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레고니스 저택, 집무실 안.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찻잔에 붉은빛 홍차를 따라 내는 소리, 집사가 종이에 무언가를 기록하며 들려오는 빠르게 서걱거리는 소리 등.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적막과 달리 갖은 소음이 집무실을 메웠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짤막한 인사 후, 누구랄 것 없이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모자를 덮어써 얼굴을 가린 탓에 신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롬포드는 그런 신관을 정탐하듯 가만 응시할 뿐이었다.
찻잔에 가득 채워진 홍차에서는 김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흘끔 바라본 롬포드가 손으로 찻잔을 가리키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는 짐짓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드시죠.”
“…….”
하지만 신관은 자못 심상치 않은 기세로 저택을 찾아온 것과 다르게 어쩐지 행동을 망설였다. 신전 또한 대공가의 남다른 영향력을 무시할 순 없는 듯했다. 이내 롬포드가 손을 뻗어 홍차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가 찻잔을 내려놓는 사이 신관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얼굴의 절반가량을 뒤덮고 있던 모자를 벗어 가려져 있던 얼굴이 단번에 드러나자 이를 본 롬포드의 빨간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급하게 찾아온 걸 보니 하실 말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서신도 없이 갑작스럽게 방문하여 죄송하지만, 신전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의연하게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검은색 긴 머리칼을 하나로 땋은 또랑또랑한 인상의 그녀는 신력을 가진 자들을 찾아다니는 업무를 담당하는 신관 중 하나인 레일라였다.
레일라에겐 악명 높은 소문의 대공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꿰뚫어 보는 듯한 매서운 눈빛은 소름이 끼치도록 새빨간 핏빛이었기에 그녀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두려움에 물들어 세차게 뛰는 심장을 다잡아야만 했다.
“그럼, 피차 바쁜 듯하니 본론부터 이야기할까 합니다.”
“예……. 예?”
“긴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고개를 슬며시 갸우스름 기울인 채 말하는 롬포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그를 마주하는 레일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정리해 온 생각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헤집어지는 듯했다.
“좋습니다, 그럼…….”
똑똑―.
짤막한 노크 소리가 레일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롬포드가 문가를 향해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뒤이어 나타난 체격 좋은 기사단장 찰츠의 뒤로 작은 아이가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바로 에시엘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 롬포드의 뒤편에 선 찰츠와 달리 그녀는 방 안의 이들을 살피며 더는 들어오지 못한 채 쭈뼛대고 있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온 기사단장을 따라 얼떨결에 오게 된 집무실의 분위기는 언뜻 보아도 심상치 않았다. 대공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차림새로 보아 신관인 듯한데, 아마 지난날 그의 물음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
멀뚱히 서 있는 그녀에게 롬포드의 목소리가 닿았다. 본인의 옆자리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행동이 무심한 듯 살가웠다.
이를 느낀 렌테가 그의 모습을 힐끗 살피곤 시선을 거뒀다. 예전의 롬포드였다면 이런 배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탓이리라.
머지않아 마냥 눈치만 보고 있던 에시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한순간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은 괜스레 몸이 움츠러들게 했다.
“…….”
롬포드와 에시엘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던 레일라의 눈빛에 굳은 의지와 두려움이 공존했다. 그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 내려는 듯 숨을 크게 내뱉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신전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저, 저를요?”
큰 눈을 더욱 똥그랗게 뜨며 반사적으로 되묻는 에시엘과 상반되게 집무실 안엔 고요함이 흘렀다. 마치 모두가 예상한 상황인 것처럼 반박하는 사람도, 불응하는 사람도 없었다.
‘신전이라니, 설마…….’
희미하게 느껴지던 자신의 신력에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에시엘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것 같은 상황에 내심 기뻤다. 신관의 선언은 갑작스러웠으나 어쩌면 무시무시한 이곳을 벗어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눈앞의 신관과 롬포드가 신경전이라도 벌이듯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살풋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한 롬포드는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듯 말이다.
“끝인가.”
적막을 깨는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롬포드는 곧 손을 뻗어 뜨거운 김이 사그라든 홍차를 빠르게 들이켰다. 투박한 손길로 내려놓은 찻잔 속엔 채 걸러지지 않은 듯한 홍차의 침전물이 가라앉아 있었다.
