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49화 (49/80)

49.

에시엘은 차마 떨리는 손을 뻗을 생각도 못 하고 바라만 보는 듯했다. 그녀를 힐긋 흘겨본 테이시가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돌렸다. 그러곤 피가 묻지 않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어 냈다.

“됐어, 괜찮으니까 가 봐.”

“그래도…….”

“큰 상처 아니야. 그렇게 걱정되면 사람이나 불러 주든지.”

대수롭지 않은 척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는 테이시가 무색하게 피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흙바닥을 짙게 물들인 혈흔은 그의 상처를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흉은 둘째 치고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상처가 곪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지금은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게 가장 문제였다.

“사람, 사람…….”

에시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경황없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허둥대며 발을 동동 굴렀다.

뒤를 돌아 바라본 저택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테이시를 찾으러 저택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만 어림잡아 한 시간이 걸렸었다. 물론 이곳저곳을 헤매느라 시간이 지연됐던 탓도 있어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하지만 최대한 빨리 뛰어갔다 돌아온다 한들, 피를 많이 흘리고 있는 테이시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고개를 두리번거려 봐도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만 시야에 들어차고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테이시의 성격상 시종들을 데리고 다닐 리 만무했다.

“어떡해……. 방법이…….”

에시엘은 초조한 마음에 드레스 자락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괴로워하는 테이시를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널 어쩌면 좋니? 신력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치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최악이다.”

그러던 중, 언젠가 왕비가 했던 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그날도 역시 보잘것없는 이유로 혼이 나서 흠씬 두들겨 맞은 날이었다. 에시엘은 매서운 손길 속에서 왕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모진 말을 익숙하게 견뎌 냈었다.

“내, 내가…….”

에시엘은 머뭇거리며 내뱉던 말을 멈춘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에게는 분명 신력이 있긴 하나,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 능력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나 미약한 수준에 그치는 정도였다. 그만큼 신력에 대한 확신이 없는 탓에 치유해 보겠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하지만 신력이 강하고 아니고의 문제를 따지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변에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테이시! 잠깐만.”

에시엘은 불안정한 마음을 진정시키듯 심호흡을 하며 테이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곧이어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상처를 부여잡고 있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거뒀다.

가까이서 마주한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날렵한 칼날이 피부 깊숙이 파고든 탓에 벌어진 살갗에선 붉은 피가 멈출 생각을 않고 흘러내렸다. 어쩌면 피부 안쪽 깊숙한 곳의 근육까지 손상을 입었을지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처음 발휘하는 신력을 무사히 사용해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망설일 겨를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이 테이시는 아픔을 참아 내기 위해 연신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에시엘은 조심스럽게 테이시의 상처 부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 닿는 피범벅이 된 다리가 자못 뜨거웠다.

차분히 눈을 감아 정신을 집중하려는 찰나, 불현듯 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서슴없이 인격 모독을 하는 왕비의 목소리 뒤로 따라붙곤 했던 탄식 섞인 낮은 음성이었다.

“신력이나 마력이라도 있으면 어디 팔아먹기라도 했지……. 저 비루한 계집애는 쓸모가 없어! 쯧.”

간혹 신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식을 물건처럼 거래하는 일은 암암리에 계속해서 이뤄지던 일이었다. 주로 가난한 집에서 많이 행해지는 편이었는데, 신력이 귀한 만큼 아무 때나 쓸 수 없었기에 생겨난 비합법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돈 많은 이들은 신전이 아직 찾아내지 못한, 신력을 가진 어린아이를 물건처럼 사들이곤 했다. 그렇게 팔려 간 아이들의 운명은 하나였다.

자신을 사 간 곳의 외딴 방에 갇혀 죽는 날까지 치유하는 기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신력을 여태껏 밝히지 않은 이유였다.

“…….”

돌연 에시엘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낮게 울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자꾸만 머릿속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느낀 테이시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지며 얼굴엔 걱정이 서렸다. 그는 곧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너 왜 그래.”

