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에시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방으로 향했다. 화창한 날씨에 모처럼 기분 좋게 산책을 한 참이었다. 들뜬 기분이 사라지지 않은 채 들어선 방에는 라비아나가 이제 막 청소를 끝낸 모양인지 열어 두었던 창문을 닫고 있었다.
“에시엘 님, 오셨어요?”
“응!”
라비아나는 곧장 답하는 에시엘을 가만 쳐다보다가 덩달아 미소 지었다. 왜인지 모르게 몹시도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저까지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신가요?”
“응!”
에시엘의 해맑은 대답이 연이어 들려왔다. 라비아나는 에시엘이 마치 진짜 제 여동생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며 미소를 지워 낼 줄을 몰랐다. 아이의 귀여움에 어쩐지 제 심장이 찌릿찌릿 아픈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깜빡 잊어버릴 뻔했네요.”
“응? 뭐를?”
심장 부근을 문지르던 라비아나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녀는 에시엘이 덩그러니 선 채로 쳐다보고만 있자 더욱 빠릿빠릿 행동했다.
“잠깐 앉아 계세요, 금방 준비할게요!”
‘뭘 하려는 거지?’
에시엘은 라비아나의 행동거지를 기웃거리면서 느릿한 걸음으로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머지않아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어린이용 머그잔이 놓였다.
“금방 따라 드릴게요.”
라비아나는 에시엘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은 뒤 말했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 들린 은색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새하얀 우유가 흘러나왔다.
작은 입을 살짝 벌린 에시엘이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지금은 제법 늦은 저녁 무렵이건만, 이 시간에 무엇을 저리 바쁘게 준비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까 주인님께서 오셔서 주고 가셨어요. 직접 받아 드는데 어찌나 손발이 덜덜 떨리던지…….”
“대, 대공님이?”
라비아나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뜨거운 우유를 마저 조심스럽게 따랐다. 머그잔을 가득 채운 뒤 쟁반 위에 은색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그녀는 작은 통에 담겨 있던 초콜릿 조각을 꺼내 잔에 넣어 주었다. 새하얗던 우유는 금세 녹아내린 초콜릿에 의해 색깔이 점차 바뀌고 있었다.
아무래도 에시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롬포드 대공과 집사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라비아나는 티스푼으로 우유를 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매일 저녁마다 에시엘 님에게 초콜릿 우유를 준비해 드리라고 하셨어요.”
“매일 저녁……?”
“아직 어리시니까 뭐든 잘 드셔야 한다고……. 아, 이제 드셔도 될 것 같아요!”
에시엘은 진한 갈색으로 뒤바뀐 우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 한 번 맛있다고 했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챙겨 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에시엘은 문득 자신이 이런 처우를 받아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끄응…….”
“여기요.”
하지만 그 생각은 당장 눈앞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초콜릿 우유에 의해 금세 사라졌다.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라비아나가 머그잔을 건넨 것이었다. 초콜릿 우유는 에시엘의 코앞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렴 이성적인 생각을 한들 어린아이의 본성은 이길 수 없었다. 에시엘은 달콤한 냄새에 홀린 듯이 컵을 받아 들곤 호로록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맛있다…….”
라비아나는 조용히 중얼거리는 에시엘의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 * *
레고니스 저택의 집무실.
“밀러먼드 가문 일은 확실히 마무리됐습니다.”
“그렇군.”
롬포드는 업무를 보고하는 렌테에게 심드렁히 답했다. 모든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오스월 자작의 가문을 손보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잘라 내려던 싹을 그저 조금 일찍 잘랐을 뿐이었다.
글씨가 빼곡한 서류를 읽어 내린 그는 손에 쥔 만년필로 글씨를 유려하게 휘갈겼다. 새카만 흙빛의 머리칼과 더불어 서늘함이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는 유난히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곧 다른 서류를 꺼내어 휙휙 넘기는 롬포드의 움직임을 보고 있던 렌테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림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그리고…….”
“…….”
“업무 외적인 보고 사항도 있습니다.”
“뭐지?”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서류를 넘기다 멈춘 롬포드의 차디찬 시선이 렌테에게 향했다. 렌테는 옅은 고갯짓을 보이곤 펼쳐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접어 옆구리 사이로 끼웠다.
“에시엘 님에 관한 것입니다.”
“얘기해.”
롬포드는 한쪽 눈썹을 꿈틀하는가 싶더니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는 왜인지 하던 행동도 멈춘 채 들으려는 듯한 태도였다.
렌테는 제 주인의 그러한 모습을 보니 의아함이 생겨났다. 업무를 처리할 때나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늘 그렇듯 평소처럼 칼같이 냉철한 태도를 보였지만, 볼모로 잡혀 왔던 아이에 관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롬포드 대공을 수년간 봐 온 렌테였기에 그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지난밤 늦은 시간에 주방을 헤젓고 다녔다고 합니다.”
“허기라도 졌던 모양이지.”