“예?”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의 롬포드는 오싹할 만큼 단호했다. 한층 형형해진 그의 붉은 눈동자가 계속해서 레일라를 향했다.
“아, 안 된다니요? 대공,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인데,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린 그의 안면에 조소가 가득했다. 비열하다기보단 악랄함이 그득 느껴지는 모습에 레일라는 재차 정신을 다잡았다.
“신력을 가진 아이는 신전에서…….”
“저런, 이 아이는 이미 우리 가문의 일원입니다. 본인이 여기 남겠다고도 했고.”
“대공…….”
“당장 꺼져 달라 하고 싶은데, 그건 신관에게 무례를 범하는 말일 듯하군.”
의견을 굽히지 않는 롬포드는 신관의 방문이 거북하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또, 그는 신관이 에시엘을 순순히 데려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립하는 동안 흐르던 적막을 끝내려는 듯 레일라의 시선이 에시엘에게 닿았다. 마치 그녀의 의견을 묻는 듯했다.
“저, 저는…….”
에시엘은 롬포드와 눈앞의 신관을 번갈아 보며 답을 망설였다. 그토록 원하던 신전으로 갈 수 있는 기회였다. 말 한 마디면 자신은 이곳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무모하게 도망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문의 일원이라 칭하며 왜인지 자신이 이곳에 머무르길 바라는 듯한 대공의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에시엘로선 도무지 그의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차마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 채 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의 의중 또한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맞아요. 전 가문의 일원인걸요.”
“……그게 정말이니?”
“네에. 신전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걱정 서린 투로 묻는 레일라를 마주 보는 에시엘의 해맑은 미소가 어여쁘게 빛났다. 그제야 창을 바라보던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린 롬포드의 시선이 잠시간 에시엘에게 머물렀다.
* * *
“그래서, 어떻게 됐지?”
밤인지 낮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 두 인영의 어렴풋한 움직임이 보였다.
속삭이듯 가만가만 밀담을 나누는 그들은 르베이너스 공작과 그의 수하 캐러드였다. 집무실의 그들은 수상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어 흡사 암중공작을 벌이는 듯했다.
“그게…….”
“캐러드, 그 반응은 뭔가?”
대답을 망설이는 캐러드의 모습에 르베이너스 공작은 단번에 태세를 바꿨다. 순식간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면서도 소리만큼은 크게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는, 제법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였다.
“그, 그것이…….”
“내 복장이라도 터트릴 생각인가! 어서 얘기해!”
“대공이 저지했다고…… 합니다…….”
불길함이라도 예측한 것인지, 르베이너스가 계속해서 재촉하자 캐러드는 연신 그의 눈치를 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하나 안타깝게도 답을 듣고 난 그의 표정은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 저지?!”
“예, 예…….”
“그걸 그냥 내버려 뒀단 말이야!”
“어,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아이도 갈 생각이 없다고 했을뿐더러 정말 섬찟한 기세였다고…….”
불과 몇 분 전, 주의를 기울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버럭 고함을 지르는 르베이너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런 그를 말리기라도 하듯 뒤이어 덩달아 큰 소리를 내고 만 캐러드를 다시금 쏘아보는 공작의 눈초리엔 분노가 가득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르베이너스는 끝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제국 전역에 퍼졌던 소문이 신전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단 흥미로운 소문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공을 위해서는 발돋움이 필요했다. 대공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린 이들은 갖은 수를 이용해, 그것을 기어이 신전까지 전파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한 목적은 단 하나였다. 롬포드 대공을 무너트리는 것.
하지만 신전마저 어찌하지 못한 듯한 이 상황은 르베이너스 공작에게는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롬포드 대공이…… 저지했단 말이지…….”
손톱을 물어뜯던 행동을 멈춘 르베이너스는 곧 집무실 안을 빠르게 서성였다. 같은 말을 수없이 되뇌는 모습이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런 공작을 지켜보는 캐러드에게선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흥분한 그를 만류해야 할지 말지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이내 고민을 끝내고 입을 떼려던 찰나, 캐러드를 등진 채 서성이던 르베이너스의 움직임도 끝이 났다.
“그래, 좋아…….”
조용한 방 안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퍼졌다.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뱉은 르베이너스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 올리며 조소를 띠자 간사한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캐러드가 불안한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