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2화 (52/80)

52.

“세상에……. 정말 대단하세요!”

에시엘의 조그만 손을 마사지해 주던 라비아나가 행동을 멈추곤 그녀의 손을 덥석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라비아나의 눈동자엔 존경심이 가득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저택에는 이미 에시엘에 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별 볼 일 없던 어린아이에게서 신력이 발견됐다는 것만으로도 저택 내 사용인들의 입에 수차례 오르내리기 충분했다.

물론 마카이른 제국에서 신력이 영험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탓도 한몫했지만, 에시엘에게 있었던 지금까지의 내력이 소문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신력이라니, 엄청 굉장하잖아요!”

“그, 그런가?”

계속해서 호들갑을 떠는 라비아나와 달리 당사자인 에시엘은 그녀의 말에 얼떨떨하게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뛰어난 신력을 가졌다는 말을 롬포드의 입을 통해 듣긴 했으나 아직까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미미하던 능력이 달라질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동안 이런 대단한 분을 직접 마주했다니……. 저는 그것도 몰라뵈고…….”

눈을 빛내던 라비아나는 이내 지난날을 회상하듯 고개를 숙이곤 부여잡은 아이의 손을 응시했다. 이에 괜스레 멋쩍어진 에시엘이 슬그머니 손을 빼내어 볼을 긁적였다.

“아하하……. 호, 혹시 대공님께선 뭐라고 하셨어?”

“주인님께서요? 흐음, 글쎄요…….”

라비아나가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에시엘이 괜스레 생겨나는 긴장감을 가라앉히려 살포시 이불을 쥐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한층 차분히 빛났다.

하지만 라비아나의 말은 쉽사리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에시엘의 머릿속엔 불길한 생각만이 들어차고 있었다.

‘이제 방에 갇혀서 치유하는 기계가 되는 걸까?’

지난날, 이곳에 머무르라던 대공의 말대로라면 그것이 가장 유력한 제 미래가 될 터였다. 에시엘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와 동시에 말아 쥐었던 손도 찬찬히 펴냈다. 맘속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나니 어쩐지 한결 편안한 것인지도 몰랐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

기억을 더듬는 듯한 라비아나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이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는 모양이었다.

“아! 깨어난 후에도 극진히 간호하라고 하셨었네요.”

“어엉?”

해맑은 음성이 연달아 들려오자 에시엘은 순간 눈을 번뜩 떴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미소 짓는 라비아나의 얼굴이 보였다. 에시엘이 그저 커다래진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때, 다정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그럼 다시 마사지해 드릴게요.”

라비아나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조심스레 에시엘의 손을 끌어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온기가 작은 손 곳곳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멍하니 느끼던 에시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 이대로 지내는 건가?’

실로 라비아나의 표정, 말투,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든 곧 내칠 사람을 소중히 대하라고 명하진 않을 터였다.

만약 롬포드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극악무도하기로는 누구보다도 정평이 나 있는 그였으므로, 헐값에 팔기는커녕 당장 내다 버리라 명해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손에 닿는 라비아나의 온기는 에시엘에게 더욱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온종일 치유만 하는 기계가 되지 않아도, 내쫓기듯 헐값에 팔려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똑똑―.

잠깐의 쉼을 두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내 멀끔한 차림새의 테이시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한 손엔 파란색 끈으로 엉성하게 묶인 하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일전에 에시엘이 라비아나와 함께 정원 뒤쪽에서 보았던 들꽃과 같은 종류의 꽃이 수두룩한 그것은, 마치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테이시……?”

그는 평상시처럼 무심한 표정을 한 채 에시엘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는 내내 에시엘을 온전히 바라보는 붉은 시선 속에 담긴 의미를 그녀로선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에시엘이 자리한 침대의 가까이 왔을 때까지도 테이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라비아나가 다급히 인사를 건네도 대답 없이, 그저 평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에시엘을 가만 바라보다가 슬며시 꽃다발을 건넸다.

“그날 고마웠어.”

“어, 어?”

“덕분에 멀쩡해.”

