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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33화 (33/80)

33.

“하나, 둘, 셋, 넷, 다섯…….”

에시엘의 신중한 음성이 조용한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에시엘의 손에는 티스푼이 쥐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테이블 위에도 비슷한 모양의 티스푼과 숟가락이 여럿 놓여 있었다. 에시엘은 티스푼에 박힌 보석의 개수를 땅딸막한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세는 중이었다.

대공이라는 고위 신분을 가진 자의 집답게 레고니스 저택에는 값비싼 고가품이 수두룩했다. 이를테면 진귀한 보석이나 보물, 승전 후 얻은 적국의 전리품 같은 것들이었다.

그만큼 레고니스 가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천문학적 수치였다. 심지어는 흔한 귀이개조차도 금테를 두렀을 정도의 부를 자랑했기에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열하나, 열둘, 열셋.”

에시엘은 나머지 티스푼과 숟가락에 박힌 것까지 모두 세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커트러리를 장식하기 위해 쓰인 보석은 전부 열세 개였다. 도피 자금으로 쓰기엔 턱없이 부족한 개수였다.

‘안 돼. 더 모아야 해.’

그녀는 입술에 힘을 주어 앙다문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커트러리를 노려보았다. 에시엘은 추후 저택을 빠져나가 향할 곳으로 보육원을 염두에 뒀다. 아나이스 소왕국도 결국엔 멸망했기에, 자신 또한 끝내 죽음에 이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세워 둔 계획이었다.

보육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혹여나 기부금을 내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커트러리를 훔치는 것이었다.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할 테지만, 부피가 꽤 되어 보관이나 이동이 쉽진 않았다.

더군다나 도피 과정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좋으련만 지금까지의 상황만 봐도 그렇게 되진 않을 듯했다. 도피에 있어 자금은 몹시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신중히 고민하던 에시엘은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숟가락이나 티스푼 같은 커트러리 자체가 아니라 그를 장식한 보석이라면 에시엘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없어져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중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 기회를 보자.’

에시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스푼 두 개와 숟가락 한 개뿐이어서 그랬는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서둘러야 했다. 롬포드 대공이라면 오늘 저녁 당장 마음을 뒤바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야, 에시엘!”

순간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페루딘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우렁찬 목소리이긴 하나 오늘따라 유난히 활기찬 느낌이었다.

페루딘은 자신의 붉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특유의 입매에서 빼꼼히 튀어나와 돋보이는 송곳니가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을 더욱 여실히 느끼게 했다.

“아, 깜짝이야!”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는지 몸이 절로 움찔했다. 매번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페루딘이었건만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듯했다.

“노, 놀랬어? 쳇, 바보. 뭐 하냐?!”

페루딘은 그 모습을 보고 되레 당황하는 듯하더니 금세 장난기를 되찾곤 에시엘이 앉아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가 마주한 에시엘은 테이블 위의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 된 이유인지 최근엔 에시엘의 방을 찾아와도 그녀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기에 통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오늘따라 더 반가운 기색을 보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루딘은 그녀에게 다가가면서도 고개를 쭉 빼내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같이 놀려고 온 거야?”

에시엘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곤 황급히 테이블 위의 커트러리가 보이지 않도록 몸으로 막아섰다. 그 수가 몇 개 되지 않는지라 다행히 체구가 작은 에시엘이 가리기에도 충분했다.

그녀는 이상한 움직임과 함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페루딘을 바라봤다.

“뭐야? 설마…… 맛있는 거 혼자 먹으려는 거냐!”

페루딘은 눈매를 가늘게 하곤 테이블을 향해 자신의 집게손가락을 곧게 뻗었다. 제 머리로는 도통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에시엘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간식을 혼자 취하려나 싶은 생각이 최선이었다.

“아니이? 맛있는 건 당연히 페루딘이랑 같이 먹어야지!”

“가, 같이……?”

“응, 같이!”

에시엘은 그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더불어 작은 손을 연신 허둥지둥 휘두르며 페루딘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손짓을 했다.

이에 페루딘이 속아 넘어가는 듯 가늘게 떴던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멍하니 에시엘의 말을 되뇌었다.

“그래, 좋…….”

페루딘은 금세 개구진 미소를 띠곤 활기찬 목소리로 답을 하다가 에시엘의 뒤로 슬몃 보이는 테이블에 정신을 차린 듯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 다시금 제법 날카로운 눈빛을 한 채 에시엘을 노려봤다.

“뭐야, 너! 수상한데…….”

“수, 수상하긴 대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에이, 참…….”

에시엘은 그 시선을 피해 허공을 응시하며 괜스레 자신의 뽀얀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페루딘과 시선을 마주하곤 당황하여 작은 몸을 움찔했다.

“하핫. 아! 있잖아, 우리 숨바꼭질할까?”

