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0화 (50/80)

50.

레고니스 가문의 저택이 떠들썩하게 뒤집혔다. 돌연 옷과 손, 다리 이곳저곳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나타났던 두 아이 때문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심지어 한 아이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니 난리가 날 만도 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인지……!”

저택 외부를 호위하는 기사단과 그 광경을 목격했던 시종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 들은 렌테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롬포드는 그 소식을 접하기가 무섭게 당장 신관을 부르라고 명을 내렸다. 분명 쉽게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자들임을 알 터인데도 그는 무척 단호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렌테는 놀라 허둥지둥하다가 체면을 겨우 지킨 듯한 걸음으로 2층의 방으로 부리나케 향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빠른 템포로 노크를 한 뒤 초조한 듯 문 앞을 서성였다.

“……들어오도록.”

이내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렌테가 거침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다급히 들어선 그곳은 에시엘의 방이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롬포드와 어쩐지 앉지 못하고 서 있는 테이시, 침대의 가운데 곤히 누워 있는 에시엘이 차례로 렌테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불안한 마음으로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는 사이, 메마른 핏자국이 여실히 남은 손으로 주먹을 질끈 쥐고 있는 테이시가 눈에 띄었다.

뜨거운 여름 태양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 낸 듯,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가득했다. 그에 젖은 머리칼 또한 가닥가닥 들러붙어 있었다.

차림새 또한 굉장히 만신창이였다. 바지의 잔뜩 찢어진 부위 근처로 묻어 있는 짙은 얼룩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했다.

렌테는 직접 마주한 소가주의 모습에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시선을 옮긴 곳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는 에시엘이 보였다.

피가 잔뜩 묻었다던 말과는 다르게 에시엘은 말끔한 차림새로 잠옷을 입고 있었다. 널찍한 침대 탓인지 아이는 더욱 가녀리게만 보였다. 어쩌면 에시엘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 때문인지도 몰랐다.

렌테가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아 냈다. 그리고 재빠른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롬포드가 앉아 있는 소파 뒤에서 멈췄다.

내쉬는 숨마저 죽이게 되는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가, 각하…….”

렌테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단번에 파악하기 힘든 상황임에도 선뜻 서두를 꺼내기 어려웠다.

렌테는 롬포드와 테이시를 살피려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만 가지 질문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관은.”

“그게, 어찌어찌 부르긴 했습니다만…….”

머뭇거리는 렌테의 목소리에 롬포드의 서늘한 눈빛이 잠시간 그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롬포드가 눈을 감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짙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운 탓인지 검붉은 눈동자가 더욱 시리게만 느껴졌다.

이내 고개를 돌린 롬포드의 시선이 테이시에게 향했다.

“그래서.”

“…….”

“이 애가 네 상처를 치료했다?”

적막을 깨는 롬포드의 음성이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심드렁한 투와 달리 소파 팔걸이에 올린 팔로 턱을 괴는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네.”

롬포드를 보며 망설임 없이 답하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흩어졌다. 짧은 대답 후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 테이시의 모습에 렌테가 괜스레 침을 꼴깍 삼켰다.

방 안에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침묵한 채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는 둘의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대공비의 죽음 이후에는 적게나마 있던 대화도 전부 사라진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상했어요.”

“…….”

회상하듯 멍하니 말문을 튼 테이시에게 롬포드의 시선이 닿았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뚜렷한 붉은색을 띠었다. 이어 테이시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가 눈을 감으니까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래.”

“정신을 차렸을 땐 아이가 쓰러지고 있었어요.”

롬포드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옅게 신음했다. 그는 턱을 괴던 팔을 거두곤 살짝 찡그린 탓에 희미한 주름이 생겨난 미간을 문질렀다.

곧이어 롬포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눈빛으로 침대에 곤히 누운 에시엘을 바라봤다.

“제가…… 검을 놓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에요.”

“검을 놓쳐?”

말을 되묻는 롬포드의 시선이 테이시의 다리로 향했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바지 위로 눈에 띄는 얼룩이 보였다. 더불어 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다리에도 메마른 핏자국이 가득했다.

다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잔뜩 엉망이 된 옷가지와 달리 테이시의 몸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실수였어요.”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테이시의 시선이 제 구두 앞코에 닿았다. 아무래도 혼이 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흙이 잔뜩 묻어 엉망진창이 된 구두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 같았다.

