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5화 (45/80)

45.

“저기…….”

롬포드는 에시엘이 우물쭈물 망설이는 모습을 왜인지 모르게 눈여겨보는 듯했다. 작은 머리통부터 길게 자란 붉은 머리칼, 단정히 검은 구두를 신고 있는 발까지. 찬찬히 훑어 내리는 시선이 퍽 노골적이었다.

“쯧.”

답답한 태도를 참다못한 것인지 끝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에시엘에게서 몸을 돌려 선 롬포드는 집무실로 들어가려는 듯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에시엘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다른 말을 꺼냈다간 오히려 더 나쁜 상황만 불러올 것 같았다. 풀이 죽은 듯 푹 수그리는 작은 머리통을 따라 붉은 머리칼이 스륵 흘러내렸다.

하나 롬포드는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문고리에 어떠한 힘도 가하지 않고 잡은 채로 가만있을 뿐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그가 눈을 지그시 감는 것도 잠시, 다시금 몸을 돌려 에시엘을 바라봤다.

“내놔.”

그의 냉혹한 시선이 아이에게 내려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눈길은 에시엘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의 주먹 새로 진즉에 발견한 풀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아이에게 사사건건 관심을 둬 봤자 본인에게 득이 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보았으면서도 그냥 모른 척하려 했건만, 어쩐지 영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손가락 사이로 얼핏 보이던 초록색의 풀은 조금 이상한 모양새였다. 예민한 그였기에 그 사소한 차이를 금방 알아챘다.

그것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 조막만 한 아이가 쭈뼛거리는 원인이리라.

단호하게 내뱉은 말에도 에시엘은 선뜻 그것을 건네지 못했다. 결국엔 인내심이 좋지 못한 롬포드가 본인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시엘이 커다란 손 위로 그것을 조심스레 내려놓자 그의 인상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뭐야.”

어딘가 살짝 이상해 보였던 그것은 정말로 풀이었다. 저택의 대문을 나가지 않고 정원만 한 걸음 내디뎌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토끼풀 말이다.

설명을 요하는 롬포드의 눈길이 또다시 에시엘에게 향했다. 사뭇 냉담하다고 느껴지는 시선이 그녀의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네잎클로버인데요, 행운을 가져다주거든요…….”

“네잎클로버?”

에시엘은 망설이며 느릿하게 답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건네준 이상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큰 눈으로는 연신 그의 기분을 살피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했다.

“돌연변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네 개짜리 잎은 특별해서 행운을 불러온대요.”

“이까짓 게?”

“정말로요! 그래서 대공님께 드리고 싶었어요.”

분명 아이가 겁을 먹은 게 느껴졌지만, 네잎클로버라는 토끼풀의 싱그러움을 담은 듯한 초록빛 눈동자만큼은 유난히 반짝였다.

“…….”

“서, 선물이에요…….”

롬포드는 본인의 손에 놓인 네잎클로버를 어쩌지도 못한 채 가만 내버려 뒀다. 이에 계속해서 덧붙이는 에시엘의 목소리에선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래. 알았다.”

무정한 듯 대충 내뱉은 말에도 에시엘의 얼굴엔 안도감 섞인 옅은 미소가 서렸다. 곧장 짓밟아 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이는 양손을 배꼽 위로 올려놓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본 롬포드는 반대 손을 들어 휘적휘적 휘저을 뿐이었다.

* * *

똑똑―.

“들어와.”

롬포드의 허락하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집사인 렌테였다. 그의 옆구리와 팔 사이에는 검은 표지로 뒤덮인 장부가 여럿 끼워져 있었다. 전부 롬포드가 확인해야 할 서류들이었다.

곧이어 그의 앞까지 다다른 렌테는 흰 종이 뭉치들로 그득한 책상 위를 천천히 훑었다. 열흘을 꼬박 새워도 다 검토하지 못할 만큼 방대한 양이긴 하나, 제 주인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본인의 몫이었다.

렌테는 작은 소리로 목을 가다듬곤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피곤하시면 조금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하지만 롬포드는 그를 힐긋 바라보고 말 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더욱 빠르게 휘갈겼다.

“됐어.”

그는 그저 짧은 대답과 함께 반대 손을 까딱이며 또 다른 장부를 건네길 요구할 따름이었다. 이에 렌테는 수긍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챙겨 온 장부들을 펼쳐 목록을 확인했다.

“상반기 결산액, 하반기 예산서입니다.”

장부를 건네던 렌테는 순간 어딘가 평소와 다른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함의 원인을 알아채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롬포드는 여전히 책상 위 서류에 몰두하고 있었다.

