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34화 (34/80)

34.

“에시엘 님! 정말 뭘 입어도 예쁘고 귀여우세요.”

“하핫. 고마워.”

라비아나는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에시엘이 페루딘과 야시장 나들이를 갈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절대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강한 의견을 내세워 곱게 단장해 준 참이었다.

“그래도 역시 이 드레스가 제일 잘 어울리시네요.”

라비아나의 칭찬에 화답하듯 에시엘의 뽀얀 볼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갔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은 진한 초록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런가…….”

롬포드 대공도 언젠가 칭찬한 적이 있던 드레스였다. 휘황찬란하게 보석 장식이 달린 드레스도 아니었고 따로 장신구를 착용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그녀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 주는 듯했다.

생각에 잠긴 에시엘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새에 라비아나는 무언가를 챙기는 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 직접 가져온 듯한 새하얗고 작은 손가방 안에,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어 재빠르게 넣었다.

“라, 라비아나? 그거 뭐야……?”

에시엘이 라비아나를 향해 물었다. 이에 라비아나는 어딘가 수상쩍은 움직임을 멈춘 채 손가방을 어정쩡하게 쥐고 있었다.

“하하, 그게……. 맛있는 것도 드시고 잘 구경하셨으면 해서요.”

어색한 웃음을 지은 라비아나는 쥐고 있던 가방을 에시엘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어 살핀 가방 안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의 돈이 들어 있었다. 라비아나의 쌈짓돈이었다. 에시엘은 입을 쩍 벌린 채 다시 가방을 내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안 줘도 돼. 나도 있어!”

“그냥 조금씩 모았던 거예요! 오늘만큼은 이걸 써 주세요.”

라비아나는 등을 내보이며 돌아서서 돌려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시종이 돈을 주는 상황이 이례적이긴 했지만 마치 조카에게 용돈 주는 일쯤으로 생각하니 어쩐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되는 듯도 했다.

“으음…….”

“그건 이제 에시엘 님 거니까 다시 주셔도 안 받습니다!”

“라, 라비아나…….”

다시금 라비아나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에시엘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앙다물었다.

지난 왕성에서의 생활이 대비되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곳의 사용인들은 에시엘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바빴고, 심지어 다쳤을 때에도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곳에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가야 했다.

반면 볼모로 잡혀 온 곳에선 대접 아닌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에시엘의 마음이 동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자! 이제 얼른 가세요. 공자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라비아나가 선뜻 문까지 열어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알겠어. 라비아나, 고마워! 나 갔다 올게!”

이에 에시엘이 문밖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다 멈췄다. 그리고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양손을 좌우로 방방 흔들었다.

* * *

“바보야, 왜 이렇게 늦게 와!”

페루딘은 저택의 입구에 준비된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허둥지둥 나오는 에시엘을 발견하곤 손을 모아 소리쳤다. 발치의 흙바닥이 패인 것을 보아하니 꽤 긴 시간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야! 넘어지지 않게 조심……!”

“에이, 괜찮아!”

“바보야! 괘, 괜히 다치면 야시장 못 가잖아!”

“괜찮다니까? 헤헤, 늦어서 미안.”

에시엘이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페루딘은 멋들어지게 차려입고선 살풋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이마를 훤히 드러내어 제법 의젓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페루딘은 마차의 가까이 저벅저벅 다가가 문을 열며 다른 한 손은 에시엘을 향해 내밀었다.

“야, 타!”

“으응?”

당돌한 외침이 들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작은 어깨를 꼿꼿이 편 채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변함없이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페루딘이 보였다. 에시엘은 페루딘과 그 손을 번갈아 보더니 몹시도 밝게 싱긋이 웃음 지었다.

“고마워!”

에시엘이 마차에 타자 뒤이어 페루딘도 뒤따라 올랐다. 출발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덜커덩하는 소음을 내며 마차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차의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에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볼모로 잡혀 와 입적이 되고 난 후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외출이었다. 그랬기에 무척이나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페루딘은 제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었다. 주머니 겉에는 레고니스 가문의 문양이 금박으로 박혀 있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웠으며 귀족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케 했다.

페루딘이 에시엘의 얼굴 앞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자 내용물이 서로 맞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야, 에시엘.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말만 해.”

“뭐어? 나도 돈 있거든? 베―.”

에시엘이 페루딘을 약 올리듯 혓바닥을 길게 내민 뒤 고개를 홱 돌렸다.

“뭐, 뭐?”

