다.
“훨씬……?”
“봐! 배도 두 개나 있잖아?”
에시엘이 곧게 뻗은 집게손가락으로 그릇에 둥둥 떠 있는 배를 가리켰다. 롬포드 대공에게 준 배숙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는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은 분명했으니까.
“훨씬…….”
페루딘은 에시엘의 말을 되뇌며 노란빛의 액체가 담긴 그릇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시엘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려 씨익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졸음기를 지우곤 개구지게 웃는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릇을 쥔 페루딘이 배숙을 단숨에 들이켰다. 머지않아 그릇을 내려놓으며 남아 있는 건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살풋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것마저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나, 다 나았어!”
페루딘은 에시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양 빤히 쳐다보는 그의 눈은 유독 맑은 빛을 내며 반짝였다.
“정말? 다행이다―.”
고작 배숙을 먹었다고 해서 아픔이 사라질 리는 없었지만, 에시엘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칭찬이라도 하듯 손을 뻗어 페루딘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쓰다듬자 결이 좋은 머리칼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 * *
띵―.
오븐의 타이머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제 꺼내면 완성인가?!”
오븐 앞에서 그것만 들여다보던 에시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들떠 있었다. 녹옥빛 눈동자 역시도 잔뜩 생기가 도는 것이 몹시도 신이 난 모습이었다.
“그래, 얼른 꺼내 봐라. 나도 궁금하니까. 하하!”
그에 호응하듯 도프니도 덩달아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에시엘은 제 가슴팍에 손을 올리곤 수차례 심호흡을 내쉬었다. 도프니의 말뿐인 지도를 따라 자신의 손으로 처음 만든 쿠키를 꺼내 보는 순간이었다.
“아, 떨려!”
에시엘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기분 좋은 긴장감을 떨쳐 냈다. 오늘 도전한 것은 땅콩버터 쿠키였다. 일반적으로 동그랗기만 한 쿠키와는 달랐다. 색색의 동그란 초콜릿을 올려 눈을, 프레첼이나 초콜릿을 놓아 입을 표현하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게끔 장식한 쿠키였다.
발을 동동거리던 에시엘이 오븐의 문짝을 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고소하고 달콤한, 맛있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와아!”
에시엘은 도프니와 눈을 맞추며 탄성을 내질렀다. 풍기는 냄새만으로도 이미 만족스러웠다. 곧 도프니가 오븐 장갑을 낀 채 다가와 트레이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쿠키는 성공적이었다. 에시엘은 테이블에 턱을 걸친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프니를 바라봤다.
“도프니! 나, 이거 가져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