하나 혼란에 빠진 에시엘에겐 그 목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꾹 깨물었던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는 그녀의 입술에 서서히 피가 배어 나왔다.

“피 나잖아!”

이를 발견한 테이시가 자신의 옷소매로 에시엘의 피가 맺힌 입술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피 칠갑이 된 본인의 다리보다 자신을 챙기는 손길에 왜인지 모를 안도감이라도 느꼈는지 떨리던 그녀의 몸이 점차 평정을 찾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상처 부위에 천천히 뻗곤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 안을 돌고 있는 기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냐니까? 너 피 난다고!”

“…….”

테이시가 화를 내듯 크게 소리쳤음에도 에시엘은 대답도 없이 몰두하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그때였다. 상처 부위 위에 얹은 에시엘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냥 하얗다고만 설명할 수는 없는 빛이었다. 투명해 보이기도 하고, 여러 빛이 반사되어 오색찬란한 느낌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던 그 빛은 점차 크기를 키워 가며 커다란 구 모양으로 빛을 뿜어냈다.

“이게 뭐…….”

언성을 높이며 재차 소리치려던 테이시는 말을 잇지 못하곤 인상을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는 넋이 나간 듯 굳은 채로 그녀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던 통증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테이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급히 고개를 돌려 상처 부위를 바라봤다. 찬란한 빛 속에서 에시엘의 작은 손이 다 가려 내지 못한 깊게 베인 상처가 점차 아물어 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최후의 발광을 하듯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급히 시선을 피했다.

머지않아 눈부심이 사라졌다. 서서히 눈을 떠 보자 그의 다리는 처음부터 상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멀끔해져 있었다. 또, 아팠던 고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가 치유된 것이었다.

“너, 이게 뭐야?”

털썩―.

테이시의 시선이 닿기도 전에 에시엘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서히 자취를 감추던 빛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환각을 본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그가 에시엘의 몸을 붙들곤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거진 나무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둘뿐이었다.

“대체…….”

테이시의 멍한 음성이 공기 중에 홀연히 흩어졌다. 쓰러진 에시엘을 붙들고 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차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차 테이시의 머릿속을 장악했다. 곧 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코밑에 가져다 댄다.

따뜻하다고 하기엔 조금 뜨겁게 느껴지는 옅은 숨이 테이시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러자 그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테이시는 다시금 손을 움직여 그녀의 이마 위로 얹었다. 평소 따뜻한 제 손을 감안하더라도 에시엘의 체온은 무척 뜨거웠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테이시가 에시엘의 팔을 어깨에 걸치곤 그녀를 둘러업었다. 어떠한 영문인지 다리에 생긴 깊게 베인 상처의 흔적은 사라지고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움직일 때마다 몹시 미미한 통증이 느껴질 뿐이었다.

급히 저택을 향하려던 찰나, 눈에 들어오던 검도 대충 챙긴 테이시는 비탈진 흙길을 뛰다시피 내려갔다.

어쩐지 손에 닿는 아이의 체온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듯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더 조급해졌다.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도통 모르겠으나, 테이시에겐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윽고 저택의 정원을 지나자 대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이시는 이를 꽉 깨물며 남은 체력을 끌어 모았다.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테이시의 차림새는 성한 곳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에시엘을 부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가시와 나무의 잔가지에 긁힌 그의 옷이며 드러난 팔이 엉망이었다. 더욱이 살갗의 군데군데는 새빨간 피가 찔끔 보였다.

심지어는 칼집에 꽂혀 있는 검마저 제대로 끼워 넣지 않은 탓에 엉성한 모양새로 간신히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대문을 향해 갈 뿐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홀을 담당하던 시종들이 그들을 힐긋거리기 시작했다. 둘의 심상치 않은 행색 탓이었다. 몇몇 시종들이 서둘러 테이시 쪽으로 다가왔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롬포드가 있을 집무실이었다. 아직 어린 그가 도움을 청할 사람으론 아버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어딘가 이상한 상태의 에시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니 유난히 굳게 닫혀 있는 듯한 느낌의 집무실 문이 보였다. 테이시는 일념 하나로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르게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