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 순간에도 테이시는 멀어지고 있었기에 일단 지금은 속상해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다시금 테이시를 쫓았다.
앞서가던 그는 돌연 걸음을 멈추곤 에시엘을 돌아보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음을 의아하다 생각했는지 서둘러 다가오는 에시엘을 가만 쳐다볼 뿐이었다.
“나 기다려 준 거야?”
테이시는 엉망진창인 모습을 살피듯 눈동자를 분주히 움직였다. 방긋 미소 지으며 말하는 에시엘의 말끔한 얼굴과 다르게 작은 손과 검은 구두는 눈에 띄게 지저분했다.
반면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아서인지 어색하게 미소를 거둔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리고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이걸로 닦아.”
무심히 말하는 테이시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그리고 본인의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에시엘에게 건넸다. 찌푸려진 얼굴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곧 에시엘이 얼떨떨하게 손수건을 받아 들자 그가 쌩하니 걸음을 옮겼다.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었다.
“나 밉보였나……?”
에시엘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에 들린 손수건과 멀어지는 테이시의 뒷모습을 번갈아 봤다. 꾀죄죄한 모양새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큰 눈을 끔벅거리는 것도 잠시, 더러워진 손을 닦아 낸 에시엘이 그의 뒤를 따라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광장의 풍경에 에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치솟은 시계탑과 광장을 에워싸듯 자리한 알록달록한 색색의 건물들. 그리고 광장의 중앙에 놓여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까지.
“우, 우와…….”
마치 외국 영화 속에서나 보던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넋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리는 새에 또 다른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장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행인들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사람들, 분수대에 걸터앉아 장난을 치는 아이들 등. 에시엘은 난생처음 구경하는 풍경을 전부 눈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테이시는 그런 에시엘을 힐끔 쳐다보곤 일부러 목을 가다듬으며 인기척을 냈다. 아무래도 혼자 가 버릴 생각은 없는지 그녀가 광장의 풍경에서 시선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광장의 중앙을 지나고 왼쪽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걸었다. 그다지 신기할 게 없는 평범한 길거리임에도 에시엘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테이시를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뒤를 따랐다.
이내 한 가게 앞에 멈춰 선 테이시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자주 와 본 듯 익숙하게 걸어가 안쪽에 자리한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시, 실례합니다―.”
조심스레 따라 들어선 에시엘이 녹옥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가게 내부를 살폈다.
그곳에는 벽면이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열 맞춰 진열된 여러 종류의 검들이 그득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 청동 검, 날이 기다란 진검 등 질감이나 모양이 아주 다양했다. 개중에는 저게 정말 검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한 것들도 더러 있었다.
“누군가?”
머지않아 가게 안쪽에서 할아버지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그는 나이를 짐작게 하는 하얗게 센 수염과 달리 젊은이들 못지않을 정도로 탄탄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심지어는 민소매 밖으로 우락부락 드러난 근육들이 그가 영락없는 무기상임을 알려 주는 듯했다.
“어어? 얼마 전에 왔다 갔는데 또 오셨군요.”
“저 아이가 쓸 검이 필요해서요.”
무기상이 옅은 미소를 띠며 테이시를 반기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에시엘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녀는 가게 곳곳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멋있는 게 완전 많아.”
들릴 듯 말 듯 혼잣말을 내뱉은 에시엘이 땅딸막한 손가락으로 검집에 푸른빛 보석이 알알이 박혀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검을 조심스레 훑어 내리는 찰나였다. 힘이 조금 과했던 탓인지, 검이 그녀를 향해 스르륵 기울었다.
“위험하잖아.”
어느새 다가온 테이시가 쓰러지던 검을 받쳐 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잡아야 할 만큼 무거워 보이는 검이었지만, 그는 힘들어 보이는 기색조차 없이 거뜬히 막아 내곤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
“그럼 천천히 둘러보시지요.”
그런 그들의 등 뒤에서 무기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다시 가게 안쪽으로 자리를 피했다.
“고, 고마워.”
“너무 큰 검은 고르지 마. 위험해.”
“그냥 검이 멋있길래…….”
“넌 휘두르지도 못해.”
에시엘이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테이시에 의해 제자리에 놓인 검은 멋있기는 하나 힘이 약한 자신에게는 분명 위협적일 것이었다. 테이시는 의연한 태도로 그녀를 지나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그럼? 나한테는 어떤 검이 어울려? 다른 거 골라 줘!”
테이시를 쫄래쫄래 뒤따르며 에시엘이 물었다. 이에 그 모습을 힐긋 흘겨보던 테이시가 조금 구석진 곳에서 검을 하나 꺼내 들곤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이게 좋겠네.”
