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너 먹어.”
테이시는 에시엘의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 위에 도시락 통을 놓으며 그녀의 가까이 들이밀었다. 곧 방 안에 쿠키의 달큼한 파인애플 향이 물씬 풍겼다.
결국 또다시 침을 꼴깍 삼킨 그녀의 입에서 아이의 본성을 억누를 새도 없이 발랄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럼 잘 먹을게!”
에시엘은 거침없이 작은 손을 뻗어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쿠키의 모양이 어쨌건, 그런 것 따위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어린아이의 본성은 한시라도 빨리 쿠키를 맛봐야만 통제할 수 있을 듯했다.
곧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어 음미했다. 역시나 만족스러운 맛에 정신없이 쿠키를 먹는 동안,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이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전부 먹은 뒤 또 다른 쿠키를 집어 들려는 순간, 테이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었어?”
“으응?”
“통 안 보이길래.”
테이블 어딘가에 시선을 던지며 묻는 테이시의 모습에 에시엘은 뻗었던 손을 엉거주춤 거뒀다. 그러곤 방금 들은 말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그를 가만 바라봤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는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팠던 거야?”
또다시 사뭇 조심스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이와 함께 테이시의 눈길이 스리슬쩍 에시엘의 목 부근을 향했다. 지난날 괴한에게 뒷덜미를 붙들려 붉은 흔적이 남았던 곳 언저리였다.
“어? 그런 건 아닌데…….”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을 훑고 있었다. 혹여라도 생겼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찾는 듯 제법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것을 느낀 모양인지 괜스레 멋쩍어진 그녀가 볼을 긁적였다.
“나, 나도 바빴어!”
“…….”
“요리도 배워야 하고, 산책도 해야 하고……. 아무튼 나 할 거 엄청 많거든?”
그녀는 짤막한 손가락을 하나하나 굽히며 일정을 줄줄 읊었다. 이에 테이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리 많지 않은 일정이라 끝내 다섯 손가락을 모두 구부리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엔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테이시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 그냥 그렇다고…….”
“그래. 아픈 건 아니었구나.”
어쩐지 혼이 나는 사람처럼 점차 작아지는 에시엘의 목소리와 달리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어딘가 평온하게 느껴졌다. 흡사 걱정하던 고민거리를 지워 낸 듯한 사람 같았다.
“으응……. 그런데 왜애?”
“뭐가.”
“나 기다린 거야? 그런 거야?”
에시엘은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곤 기대감이 가득 찬 목소리로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무심하던 테이시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정곡이라도 찔린 듯했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찾았는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니.”
“으음. 그럼 뭐야?”
“단지…….”
테이시의 새빨간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변명을 떠올리는 듯 이곳저곳을 향하던 시선은 돌연 눈앞의 쿠키에서 멈췄다. 쿠키는 여전히 달콤한 파인애플 향을 풍기고 있었다.
“네가 줬던 거, 쿠키. 그거 때문이야.”
“쿠―키? 흐음, 하지만 테이시 너는 안 좋아하는 거 같았는데…….”
에시엘은 일부러 말을 늘이며 모르는 척을 했다. 물론 테이시가 쿠키를 안 좋아할 리는 없었다. 원작대로라면 그는 디저트를 무척이나 좋아할 터였다.
“……나쁘지 않았어.”
넌지시 이야기하는 그가 시선을 회피했다. 설마하니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모양인 듯했다.
“정말?! 그럼…….”
뜸을 들이며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던 에시엘의 시야에 동그란 통 속 가득한 쿠키가 들어찼다. 설핏 보아 꽃 같은 모양의 쿠키를 보고 있노라니 왜인지 모르게 뽀얀 볼 위로 옅은 홍조가 생겨났다.
“앞으로는 훈련 시간 끝나고 만나!”
“그게 무…….”
“쉿!”
“…….”
에시엘은 입술 가까이 검지를 갖다 대곤 테이시의 말을 단박에 잘라 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팔랑이며 가까이 오길 권했다.
“나 맛있는 쿠키 만들 줄 안다? 도프니한테 배우고 있거든. 그거 테이시 다 줄게.”
오직 둘뿐인 방이건만, 상체를 가까이 숙인 채 조용히 속삭이는 에시엘의 모습은 비밀이라도 떠드는 양 조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에시엘로선 원작의 소설을 통해 테이시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위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그딴 거 안 먹어도…….”
“뭐어? 절대 안 돼! 쿠키 좋아한다며!”
에시엘은 짐짓 엄한 척 호통을 치며 테이시를 나무랐다. 그래 봤자 그가 겁을 먹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하…….”
테이시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짧은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의자의 팔걸이에 무심히 걸친 팔로 턱을 괸 채 에시엘을 바라봤다.
이 아이와 있으면 자꾸만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 그토록 애를 쓰며 숨기려던 것들이 자꾸만 새어 나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한 기분이 좋은지 싫은지는 쉬이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명확한 것이 있다면, 모든 게 결국엔 저 아이의 뜻대로 따르고 만다는 점이었다.
