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우와! 어떻게 만든 거야?”
“제가 잘 알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거 손에 잘 맞을까요……?”
에시엘의 손을 붙든 라비아나가 그녀의 짤막한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워 넣었다. 혹여 맞지 않을까 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으나 다행히 꽃반지는 치수를 재서 만든 듯 꼭 들어맞았다.
“와아…….”
꽃반지가 끼워진 손을 허공에 펼쳐 보인 에시엘이 작은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의 조그마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흐뭇한 미소를 짓는 라비아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무지 예쁘다, 라비아나! 얼른, 얼른! 나도 만들어 볼래!”
이내 손을 거둔 그녀가 라비아나를 보챘다. 초록색의 풀빛이 물든 듯한 눈동자가 유난히도 반짝이며 들뜬 그녀의 기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전생에 보육 교사였던 만큼 손재주가 좋기도 했으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에 살았던 그녀로선 꽃반지를 만들 기회가 흔치 않았기에 잔뜩 들뜨고 말았다. 드넓게 펼쳐진 꽃밭은 그야말로 좋은 재료가 가득한 보물 창고와도 같았다.
“그럼 조심히 따라오셔요.”
라비아나는 풀을 최대한 피하며 흙을 지르밟았다. 본인은 상관없으나 뒤따르는 에시엘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어린아이의 약한 피부라면 종아리를 간지럽히는 풀에 의해 쉽게 불긋불긋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에시엘 님. 잠시만 계세요.”
“으응?”
머지않아 적당한 장소에 다다른 라비아나가 걸음을 멈추곤 무언가를 탁탁 털어 펼쳤다. 그것은 곧 무성한 풀밭 위로 살포시 놓였다. 노란색 물방울이 수놓인 라비아나의 손수건이었다.
“됐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꽃은 제가…….”
라비아나가 손을 가볍게 털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에시엘은 그러한 라비아나의 행동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노란 물방울무늬 손수건을 낚아챘다. 그러곤 손수건이 접혀 있던 주름 그대로 다시 개어 놓았다. 앙다문 입술이 제법 강건했다.
“에, 에시엘 님……?”
“자! 나는 괜찮아. 이거 라비아나 것인데 더러워지잖아.”
라비아나는 건네받은 손수건을 꼭 붙들었다. 시종인 자신을 이렇게 대해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손수건을 바라보던 순한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는 것도 같았으나, 그녀는 금세 활기찬 음성을 내뱉었다. 눈빛은 마치 에시엘에 대한 충심으로 이글거리는 듯했다.
“그럼 이제 제일 예쁜 꽃을 찾아볼까요?”
“좋아. 내가 먼저 찾을래!”
해맑게 웃은 에시엘이 곧장 쪼그려 앉아 풀 사이를 헤집었다. 얼핏 날카롭게도 느껴질 법한 풀잎은 보기보다 부드러워 그녀의 자그마한 손가락과 손목을 간지럽혔다.
들꽃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나 꽃반지를 만들 정도로 줄기가 길고 예쁜 꽃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혹여 생채기라도 날까 걱정한 라비아나가 비교적 풀이 뜨문뜨문한 곳으로 오다 보니 더욱 적합한 꽃이 없는 듯했다.
“끄응.”
풀밭을 한참이나 헤집던 에시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내 망연자실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어……?”
그러다가 문득 바라본 곳에는 그녀의 눈을 의심케 하는 것이 있었다.
“네잎클로버다!”
탄성을 내지른 에시엘이 단숨에 걸음을 옮겼다. 네잎클로버는 온통 초록색인 풀밭에서 틀린 그림 찾기라도 하듯 확연히 시야에 들어찼다. 이 세계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서도 모를 일이었다.
에시엘은 네잎클로버를 조심스레 꺾어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곧이어 지척에서 들꽃을 골라내던 라비아나가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잎클로버……요? 어어? 그냥 평범한 토끼풀이 아닌가요?”
“아니야, 잘 봐 봐!”
에시엘이 손바닥에 놓인 네잎클로버를 라비아나의 시야 가까이 들이밀었다.
“하나, 둘, 셋, 넷!”
마치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땅딸막한 손가락으로 잎의 수를 셌다. 흔해 빠진 토끼풀로만 보이던 그것은 정말 네 개의 잎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나, 정말 잎이 네 개잖아요?”
“맞아! 그래서 네잎클로버야.”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던 에시엘이 뿌듯한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라비아나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럼 그건…… 돌연변이인 거네요……?”
살짝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네잎클로버에 관한 미신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뭐어? 아니야. 대부분 세 잎이지만 이건 네 잎이니까, 특별한 거지!”
