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못 이기는 척 끌려가면서도 페루딘은 그녀에게 붙들린 손목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열이 오른 자신의 몸에 비해 낮은 체온이 느껴졌다.
“찾았다!”
그러던 중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로 에시엘의 들뜬 목소리가 페루딘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다닌 것은 다름 아닌 음료를 파는 상인이었다. 에시엘은 기다리라는 말을 하곤 주저 없이 상인에게 다가가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저 바보가 대체…….”
“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페루딘의 얼굴 가까이 과일의 즙을 짜내어 만든 음료가 담긴 컵이 들이밀어 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큼함이 느껴지는 옅은 레몬색 음료 안에 들어 있던 얼음이 순간 청아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혔다.
“뭐야, 저리 치워!”
“내 선물이야!”
“난 이런 거 안 먹거든?”
페루딘은 단칼에 거절 의사를 내비치곤 망설임 없이 뒤돌아 발걸음을 옮기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선물인데 먹어 주면 안 돼? 금방 녹을지도 모르는데…….”
“어, 어?”
완전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다시금 뒤돌아 에시엘을 마주한 페루딘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한 채, 제 눈앞의 음료와 그녀를 번갈아 봤다.
“얼른, 얼른!”
어쩐지 레몬색의 음료와 에시엘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녀는 페루딘의 손에 부득부득 컵을 쥐여 주곤 제 몫의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경쾌한 탁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빈 컵이 놓였다. 그리고 방긋 미소 짓는 에시엘의 시선이 페루딘 쪽으로 향했다. 무언의 기대감이 그득했다.
그의 손에 억지로 쥐어진 컵에선 조금씩 물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과일음료는 자신의 손목에 닿았던 에시엘의 체온보다 시원하고 차가웠다. 레몬색 음료를 바라보며 컵을 살살 흔들자 또다시 얼음이 맞부딪히며 청아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침 목말라서 먹는 거야.”
마치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컵을 쥔 페루딘의 손에 미세한 힘이 더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한 모금 들이키려는 순간 에시엘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저씨, 누구예요?! 놔 주세요!”
“그건 꼬맹이 네가 알 필요 없지! 큭큭. 아저씨가 그 가방 좀 보고 싶은데 말이야.”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에시엘의 가녀린 팔뚝을 붙든 낯선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겁에 질린 그녀는 가방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낯선 남자의 목적은 아무래도 불순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야! 턱수염, 그거 놔!”
쨍그랑―.
광경을 바라보던 페루딘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망설임 없이 내던졌다. 그것은 턱수염이라 불린 낯선 남자의 발치로 떨어져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으악, 깜짝이야! 넌 뭐야?”
“빨리 놓으라고, 이 못생긴 턱수염아!”
페루딘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남자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남자의 턱수염을 잡아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닿을 듯 말 듯 하여 간지럽히는 꼴이 되어 남자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었다.
“이게 감히 겁도 없이! 혼나고 싶은 거냐?”
“야, 턱수염! 놔라! 이, 이 몸의 가문을 알고 나면 후회할 텐데!”
남자가 단숨에 페루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페루딘은 벗어나기 위해 거세게 저항했지만 어린 남자아이로선 성인의 손아귀 힘에 대응할 수 없었다. 바둥거릴수록 오히려 더욱 세게 옥죄는 듯했다.
“어느 가문인지 알 게 뭐야, 저리 꺼져!”
남자가 페루딘의 멱살을 내던지려 하자 아이는 겁을 먹은 듯 땅에 닿지 않는 발을 버둥거렸다. 안간힘을 다해 거센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아이의 몸은 흙바닥 위로 힘없이 내동댕이쳐졌다.
“페, 페루딘!”
쓰러진 페루딘은 어딘가 다친 모양인지 앓는 신음을 내며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에시엘은 몹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페루딘을 바라봤다.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의 표적은 다시금 자신이 될 터였다. 페루딘보다도 약한 그녀였기에 남자에게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팽개쳐진 페루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머리가 새하얘졌다. 혹여나 가방을 뺏길세라 꽉 쥐고 있던 손이 점차 떨려 오며, 눈동자가 수없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난동에 행인들이 모여들며 그들을 에워쌌지만 남자는 ‘별것도 아닌 게’라고 읊조릴 뿐, 주변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에시엘을 향해 시선을 돌리곤 붙잡고 있던 팔뚝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꺅!”
“애송아, 좋게 말할 때 내놔!”
남자의 목표물은 여전히 에시엘의 가방이었다. 그는 아마 가방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빼꼼히 튀어나온 가죽 주머니를 본 듯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주머니 겉면에 새겨진 금박 문양이라면 남자의 욕망을 충분히 자극했으리라.