자꾸만 다가오는 아이를 왜인지 모르게 내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내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아이는 그저 상대하지 않는 것으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스스럼없이 다가왔고, 내밀한 틈을 파고들었다.
테이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붉은 머리칼을 한 해맑은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땐 머릿속에서 그려 내다 실패했던 아이가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시는 그 청명한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내심 안도했다. 오롯이 그려 낼 수 없는 상태라면 아직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애써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는지도 몰랐다.
“그럼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무섭게 해맑은 목소리가 또다시 테이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에시엘은 눈동자마저 숨을 정도로 눈매를 휘며 환히 웃음 짓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녀의 작은 손이 다시금 쿠키를 집어 들었다. 와삭,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시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어쩐지 심장이 조금 빨리 뛰는 듯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살짝 열어 놓은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한여름에 접어들고 있어서인지 드물게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 반가웠다.
에시엘은 침대에 누워 가만히 숨만 쉬고 있었다. 잠자코 누워 있다면 서늘하게 느껴질 법한 바람을 느끼면서 멍하니 드높은 천장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머리맡에는 곱게 접힌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상아색을 띠는 체크무늬 손수건은 지난날 테이시가 건네준 것이었다. 어쩐지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투로 넌지시 손수건을 건네던 예상 밖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것에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후, 심지어는 느닷없이 찾아온 날도 있더랬다.
테이시는 쿠키가 먹고 싶었다느니 하는 변명인지 아닌지 헤아리기 어려운 말을 늘어놓았지만, 제 방까지 찾아온 것으로 보아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닐 듯했다.
그날,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듯하던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정말 쿠키가 먹고 싶었던 거라면 굳이 제 방까지 올 이유는 없었으니까.
망연히 천장만 보던 에시엘은 이내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그러곤 머리맡을 더듬어 손수건을 집어 들고 그것을 빤히 노려보다가, 다시금 모로 누워 천장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에시엘의 손에 잡힌 손수건은 간간이 부는 바람에 의해 힘없이 미약하게 나풀거렸다.
“놓치면 떨어지겠지……?”
손수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에시엘은 어쩌면 당연한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서서히 손의 힘을 풀던 찰나였다.
뎅―, 뎅―, 뎅―.
방의 한쪽, 작은 추가 달린 벽시계가 정각을 알렸다.
에시엘은 고개만 돌려 시계를 바라보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놓을 기세로 잡고 있던 손수건 또한 세게 고쳐 쥐며 신이 난 듯한 얼굴에 슬금슬금 미소를 띠었다.
“3시다!”
오후 3시. 소화 기능을 끝낸 배 속에서 적당히 출출함을 느낄 무렵이었다.
* * *
“도프니, 나 왔어!”
부리나케 주방으로 달려간 에시엘은 곧장 도프니를 찾았다. 한적한 주방에 혼자 남은 그는 오븐 속에서 이제 막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래, 왔구나.”
“얼른, 얼른.”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이 반기는 그의 모습과 달리 에시엘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부산스러움을 떨었다.
오븐 트레이 위에는 이제 막 구워져 도톰하게 솟아오른 스콘 대여섯 개가 균일하게 놓여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황금빛을 띠는 그것에선 희미하게나마 윤기가 나고 있었다.
“허허. 대체 누구한테 주려고 이 호들갑을 떠냐?”
“그, 그건 비밀이야!”
에시엘은 순간 행동을 멈추곤 본심을 들킨 사람처럼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 주방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더니 서둘러 동그란 접시를 가져와 도프니에게 불쑥 내밀었다.
“자! 시간이 없어, 얼른!”
“하하. 녀석, 참.”
제 얼굴보다도 큰 접시를 내미는 아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연신 반짝였다. 이에 도프니는 온화한 눈빛을 지우지 않은 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른 상태로 간식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긴 했으나, 에시엘은 오늘따라 유난히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이유를 묻진 않았다. 저 작고 귀여운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 줄 의향이 있었으니까.
스콘을 세 개쯤 올려놓자 제법 커 보이던 접시가 어느새 가득 들어찼다. 이어 그 개수를 눈으로 가늠하던 에시엘이 군침을 삼키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분명 먹어 보나 마나 맛있겠지?”
“내 칭찬은 됐으니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에시엘!”
에시엘은 도프니의 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벌써 저만치 멀어져 주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는 연신 서둘러 걸음을 옮기면서도 접시만큼은 꽉 붙든 채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떨어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렇기에 급한 마음에도 차마 뛰지 못하고 잰걸음을 재촉했다.
“이쪽이라고 했지……?”
에시엘은 기억을 더듬어 어딘가를 향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질 법한 저택이건만 아직도 낯설게 느껴지는 복도에,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뒤를 돌아보게 됐다.
그러는 새에 간신히 다다른 어느 문 앞에 서자 괜스레 긴장감이 흐르는 듯했다.
‘먼저 와 있을까?’
비장하게 문을 노려보던 에시엘은 이내 옅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접시를 꽉 붙들곤 반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