“네? 특별하다고요?”
“응. 특별해서, 행운을 가져다줄 거야.”
에시엘이 라비아나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음 지었다. 뜻하지 않게 발견한 행운을 불러오는 풀이 에시엘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전해지는 미신에 담긴 의미 때문에라도 일말의 기대감이 서리는지도 몰랐다.
순간 약하게 불어오는 여름 바람이 에시엘의 손바닥에 놓인 풀잎을 들썩였다. 혹여나 행운이 날아갈세라, 에시엘이 다급히 반대 손을 뒤덮어 가두었다.
이윽고 바람이 멎자 에시엘이 덮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살짝 들어 틈을 확인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재빨리 붙잡은 행운이 제 손에 놓여 있었다.
‘대공에게 줘야지!’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롬포드에게 행운을 전해 줄 심산이었다. 미신이긴 하나 이로 인해 저택의 주인인 그에게 좋은 일이 찾아온다면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지도 몰랐다.
‘이런 걸 좋아할까? 설마 바로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러다 불현듯 드는 걱정에 에시엘이 손에 놓인 네잎클로버를 빤히 바라봤다. 라비아나의 반응이 썩 달갑지 않은 것으로 보아 롬포드 또한 같은 반응일 수 있었다. 어쩌면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에시엘은 지난날 롬포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언제나 서늘함을 띠었지만 그래도 요즘 들어서는 행동이 꽤 유해진 듯했다. 때문에 마음 한편 혹시나 하는 생각이 생겨났다.
토끼풀을 바라보던 에시엘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마치 굳은 결심을 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라비아나. 이거 대공님에게 드려도 될까?”
“그럼요! 좋아하실 거예요.”
확인을 받으려는 듯 묻는 아이를 보며 라비아나가 흔쾌히 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시엘은 확신이 들지 않는 모양인지 라비아나와 네잎클로버를 번갈아 쳐다봤다. 수차례 기울어지는 작은 머리통에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저택 안, 어느 문 앞에 선 에시엘이 뚫어질 만큼 강렬한 시선으로 그것을 노려봤다. 그러다가 이내 초조한 듯 불안한 발걸음으로 근처 복도를 서성였다.
그 문 너머의 공간은 롬포드의 집무실이었다. 중요한 서류를 보관하고 막중한 업무를 보는 비밀스러운 곳이었으나 그녀가 그러한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어떠한 고민이라도 하는지 굳게 앙다물어진 에시엘의 입술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수심이 짙게 드리워 유난히 어두운색을 띠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긴 복도를 수차례 왔다 갔다 했음에도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휴…….”
하지만 머지않아 억지로 고민을 끝낸 듯, 집무실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채 탄식 섞인 한숨을 크게 내뱉는다. 그리고 노려보던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한 걸음을 움직였을 때였다.
“뭐지?”
에시엘의 작은 머리통 위로 그녀의 수심보다 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을 부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몇 번을 들었음에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순간 멈칫한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실시하려 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을 고민했던 일의 해결책이나 다름없었지만, 괜스레 등 뒤로 숨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게 될 뿐이었다. 그녀로선 아직 답을 따를 각오가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에시엘의 시선이 닿은 바닥에 자리한 갈색의 구두코가 유난히 뾰족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곳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었지?”
재차 되묻는 롬포드의 목소리는 더욱 날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게 다문 작은 입술에선 약간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옅은 한숨을 토해 내곤 에시엘의 옆을 지나쳐 집무실 문을 향했다.
“그, 그게…….”
에시엘이 다급한 마음에 내뱉은 말로 그를 불러 세웠다. 곧이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뒤돌아서 천천히 고개를 올려다봤다.
핏빛 눈동자 속 차디찬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이로 인해 일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으나 그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에시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아직은 그의 시선을 견뎌 낼 재간이 없는 탓이었다. 결국엔 그의 목 언저리를 바라보는 정도로 타협했다.
언제나 말끔한 슈트 차림의 롬포드는 붉은색의 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빼닮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에시엘은 그의 타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계속해서 머뭇거린다면 그가 쌩하니 들어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혹은 칼을 들이미는 사나운 행동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 대공님! 어디 갔다 오세요?”
별안간 제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에시엘은 당황한 탓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야 했다.
반면 롬포드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똥강아지 같은 행동을 보이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지레 겁을 먹고 굳어 있던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조바심을 내며 마음을 졸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그의 한쪽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했다.
“아니, 아니……. 그게요…….”
에시엘은 롬포드의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고장 난 사고 회로 탓에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굳게 마음먹었던 것과 다르게 입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