말소리가 잦아들자 또다시 찾아온 정적은 뜻하지 않은 어색함을 느끼게 했다. 테이시는 머릿속으로 롬포드와의 대화를 되새기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와 이토록 길게 대화한 적이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롬포드가 워낙 바쁜 탓에 마주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원인이 되진 않았다. 테이시는 페루딘과 비교했을 때도 롬포드와 유난히 대화가 적다 못해 없었다.

그 이유가 비단 대공비의 부재로 인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롬포드의 성격상 자식과의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탓도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짧은 대화조차도 새삼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테이시가 눈을 힐금거리며 롬포드를 훔쳐봤다. 그에겐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는 아버지였다.

“렌테.”

“예. 각하.”

“저 애에 대해 알아봐.”

고개를 갸우스름히 비튼 롬포드가 에시엘을 향해 턱짓했다. 흰 잠옷과 가슴께까지 덮인 새하얀 이불에 대비되듯 에시엘의 붉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옅은 숨을 내쉬는 그녀는 도통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렌테가 살풋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롬포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자리에 선 채로 침대에 누운 에시엘을 잠시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일렁이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곤 빠르게 방을 나섰다.

이제 방에는 에시엘과 테이시뿐이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본인의 행색을 살피는 그는 방을 나서려는 의지도, 어딘가에 앉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평소의 그였다면 완벽한 소가주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정하지 않은 차림새를 못 견뎌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진득하니 에시엘을 바라볼 뿐이었다.

테이시의 새빨간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듯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동자는 확실히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가만히 내버려 둔 팔 끝의 손에 여전히 메마른 핏자국이 가득했다. 이내 스르륵 눈을 감은 그가 핏자국이 가득한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

* * *

“어떻습니까?”

이곳저곳 에시엘의 상태를 살피다가 끝내 이마 위에 손을 얹는 신관을 보며 렌테가 물었다. 이에 신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창밖이 어슴푸레해진 지금까지도 그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이 넘은 시각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상태는 심각한 수준인지도 몰랐다.

침대와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롬포드는 턱을 괸 채 무심한 듯 예리한 시선으로 신관의 움직임을 좇았다. 신관이 방문했다던 소식에 하던 일도 제쳐 두고 이곳을 향한 것과는 달리,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는지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이내 에시엘의 이마에서 손을 거둔 신관이 렌테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차마 롬포드를 곁눈질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신전에도 그의 악명은 드높은 듯했다.

“매우 좋지 않은 겁니까?”

이어질 말을 기다리지 못한 렌테가 답을 재촉하듯 또다시 물었다. 그의 주인을 닮아 덤덤하면서도 명료한 질문이었다.

신관은 수차례 말할 듯 말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꾹 물었다. 곧 고개를 돌려 에시엘을 바라보는 신관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이더니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좋지 않다기보단…… 좋다고 하는 게 맞겠지요……? 하, 하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사그라들자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신관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롬포드는 흡사 열기가 이글거리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에 신관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곤 의식적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일단, 에시엘 님은 건강합니다. 금방 깨어날 겁니다. 다만…….”

또 한 번 뒷말을 흐리던 신관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에시엘 님께서 신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놀란 듯 되묻는 렌테의 목소리를 뒤덮을 만큼 묵직한 롬포드의 음성이 다급하게 이어졌다. 그는 어느새 무릎 위로 팔을 걸치곤 상체를 기울인 채였다. 좀 더 귀 기울여 듣겠다는 태도 같았다.

“말 그대로, 몸 안에서 신력이 느껴집니다.”

“이제 와서?”

롬포드는 단박에 날카로운 눈빛을 했다. 갑작스러운 신관의 말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여태껏 발견하지 못하던 것을 이제 와 알아차렸다는 점은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만했다.

“전에는 긴가민가한 정도라 말을 아꼈습니다만…….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주 분명합니다.”

“…….”

“좀 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에시엘 님은 신력을 잘 가다듬는다면 비범한 신관이 될 듯합니다.”

서두를 머뭇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느닷없는 말을 이어 가는 신관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물론 그도 감히 롬포드의 앞에서 목숨을 담보로 허황된 언사들을 늘어놓진 않을 터였다.

“신력이라? 하.”

진한 숨을 토해 내곤 매섭게 노려보던 시선을 거둔 롬포드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그라도 급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의연할 리 없었다. 롬포드는 자못 오랜만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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