“숨바꼭질?”

“으응. 네가 먼저 술래 해! 얼른 눈 감고 열까지 세.”

갑작스러운 제안에 페루딘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거절할 새도 없이 에시엘은 한 발자국 다가와 그의 눈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 왜 내가…….”

“얼른, 얼른. 꼭 감아야 해.”

그녀는 페루딘의 말마저 끊어 내 재촉하곤 눈두덩이 위로 작은 손을 얹었다. 페루딘에게 들킨다고 해도 위험하진 않으리라. 그저 무척 성가신 일에 그칠 테지만 이마저도 사전에 방지하는 편이 좋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진 페루딘은 가만히 서서 입만 벙긋거렸다. 눈가로 전해지는 에시엘의 따스한 체온과 언뜻 풍기는 특유의 체취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열까지 세야 해? 시작!”

에시엘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을 떼곤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페루딘을 살폈다. 어찌 된 이유인지 그는 소리 내며 숫자를 세진 않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만 확인하곤 뒤를 돌아 서둘러 커트러리를 챙겨 침대맡 협탁의 서랍에 조심스레 넣었다. 에시엘은 그 순간까지도 연신 페루딘의 모습을 살피며 주의를 기울였다.

‘어디에 숨지?’

그 후 에시엘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엔 숨을 곳이 마땅찮았다. 게다가 곧 있으면 약속한 카운트가 다 지날 터였다. 결국 에시엘은 발소리를 죽인 채 조르르 움직여 페루딘 등 뒤에 섰다.

“찾는다?”

머지않아 바로 앞에서 페루딘의 음성이 들려오자 에시엘은 작은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페루딘의 꽁무니를 살금살금 뒤따르며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뭐야…….”

페루딘은 살풋 인상을 찡그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곳에선 숨을 곳이 마땅찮은 만큼 찾는 것도 용이했다.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에시엘이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의아했다.

도무지 그 짧은 새에 꽁꽁 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페루딘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짠!”

“으악!”

에시엘은 페루딘의 시야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이에 깜짝 놀란 페루딘이 양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치다가 그대로 나자빠졌다.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기겁을 하는 모습이었다.

“허, 헉…….”

페루딘은 거의 바닥에 눕다시피 한 채 팔꿈치만으로 상체를 겨우 버티고 있었다. 헝클어진 샛노란 머리칼과 더불어 한껏 확장된 동공만으로도 얼마나 까무러치던 상황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듯했다.

“미, 미안…….”

에시엘이 페루딘의 질겁한 몰골을 보며 괜스레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너무 심하게 놀라는 모습에 입술은 절로 움직여 사과를 건네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말뿐인 사과만으로는 안 받아 줄지도 몰랐다.

이내 그녀는 쭈뼛대는 걸음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면서도 슬금슬금 쳐다본 페루딘이 여전히 놀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있어서, 자신의 작은 손가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이, 일으켜 줄게! 헤헤…….”

에시엘이 페루딘의 가까이 다가가 손을 쭈욱 내밀었다. 움직임을 따라 붉은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장난꾸러기인 페루딘이라도 이런 상황엔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씨이…….”

“미, 미안해.”

“깜짝 놀랐잖아!”

평소와 똑같이 느껴지는 페루딘의 우렁찬 목소리에 에시엘은 내심 안심을 했다. 그리고 내밀었던 손은 거두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양손으로 그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페루딘은 그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힘에 그저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건성건성 툭툭 털면서도 힐끔힐끔 에시엘을 쳐다봤다.

“왜에?”

분명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새에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막무가내인 아이가 무엇을 그렇게 뜸 들이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정 미안하면 나랑 같이 가든가.”

“같이 가자구? 어딜?”

“이따 야시장이 열린대. 아니, 안 가도 상관없지만 네가 하도 미안해하니까!”

페루딘은 야시장이라는 단어에 새빨간 눈동자를 빛내면서도 관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또한 에시엘이 미안해하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와중에 작은 목소리로는 안 가도 상관없다는 말을 연신 되풀이했다.

에시엘은 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그는 이럴 때면 영락없는 아이처럼 보이는 듯했다.

“좋아! 아니, 내가 미안해서 그러니까…… 같이 갈 수 있게 해 주라, 응?”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페루딘은 고개를 홱 추켜들며 짐짓 거만한 태도까지 보였다. 입꼬리까지 말아 올라가 볼살이 솟아오른 모습을 보아하니 썩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얄밉게 느껴지진 않았다.

“와, 그럼 야시장 가는 거다! 페루딘 고마워.”

에시엘이 양팔을 위로 뻗으며 신이 난 듯한 모습을 보이자, 페루딘의 귀 끝이 조금 옅지만 아주 확실하게 불그스름히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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