이에 당황한 페루딘은 말을 더듬으며 어버버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렸는지 계속해서 노발대발 소리쳤지만 에시엘은 잇따라 거절하며 창밖만 바라봤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윽고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창문 밖에는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어둑한 야시장을 밝히고 있었다. 에시엘의 귓가에도 언뜻 소란스러움이 전해지자, 한시라도 빨리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마차의 문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페루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엉?”

“큼, 큼.”

그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곤 헛기침도 내뱉어 가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마차의 문을 열고 나선 뒤, 전과 같이 손을 내밀고서 에시엘을 바라봤다.

“레이디. 가시죠.”

“고, 고마워…….”

페루딘은 여태껏 볼 수 없던 예를 차리는 태도로 말했다. 이에 에시엘은 페루딘의 손을 얼떨떨하게 붙잡으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야시장은 이곳저곳을 비추는 오색찬란한 불빛과 사람들의 북적거림으로 인해 축제 분위기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곳곳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고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와…….”

에시엘은 소왕국에 있을 적에는 보지 못했던 생소한 풍경에 도통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단언컨대 소왕국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소설에 빙의 후 처음 마주하는 축제의 분위기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몰라!’

그녀는 녹옥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두려 노력했다. 게다가 곳곳에서 풍기는 맛있는 냄새는 배가 고프지 않았음에도 절로 식욕을 자극했다.

“무슨 냄새지……?”

에시엘이 읊조리듯 조용히 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작은 코를 킁킁거리며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냄새의 흔적을 좇으려 애를 썼다.

“푸핫. 바보, 따라와!”

페루딘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야시장이 신기한 듯 눈을 빛내며 보던 에시엘이 돌연 풍겨 오는 고기 냄새에 눈동자를 더욱 반짝이는 모습이 퍽 웃긴 듯했다.

그리고 이내 그는 여태 잡고 있던 손을 이끌어 인파를 헤집고 야시장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어어?! 잠깐만, 페루딘. 어디 가?”

“어허! 그냥 따라오기나 해.”

에시엘이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놀란 목소리로 묻자, 페루딘은 뒤돌아 마주 보며 짐짓 호통을 치는 엄한 선비처럼 대답했다. 그가 다시 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에시엘의 시선이 맞붙잡고 있는 손으로 향했다. 이에 페루딘의 고개도 그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괘, 괜히 길 잃으면 골치 아프니까 손잡는 거야!”

“으응, 그렇구나. 고마워! 잘 따라갈게.”

페루딘은 왜인지 모르게 화들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도리어 성을 냈다. 눈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마치 변명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고기 냄새가 풍겨 오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에시엘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인파를 거침없이 헤치는 노란 뒤통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를 가는 거지?’

페루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상인이 통돼지 바비큐를 굽고 있는 노점이었다.

이글대는 불꽃 위에서 느릿하게 돌아가는 통돼지 구이의 먹음직스러움은 냄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릿빛으로 구워지며 육즙이 자르르 흐르는 모양새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을 꼴까닥거리게 했다.

“야, 에시엘. 맘껏 먹고 있어 봐.”

눈앞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페루딘은 품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뭐든 사 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히 준비해 왔다며 자랑하듯 내보이던 묵직한 주머니였다.

하지만 에시엘은 눈매를 가늘게 뜬 채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래도 받아 들 생각이 없는 듯했다.

“뭐 해? 나 팔 아파! 빨리 받아.”

“내 것도 있어, 여기!”

이내 그녀는 크로스로 메고 있던 새하얀 가방을 페루딘의 눈앞에 떡하니 들이밀었다. 반대 손은 허리춤에 걸친 채 퍽 당당한 태도였다. 라비아나의 쌈짓돈은 페루딘이 챙겨 온 자금에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 두 사람 몫의 바비큐 값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쪼그만 게 말만 많아서…….”

페루딘은 인상을 팍 찡그리곤 새하얀 가방 뒤로 언뜻 흐릿하게 보이는 에시엘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곤 가방을 단숨에 쥐어 그 안에 자신의 주머니를 욱여넣었다. 채 다 들어가지 못한 주머니는 빼꼼히 튀어나와 금박으로 새겨진 가문 문양이 설핏 보였다.

“이 바보! 빨리 가!”

“어……. 어? 페루딘?”

그는 기어이 에시엘의 등을 밀어 내 느릿하게 돌아가는 통돼지 구이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러곤 1인분을 야무지게 주문하곤 정해진 가격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하기까지 했다.

약간은 서두르는 듯한 모습을 그저 얼떨떨하게 바라볼 때, 페루딘이 에시엘을 향해 말했다.

“야! 너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나 혼자?”

“엉. 이 몸은 잠깐 갔다 올 데가 있거든.”

페루딘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에시엘을 힐끔 바라보더니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곤 다급히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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