살가운 듯 무미건조한 말과 함께 내밀어진 꽃을 얼결에 받아 든 에시엘은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제가 알고, 느끼고 있는 바로는 분명 자신의 신력은 무척 미약한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누군가를 치유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비범한 능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롬포드는 자신에게 뛰어나다는 말을 전했다. 심지어 눈앞에 보이는 테이시의 다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너무나 온전하기만 했다. 만일 신관을 불러 치유를 했다면 그가 굳이 들꽃을 들고 찾아와 제게 감사 인사를 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들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특별한 향기를 풍기지 않는 들꽃은 마치 조화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에시엘이 의문을 품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희미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성년이 되기 전에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제대로 발현시키지 못해 자연히 소멸되는 탓이 크기 때문이다.

에시엘 또한 그와 같은 부류였다. 그렇기에 그것을 빌미로 신관들의 눈에 들어 소왕국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인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희미하게 느껴져 간신히 끌어내야 했던 신력도 제법 선명해져 마치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쉬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두통이 차츰 퍼져 나가던 찰나, 불현듯 옛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페루딘과 새총 놀이를 하다가 느닷없이 나무를 쓰러트렸던 날. 그날의 난데없던 힘도 신력과 관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다. 에시엘은 잘 다듬어진 들꽃의 줄기를 매만지며 잡념들을 애써 정리했다.

사실, 별안간 에시엘이 사용한 두 차례의 난데없는 능력에 숨겨진 진실은 오직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저 동그랗고 작기만 한 사과로 인해 신력이 증폭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꿈에도 몰랐다.

“나도 고마워! 나, 이 꽃 좋아하거든.”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해맑게 웃음 지은 에시엘이 테이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름 바람결에 살랑이는 들꽃을 닮은 듯 무척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테이시는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가 일순 고개를 돌리곤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 * *

현 마카이른 제국을 가장 떠들썩하게 뒤흔드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단 하나뿐인 대공가에 입적된 소왕국의 어린 볼모가 신력을 가졌다는 것. 심지어 그 신력이 유능한 정도를 뛰어넘어 몹시 비범하여 대공가의 정식 치유자가 되었다는 것.

본디 소문이란 점점 살을 덧붙이며 퍼지기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실은 중요치 않은 듯 갈수록 과장하며 거짓을 부풀리는 데에만 열광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암암리에 퍼지고 퍼진 그것의 크기는 점차 손쓸 새 없이 커졌고 파다해졌다. 그러다 결국엔 신전까지 도달하기 이르렀다.

한껏 과장된 소문이 롬포드의 귀에 들어갔을 시기도, 신전 사람들이 대공가에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레고니스 가문의 저택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즐비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그들은 표정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코끝까지 모자를 덮어쓴 탓에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내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발을 내디뎠다. 그 자는 저택의 대문을 지키던 호위 기사들의 저지에도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끝끝내 저택의 문 앞까지 당도했다.

레고니스 가문의 기사단은 제국에 명성을 떨친 대공의 수하들인 만큼 내로라하는 실력을 갖춘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갑작스레 들이닥친 외부인에게 쉽사리 칼을 들이밀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신전에서부터 이곳을 찾아온 신관들이기 때문이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허락이 있기 전까진 안 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기사단 역시 지금과는 다르게 신관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제국을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롬포드에게 좋지 않은 상황임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아이의 신력을 숨기려 했는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였다. 어찌 됐건 능력이 있는 아이를 두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기에 본인의 이익만을 취하려 했다는 의심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는 신관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도, 내칠 수도 없는 상황에 그저 굳세게 제 본분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하던 그때였다. 약한 덜컹 소리와 함께 쇠 마찰음이 울리더니 천천히 저택의 문이 열렸다.

“이런―. 실례가 많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저희가 찾아온 이유를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모습을 드러낸 렌테는 신관들을 발견하고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침착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바로 앞에 선 신관은 지위가 그리 높지 않은지 모자에 새파란 줄 세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어 렌테의 손짓에 문 앞을 막아서던 기사가 슬그머니 옆으로 물러났다.

렌테는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제아무리 그라도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에시엘에게 발현된 신력은 갑작스러웠고, 소문 역시도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빠르게 퍼져 나갔으니 말이다.

곧 예리함이 서린 그의 눈빛이 신관을 향했고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국 유일의 대단한 대공가라도 신전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선 득 될 것이 없었다. 이내 한 차례 목을 가다듬은 그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도 신전을 향하려던 참이었습니다.”

“…….”

“들어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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