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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1화 (51/80)

51.

큰 창을 통해 어스름한 새벽녘이 느껴졌다. 여름의 해는 어느 때보다도 일찍 떠오르며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그리고 널따란 침대의 가운데 뒤척이는 움직임이 있었다. 어렴풋이 꿈틀꿈틀하던 움직임이 일순간 잦아드는 것도 잠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누군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요란한 행동에 붉은색의 머리칼이 나부낀다. 번뜩 정신을 차린 에시엘이 큰 눈을 멍하니 끔벅였다.

익숙한 풍경의 방이었다. 분명 숲속에서 테이시의 다리를 치유해 주던 중이었건만,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깼군.”

적막함이 가득하던 공기의 흐름을 뒤바꾸듯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익숙한 음성에 에시엘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롬포드가 있었다. 이내 훑어보고 있던 옷장에 흥미를 잃었는지 무심히 문을 닫은 그가 천천히 걸어왔다.

차디찬 시선의 롬포드와 에시엘의 눈이 맞부딪혔다. 짧은 순간이나, 에시엘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흐름의 날 선 공기를 느꼈다. 긴장한 그녀는 결국 다급히 시선을 피하곤 애꿎은 이불을 움켜쥐고 말았다.

롬포드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정장 차림을 갖춘 채였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마주한 그는 왜인지 평소보다 더욱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추운가.”

읊조리듯 중얼거린 롬포드가 큰 창을 향해 다가갔다. 살짝 열린 틈을 통해 선선한 새벽 공기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창을 닫은 그가 삐딱하니 서서 에시엘을 바라봤다.

“가, 감사합니다.”

꽤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자 에시엘이 롬포드를 힐긋거리며 오물쪼물 입술을 움직여 답했다.

“다른 할 말은 없나.”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되묻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의미심장했다. 괜스레 눈치만 살피던 에시엘은 안타깝게도 단 0.1퍼센트의 실마리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당황한 탓에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게요…….”

“…….”

“제가 어떻게 방까지 온 거예요?”

에시엘은 결국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던 것을 물었다. 겁을 먹은 눈빛과 달리 꿋꿋이 내뱉는 질문에선 제법 당돌함까지 느껴졌다.

롬포드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팍 찡그렸다. 무언가 못마땅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겨우 그건가.”

“…….”

“언제까지 숨길 셈이지?”

“뭐, 뭘요?”

“신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순식간에 에시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력은 이 저택을 도망칠 때까지 뿐만 아니라, 도망치고 난 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던 능력이었다.

그 이유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볼모로 잡혀 와 왕국이 멸망해 결국 입적이 되긴 했으나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신은 신력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돈이 차고 넘치는 대공의 저택 어딘가에 갇혀 온종일 치유하는 기계가 되거나, 이름도 모르는 상인들에게 헐값에 팔려 가는 것.

‘발뺌해 볼까.’

천천히 고개를 떨구는 에시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애써 침착하려 손에 잡히는 새하얀 이불을 더욱 거세게 그러쥐었다. 그녀의 작은 머리통 속에 수백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 사실은요…….”

“신관이 말하길 뛰어난 신력을 가졌다더군.”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리며 냉소적인 태도로 말하는 롬포드의 모습에 에시엘은 다시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롬포드에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테이시를 위해 신력을 사용한 시점에서 조금은 각오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입술을 짓이기듯 깨문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밥만 축내는 식충이는 아니었군.”

조용한 방 안을 울리듯 잇따라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시엘의 몸이 점차 떨려 왔다. 감은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여태껏 떠올린 말이 들려올 것이라 예감할 뿐이었다.

“그래. 이제 어쩔 생각이지?”

짧은 정적 끝에 들려온 말은 예상과 다른 롬포드의 물음이었다. 심지어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사뭇 머뭇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에 놀란 에시엘이 조심스레 눈을 뜨곤 그를 바라봤다. 어느새 창가 가까이 다가간 그는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듯 창틀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손놀림이었다.

“네에……?”

“신전으로 갈 건가?”

그녀를 추궁하듯 날카롭고 집요한 질문과 상반되게 창밖을 응시하는 새빨간 눈동자는 불안함을 담은 채 이리저리 방황했다. 하나, 그녀가 롬포드의 깊은 속내까진 눈치챌 수 없었다.

“아, 아니요. 제가 왜 신전을…….”

“그래. 저택을 떠나 그곳으로 가 봤자 사고만 치고 다닐 테지.”

이윽고 창틀 위에서 반복되던 소음이 멈춘다. 몸을 돌려 에시엘을 바라보는 롬포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생겨났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물론 그녀는 그 웃음의 의미 또한 알아챌 수 없었다.

“……네?”

“그걸 신관들이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고. 그래, 그러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게 좋겠지?”

“네? 그게…….”

“그만. 지금은 좀 더 자는 것이 좋겠군.”