“안 돼요! 도, 도와주세요!”
에시엘이 주변 행인들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도움을 청해 봐도 그저 시선을 피하고 수군거리기만 할 뿐, 나서는 이는 없었다. 남자의 인상이 워낙 험상궂은 탓인 듯했다. 그가 붙든 팔뚝이 점차 아려 왔다.
“크큭.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남자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가방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아악!”
하지만 그 움직임은 끝까지 도달하지 못했고 남자에게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에시엘이 점차 가까워지던 남자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기 때문이다.
“으으…….”
남자는 계속해서 옅은 신음을 흘리며 잇자국이 난 손등을 부여잡았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어느새 피가 몰려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간신히 손아귀에서 풀려나자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빠, 빨리……!”
에시엘은 남자가 혼란한 틈을 이용해 페루딘에게 다가가려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서둘러 남자의 곁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그녀는 이내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뛰쳐나가려 발돋움을 했다.
“크윽……. 감히, 이 쪼끄만 게!”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남자가 에시엘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른 남자는 더욱 악에 받쳐 있었다. 그는 이를 바득 갈며 에시엘을 내던지기라도 하려는 듯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어, 어…….”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내놨어야지, 엉?”
눈높이가 엇비슷해지자 남자의 격분한 목소리가 한층 가까이서 들려왔다. 이제 와 그에게 가방을 내준다 해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무사할 수 없을 거야.’
마주한 남자의 분노에 찬 눈빛이 이글거렸다. 에시엘은 금방이라도 내던져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스릉―.
불현듯 쇳덩이가 맞부딪히며 나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바짝 날이 선 칼날 끝이 남자의 목덜미에 닿았다. 소리만큼이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느낌에 움직임을 멈춘 남자가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잇따라 들려오는 음성에 멈칫하고 말았다.
“잠깐.”
“또 뭐……!”
“그 애부터 내려놓으시죠.”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에시엘은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떴다. 자신의 뒷덜미를 붙든 남자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외양 역시 낯설지 않았다.
주변에 내려앉은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유난히 붉은 빛을 띠는 눈동자가 잠시 에시엘에게 머물렀다.
“테, 테이시……?!”
남자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 사람은 테이시였다. 어찌 된 일인지 테이시는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야시장에 온 듯했다. 그 기사는 금방이라도 검집에 들어찬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뭐야?”
남자는 에시엘이 놀란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곤 크게 움찔했다. 날카로운 칼날 끝이 여전히 남자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던 탓이었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가 눈에 띄게 침을 삼켰다.
“하! 겨우 이런 거에 겁먹을 줄 알고?”
“두 번 말하진 않겠습니다.”
테이시는 뻗고 있던 손을 거두는 듯했다가 하늘을 향해 높게 쳐들었다. 그러고는 남자를 향해 빠른 속도로 휘둘렀다.
“자, 잠깐! 잠깐!”
남자의 다급한 외침에 테이시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에 빠르게 휘둘러지던 검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듯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렵한 행동과 달리 그의 단조로운 표정은 무척 무미건조했다.
남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공중에 멈춘 뾰족한 검을 보며 또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너, 넌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검을 휘둘러!”
“켈록, 켈록!”
에시엘의 뒷덜미를 붙잡은 손을 고쳐 쥔 남자가 말했다. 그 탓에 목이 조여져 얼굴이 살짝 벌게진 에시엘이 옅은 기침을 내뱉었다.
테이시의 시선이 잠시 에시엘에게 닿았다가 뒤쪽에 쓰러진 페루딘을 지나 다시 남자를 향했다.
“…….”
“쯧. 별것도 아닌 게 괜히 센 척이야?”
테이시의 답이 들려오지 않자 남자는 안심이라도 한 듯 중얼거리는 투로 도발했다. 하지만 그것이 남자의 실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테이시는 공중에서 멈추고 있던 칼을 거두었다가 다시금 재빠르게 휘둘렀다.
곧 공중에는 주황빛의 털들이 나풀거렸다. 그것은 남자의 잘려 나간 턱수염이었다. 그는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이 제격일 만큼 기민한 움직임으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베어 냈다.
남자는 마치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며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턱수염을 바라봤다. 에시엘 또한 큰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직 테이시만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됐습니까?”
순간 주변을 에워쌌던 행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붉은 눈’과 ‘레고니스 가문’이라는 단어가 얼핏 들려오기도 했다. 그 수군거림을 듣기라도 한 모양인지 에시엘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던 남자의 팔이 조금씩 떨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