“애걔……?”
그것은 나무를 깎아 만든 평범한 목검이었다. 다만 크기가 매우 작아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법한 검이었다. 물론 에시엘의 자그만 손에는 딱 들어맞아 주문 제작이라도 한 듯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허망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 실력이 늘면 진짜 검을 사 줄 테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
에시엘이 뭐라 더 이야기할 새도 없이 테이시는 홀연히 걸음을 옮겨 무기상에게 값을 지불하고 있었다.
* * *
다시 돌아온 광장의 곳곳엔 주황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스멀스멀 조금씩 사라지는 태양이 마지막 빛을 뽐내며 저와 같은 색을 흩뿌렸기 때문이었다. 분수대의 물줄기에도 그 빛이 깃들어 더욱 영롱하게 반짝였다.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해가 지고 있는 지금은, 에시엘로선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외출할 기회가 흔치 않았던 만큼 이 순간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경이롭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조심해.”
에시엘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테이시가 그녀의 팔뚝을 붙들었다. 이에 걸음을 멈춘 그녀가 테이시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곳엔 튀어나온 돌부리가 있었다. 그녀의 발치 바로 앞이었다.
“고, 고마워. 헤헤…….”
겸연쩍은 듯 어색한 웃음을 짓는 에시엘의 입매가 옅은 호선을 띠었다.
그 후로는 테이시도, 에시엘도 아무런 말이 없어 뜻하지 않은 적막이 흘렀다. 그러다 제법 가까이서 마차가 보이자 나란히 걷던 테이시는 걸음을 빨리했다. 먼저 마차를 탈 생각인지 평소보다 조금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어엉……?”
하지만 뒤따라 마차에 도착한 에시엘의 고개가 조금 갸울어졌다. 앞서갔던 테이시가 어쩐지 올라타지 않은 채 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개가 또다시 반대쪽으로 갸울어질 즈음, 테이시가 마차의 문을 열며 손을 내밀었다.
“자.”
붉은 석양에 타는 저녁노을을 뒤로한 채 서 있는 테이시에게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그늘진 그의 낯에서 유난히 두드러지게 빛나는 눈빛의 의미를 그녀로선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의 호의를 받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제게 향한 붉은 눈동자가 태양보다 형형하게 빛나기 때문일까.
그저 어딘가 기분이 이상할 뿐이었다.
* * *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구절을 경쾌하게 읽은 에시엘이 탁― 소리가 나게끔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제 옆에 자리한 페루딘을 슬그머니 흘겨봤다.
“……이거 읽어 줘.”
오늘의 페루딘은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그는 늘 당차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조금 쭈뼛쭈뼛하는 모습으로 방을 찾아왔더랬다. 초저녁 무렵 대뜸 찾아온 아이의 손에는 얇은 동화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책의 제목은 ‘엄지 공주’였다. 튤립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끝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동화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에시엘은 전생에서 읽어 본 적이 있는 동화였다. 이 세계에서 마주한 익숙한 책의 제목에 신기했던 건 둘째 치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페루딘의 행동이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얌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와 동화책을 불쑥 내미는 아이의 얼굴에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약간 상기되어 홍조 띤 낯과 더불어 붉어진 귀 끝이 이를 방증해 주고 있었다.
에시엘은 아이가 웬일로 차분해진 이유를 알 수 없어 작은 머리통을 갸웃하면서도 동화책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일전과 같이 자신의 침대로 향한 뒤, 페루딘을 향해 손짓했다. 그는 쭈뼛쭈뼛 어색해하면서도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고개를 돌려 바라본 페루딘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페루딘……?”
에시엘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어딘가에 엄청나게 집중한 것인지 답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함이 느껴지는 행동에,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콕 찔렀다.
“다시!”
“어엉?”
그에 맞춰 우렁찬 페루딘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멍하니 되물은 에시엘이 재차 입을 움직이려는 순간, 페루딘이 고개를 홱 돌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또 읽어 줘!”
“뭐어?”
“재, 재밌어서 또 듣고 싶어.”
페루딘은 뒤집힌 책을 바르게 돌려 슬며시 에시엘의 가까이 들이댔다. 다시금 에시엘의 앞에 책이 놓이자,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벙찐 얼굴로 큰 눈을 끔벅거렸다.
“세 번이나 읽었는데?”
그랬다. 에시엘이 황당해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페루딘은 벌써 네 번째 같은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엄지 공주’를 처음으로 완독한 뒤, 또다시 읽어 달라고 할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리고 세 번째에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이 생겨났지만 어쩔 수 없이 투정을 받아 줬다.
하지만 이쯤 되니 그의 행동이 몹시 수상하다는 생각을 도무지 떨쳐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