롬포드는 더 듣지 않겠다는 듯 단박에 말을 끊어 냈다. 그리고 품 안의 시계를 꺼내어 보곤 에시엘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런 그에게서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방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듯했다.

* * *

“각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롬포드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던 렌테가 제법 들뜬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이제 막 아이의 방에서 나온 그의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

“진짜 복덩이가 맞을 줄이야……. 정말 놀랍습니다.”

대꾸가 없음에도 렌테는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제가 받은 감동을 계속해서 드러냈다. 물론 롬포드의 기분이 좋아 보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역시 각하는 선견지명이 뛰어나십니다. 어떻게 그런 선구안까지 갖추셨는지…….”

“…….”

그런데 줄곧 듣기만 하던 롬포드가 돌연 걸음을 멈춰 섰다. 정면을 주시하던 시선을 거두곤 느릿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렌테를 바라본다. 그의 낯에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냉철함이 가득했다.

“알아보라고 했던 건.”

“공식 석상 같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길 꺼렸다는 것 말곤…… 큰 특이점은 없습니다.”

“그렇군.”

롬포드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평소처럼 조금 빠른 듯한 속도였다.

그 뒤를 따르던 렌테가 주의를 끌듯 인위적으로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못 조심스러운 음성이었다.

“큼, 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뭘 말이지?”

“아이…… 말입니다.”

걷는 속도가 점차 잦아든 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예? 그 아이는 신력을…….”

“뭐가 됐든, 달라지는 건 없어. 그 아이는 이곳에서 전처럼 지낸다.”

이에 놀란 렌테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롬포드의 성격을 잘 아는 그로선 영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아이의 능력으로 어떠한 이득도 취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살풋 미간을 찌푸린 렌테가 고개를 내젓곤 다시금 롬포드의 뒤를 따랐다.

* * *

책장과 데스크, 간이 테이블과 소파, 화분 등의 갖가지 것으로 빼곡히 들어찬 어느 방 안. 이곳은 어찌 된 이유인지 하나 있는 창문마저 짙은 색의 커튼으로 가려 놓은 탓에 빛이 들지 않았다.

창이 살짝 열려 있는지, 커튼이 쳐진 곳의 틈새에서 선선한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그러자 큰 책상의 뒤쪽에 놓인 장깃대에 걸린 갈색 천이 너울거렸다.

노란 술이 잔뜩 달린 천이 흔들릴 때마다 그 사이로 갈색 천에 새겨진 박쥐가 날개를 길게 펼친 채 비행하는 듯한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 거침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역시……. 역시…….”

혼잣말을 되뇌는 남자는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큰 책상 뒤에 놓인 의자에 다가가 신경질적으로 앉았다.

여기는 피온 가문 르베이너스 공작의 집무실로, 바로 이 남자가 이곳의 주인이었다. 황갈색 머리칼과 고동색 눈동자를 가졌으며 다소 우락부락한 인상을 가진 그는 피부마저도 검게 그을린 듯 갈색 빛을 띠었다.

뒤이어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공작을 뒤따라온 듯한 남자가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온갖 서류 더미를 품에 안은 채 콧대에서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간신히 추켜올렸다. 키가 작은 그로선 공작을 쫓기 위해 걸음을 더욱 재촉했을 터였다.

“하……. 하하…….”

르베이너스 공작은 마른세수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얼빠진 웃음을 토해 냈다. 이내 팔짱을 낀 상태로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좋아. 캐러드? 보고해.”

“예!”

책상의 앞에 서서 떨어지려는 서류를 재차 고쳐 안은 남자가 우렁차게 답했다. 조금은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는 공작의 비서인 캐러드였다.

캐러드는 들고 있던 서류를 한참 뒤적거린 후에야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종이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공중에서 팔랑거리는가 싶더니, 곧 책상 위에 놓여 르베이너스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신력이 확실하답니다.”

사뭇 비장하게 내뱉는 캐러드의 말을 뒤로한 채 종이를 집어 든 르베이너스가 빠르게 글씨를 읽어 내렸다.

르베이너스 피온. 그는 베르게일 공작을 주축으로 하던 대공의 반대 세력 중 한 사람이었다. 베르게일 공작이 황제에게 내쳐진 뒤로 세력이 와해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아쉬워한 사람도 이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대공을 무너트리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그는 롬포드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실마리를 하나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롬포드가 느닷없이 잡아 왔던 소왕국의 어린 볼모였다. 르베이너스는 이러한 단서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뒤쫓으며 대공의 작은 허점이라도 찾고자 애를 써 왔다.

“역시 그 살쾡이 같은 대공이 그런 애송이를 그냥 입양했을 리 없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 어쩌나……. 이런 걸 알게 된 이상 순탄히 흘러가도록 가만 놔둘 순 없겠는데?”

비열한 웃음을 순식간에 지워 낸 르베이너스는 으름장을 놓듯 기세등등하게 들고 있던 종이를 단숨에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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