“각하. 외람된 질문이나, 저건…… 뭡니까?”

열렬히 움직이던 렌테의 눈동자가 머무른 곳은 롬포드 뒤쪽의 벽면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뻗은 검지로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과 비슷한 색감에 자칫 발견하지 못할 뻔했으나 제법 압도적인 비주얼은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액자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은 간소하기 그지없었다. 웬 풀 하나만이 가운데 덩그러니 넣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액자 속 풀은 특별히 아름다워 보이지도, 귀한 약용 식물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자질구레한 소품도 두지 않은 채, 오롯이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책상만 놓인 휑한 집무실에 떡하니 걸린 액자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그냥 지나칠 뻔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조심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롬포드가 휘갈기던 만년필을 멈췄다. 그러곤 렌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네잎클로버. 문제 있나?”

“네, 네 잎……?”

렌테는 롬포드가 내뱉는 생소한 단어를 끝까지 따라 하지 못했다. 미간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풋 찡그려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내 렌테는 다시 한번 커다란 액자 속 네잎클로버라는 풀을 바라봤다. 아무리 보아도 제 눈엔 그저 흔한 토끼풀에 지나지 않는 듯한데, 저만한 액자에 모셔 둘 만큼 영험한 풀이라도 되는 것일까.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군.”

“예?”

“밑져야 본전 아닌가.”

벙쪄 있는 렌테의 귓가에 다시금 롬포드의 들뜬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그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유독 형형한 것 같기도 했다.

렌테는 어쩐지 자꾸만 변하는 듯한 제 주인의 모습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갑자기 풀 쪼가리에 담긴 의미를 믿는 것이며, 생전 신경 쓰지 않던 마법사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한 것까지. 대공비의 죽음 후 더욱이 악랄한 태도를 고수하던 롬포드가 아닌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이제야 제 주인에게 숨통이 트인 듯했으니까. 다소 의아한 것은 그 시점이 어린 볼모가 나타난 후부터라는 점이었다.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렌테는 액자에 담긴 토끼풀과 다시금 일에 몰두하는 롬포드를 번갈아 봤다.

* * *

“진짜? 진짜 나한테 검 사 줄 거야?”

신난 에시엘이 마차 안에서 발을 통통 구르며 테이시에게 물었다. 그녀는 저택을 나설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 앳된 얼굴은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며칠 전, 테이시가 에시엘에게 검을 사러 가기 위해 동행하겠노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사실 에시엘은 그저 스치듯 한 말이라 생각했기에 별 기대 없이 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테이시는 정말로 검을 사러 가자며 찾아왔다. 아무래도 에시엘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직접 내림하였는지 모른다.

에시엘로선 검 자체에 대한 기대도 컸지만 진심으로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테이시의 말에 더욱 설레었다.

‘검술…….’

지금도 테이시는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나, 성인이 된 후 그의 검술은 제국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그가 검으로 수련하는 장면이 묘사된 부분만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미래에 테이시는 레고니스가의 가주가 되는 것과 동시에 소드 마스터라는 칭호도 얻게 된다. 그러니 그에게 배우는 검술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니까.”

반대편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테이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귀찮은 듯이 에시엘 쪽을 흘겨보았지만, 정말로 귀찮은 기색은 아니었다.

푸르릉―.

이윽고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흙길을 달리던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목적지에 당도한 모양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온 후,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며 도착을 알렸다. 이에 마차 너머 희미하게 들려오던 외부의 소란스러움이 제법 선명해졌다.

테이시는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망설임 없이 휙 나섰다. 덩달아 에시엘도 그를 따라 내리기 위해 움직임을 재촉했다.

마차에서 내려선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벌써 저만치 휘적휘적 멀어지고 있었다.

‘같이 가기로 했으면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급해진 에시엘은 투덜거림을 속으로 삼키며 눈으로는 테이시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리고 꽤 높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순간이었다.

“앗……!”

제법 경쾌한 첨벙 소리와 함께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침에 잠깐 내린 소나기 탓에 얕은 흙구덩이에 빗물이 고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허둥지둥하던 에시엘에게 이를 고려할 여유 따윈 없었으리라.

순간 멈칫한 그녀가 자신의 차림새를 살폈다. 광장을 구경 나온 사람치고는 조금 엉망이었다. 드레스 끝자락이며 구두며 흙탕물이 튄 탓에 얼룩덜룩해진 것이 눈에 띄었지만 개의치 않고 손으로 탁탁 털어 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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