“그렇다기엔 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롬포드의 대꾸에도 렌테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우스름히 기울였다. 내용을 전달받은 바로 그 아이는 제국에서 호불호가 강해 다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과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했다.
“배?”
“예. 배를 끓이는 것처럼 보였다더군요.”
렌테의 말을 들은 롬포드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자신이 아플 적 만들어 준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일 터였다. 한데 그 야심한 시각에 그걸 만든 이유는 대체 무얼까.
“하, 직접 만들었다더니 아무에게나 해 주는 것이었군.”
“예?”
롬포드는 기가 차다는 듯이 숨을 토해 내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당시에는 조막만 한 아이가 그것을 만드느라 낑낑거렸을 모습이 눈에 선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말고 다른 이에게도 주었을 거라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다.
렌테는 롬포드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에시엘 님께 붙여 준 시종이 전한 말입니다.”
이에 롬포드가 희미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녁마다 준비해 드리는 따뜻한 초콜릿 우유를 몹시도 좋아하신답니다.”
“그렇군.”
렌테의 말에 롬포드는 평소처럼 심드렁히 답하는 듯했지만, 한쪽 입꼬리는 희미하게 말아 올라간 채였다. 전해 들은 소식이 퍽 마음에 드는 듯했다.
“다만…….”
롬포드의 낯을 살피면서 렌테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충치 걱정을 하셨다는군요. 매일 먹다 보면 멀쩡한 치아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렌테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이야기를 전하던 시종이 짐짓 장난스레 덧붙인 말이긴 했으나 어쩐지 이러한 이야기마저도 알려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에 희미하게 말아 올라갔던 롬포드의 한쪽 입꼬리가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의 눈매마저도 날렵하게 바뀌었다.
“충치를 걱정했다고.”
롬포드는 사뭇 진지한 투로 말을 되뇌며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해결책을 내놓길 바라는 것 같은 눈빛으로 렌테를 쏘아봤다. 본인은 그냥 쳐다보는 것이겠지만 렌테가 그 눈빛에서 몹시도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는 착각을 느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저택 내 고용한 마법사들을 시켜 방법을 강구하라 하겠습니다.”
“마법사? 그것 괜찮군.”
롬포드는 렌테가 제시한 해결책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창밖에 잠시간 머물렀다가 책상 위의 시계로 닿았다. 시계를 빤히 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수련할 시간 아닌가? 이만 가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롬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렌테는 집무실을 나서는 롬포드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머지않아 렌테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생겨났다.
* * *
에시엘은 지난번처럼 직접 만든 간식이 담긴 통을 품에 안은 채 연무장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오늘 가져온 것은 초코 파운드케이크였다. 먼저 시식한 도프니가 역시나 훌륭하다며 호들갑을 떨었기에 맛은 보장된 바였다.
테이시는 오늘도 연습에 몰두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에시엘이 찾아온 것을 애초에 알아차린 그였다. 에시엘이 조심스럽게 들어선다고 나름 신중을 기했지만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지 못한 탓에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엄청 신경 쓰이겠지? 그냥 갈까…….”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에시엘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발로는 괜스레 바닥을 차며 화풀이 하듯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제 딴은 본의 아니게 소란스러운 등장을 한 탓에 고민이 되는 듯했다.
연신 바닥을 못살게 굴던 에시엘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앙다물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색의 눈동자는 제법 결연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케이크가 담긴 통은 옆쪽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한창 연습하고 있을 테이시를 돌아봤다.
“어어……?”
에시엘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새어 나온다. 어느새 테이시는 에시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날렵하게 휘두르던 검은 검집에 고이 꽂아 둔 채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미, 미안. 지금 가려고 했어!”
테이시의 시선이 온전히 닿아 오자 한껏 당황한 에시엘은 얼굴을 붉히며 서투른 사과를 건넸다. 아무래도 제대로 방해를 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더욱 허둥지둥한 움직임으로 연무장을 나설 채비를 했다.
“내일은 나 없어.”
그런데 별안간 테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러니까 내일은 여기 안 올 거라고.”
에시엘이 어리벙벙하게 되물었음에도 테이시는 더욱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제 뜻을 전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테이시는 기꺼이 자신이 오지 않을 예정임을 알려 주었다. 평소 몹시도 무심한 모습을 보이던 아이가 아니라는 듯 말이다.
“으응. 알려 줘서 고마워! 헤헤.”
에시엘은 연무장을 나서려던 것도 잊은 채 동그란 눈을 곱게 접어 가며 방긋 웃음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친절은 더욱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 사람이 테이시라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테이시는 에시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뜸을 들이는 모습에 사뭇 긴장감이 돌았다. 그녀는 해맑게 짓던 웃음도 멈춘 채 테이시의 뒷말을 기다렸다.
“지난번에 준 케이크 괜찮았어.”
이에 끌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에시엘의 볼살이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또 한 번 해맑은 웃음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