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후…….”
빠르게 휘갈기던 만년필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롬포드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벌써 네 시간째 쉬지 않고 업무에 몰두하는 중이었지만 집무실엔 여전히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그득 들어차 있었다.
해마저 다 저물고 까만 하늘 높이 떠오른 달과 별이 조용히 빛나는,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그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눈을 스르륵 감으니 잊고 있던 피로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젠장.”
롬포드가 눈두덩이를 거칠게 비비며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렸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지며 곳곳으로 흩어졌다. 휴식을 즐길 여유 따위 없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다시금 만년필을 집어 드는 그의 시야에 문득 액자가 들어왔다. 훤한 집무실의 대들보라도 되듯 떡하니 자리를 잡은 그것이.
“하……. 그래, 웃기지도 않는군.”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과 다르게 롬포드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생겨나 있었다. 제국 내에서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살벌한 수식어들이 무색해지는 찰나였다. 하나 좀처럼 그와 어우러지기 어려운 감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롬포드는 만년필을 향해 뻗던 손을 거두곤 천천히 턱을 괬다. 그리고 커다란 액자 가운데 덩그러니 자리한 네잎클로버를 가만 바라봤다.
며칠 전 한바탕 벌어진 소동에 의해 저택이며 마카이른 제국이며, 이 일대가 떠들썩해진 일을 말하자면 입이 아팠다. 그 원인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황당무계한 내용의 소문이 퍼진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모두를 놀라게 했던 것엔 레고니스 가문에 입적된 어린아이의 선택이 큰 몫을 했다. 아이는 영험한 신관이 될 가능성을 분명히 가졌음에도 신전행을 마다하고 극악무도한 대공가에 머무르기를 선택했다.
“고작 풀때기에서 행운이라니.”
롬포드는 평소답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족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이 들 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미신이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는 조무래기의 장난 같은 말을 맹신하는 것은 저와 어울리지 않았다.
한데 그 조막만 한 아이가 준 풀잎을 어쩐지 버릴 수 없어 놔두려던 것이, 정신을 차렸을 땐 액자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진짜 복덩이가 맞을 줄이야……. 정말 놀랍습니다.”
렌테의 말을 복기하는 롬포드의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더니 그가 소리 없이 피식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까짓 풀에 담긴 미신을 믿는 아이가 퍽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허무맹랑한 미신에 그치지 않는 듯한 아이의 말에 조금이나마 믿음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괴고 있던 손으로 이내 턱을 느릿하게 매만지는 롬포드의 시선은 여전히 액자 속 네잎클로버를 향하고 있었다.
“렌테.”
롬포드가 목소리에 약간의 힘을 실어 이름을 부르자 곧 렌테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재킷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다가온 그가 롬포드를 향해 물었다. 평소 롬포드는 일과가 끝나기 전까진 오롯이 업무에만 집중하는 걸 알기에 갑작스레 호출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렌테로선 그저 제 주인을 위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렌테의 물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색이 바랜 토끼풀은 이곳과 묘하게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느낌 탓에 더욱 돋보이는 듯했다.
“저걸 어디서 구했을 것 같나?”
“예……?”
“토끼풀 말이야.”
멍하니 되묻는 렌테가 답답했는지 다소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롬포드가 검지로 액자 가운데를 가리켰다.
“그, 글쎄요. 정원의 풀 속이라도 찾아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
렌테가 나름 모범 답안이라 생각하며 건넨 말에도 찌푸려진 그의 낯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위적으로 옅은 한숨을 뱉어 내며 고뇌도 함께 내보내는 듯했다. 렌테로선 기껏해야 토끼풀 하나인데 무얼 그리 신경 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롬포드가 액자에서 시선을 거두고 돌아앉았다. 책상 앞에 서 있는 렌테를 바라보는 눈빛이 자못 강경해 보였다. 마치 중대한 업무라도 내릴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하지.”
“뭘…… 말입니까?”
렌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주름이 가득 자리한 그의 목울대가 눈에 띄게 울렁였다. 야심한 시각에 비장하게 운을 떼는 롬포드의 모습에 절로 긴장감이 생겨났다.
“이것과 같은 토끼풀이어야 해.”
“토, 토끼풀을…… 설마…….”
“당장 기사들을 시켜 영지 내의 것들을 빠짐없이 찾아내.”
적안을 매섭게 빛낸 롬포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중대한 업무의 실체를 알게 된 렌테는 당황함에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도, 커다란 액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네잎클로버의 형태를 기억하려 애썼다. 아무렴 주인의 명령을 어길 순 없는 법이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롬포드가 말하는 당장이라 함은,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는 것 정도였다.
* * *
똑똑―.
경쾌하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에시엘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느덧 익숙해진 이 소리는 대상이 누군지 알 수 없음에도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어느덧 소왕국에서의 외로웠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누구세요!”
소리치며 달려 나간 에시엘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상황 파악을 하는 동안 3초가량의 정적이 흘렀다.
“세상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린 작은 입술은 다물어지지 못한 채 살짝 벌어져 있었다.
얼마 전 에시엘은 정원 뒤쪽의 들판에서 토끼풀을 찾아내 한참을 머뭇거리다 롬포드에게 준 적이 있었다. 그에게 행운을 주었으니 자신에게 더 나쁜 상황이 찾아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건넸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오늘, 집사가 예상치도 못했던 선물을 들고 왔다. 에시엘은 제 덩치만 한 그것을 낑낑대며 겨우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포장지를 뜯자 나타난 것은 거대한 액자였다.
“이, 이걸 다 찾은 거예요?!”
액자의 크기만큼이나 그것에 담긴 내용물도 범상치는 않았다.
‘네잎클로버의 씨를 말려 버린 건가……?’
벙찐 얼굴의 에시엘이 눈을 끔벅거리며 응시하는 곳엔, 굉장히 넓은 면적을 토끼풀로 여백 없이 가득 메운 액자가 있었다. 이제 막 싹을 틔운 듯한 작은 풀부터 엄지손톱만큼 제법 큰 크기의 풀까지. 다양한 크기의 네잎클로버는 마치 온 세상의 것을 다 수집해 온 듯했다.
커다란 액자를 어찌하지 못한 채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각하께서 에시엘 님께 행운을 몰아주시겠답니다.”
사뭇 비장한 투로 내용을 전하는 렌테의 모습을 보자니 어디선가 롬포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용건만 간단히 전한 그는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 그녀에게서 액자를 거뜬히 뺏어 들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그게…….”
“이쪽에 두는 것이 좋겠군요. 에시엘 님의 방과 아주 잘 어울립니다.”
방을 둘러보던 렌테는 침대의 맞은편 벽에 다가가 액자를 세워 뒀다. 마치 자고 일어날 때마다 액자를 마주할 수 있게끔 의도한 것 같았다. 에시엘을 돌아보며 서글서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렌테에게선 왜인지 전과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 벽에 걸어 두라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감사합니다.”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건네는 렌테를 따라 에시엘이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이내 그는 빠른 속도로 방을 나섰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것만 같았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행동이 단연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렌테가 떠난 문가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액자의 앞에 선 에시엘이 찬찬히 그것을 훑어보았다.
“하핫.”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따라 에시엘의 얼굴에 분홍빛 생기가 돌았다. 평생의 행운을 한데 모아 놓았다 해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액자 앞에 쪼그려 앉은 그녀가 검지를 뻗어 토끼풀을 하나하나 짚어 내던 찰나였다.
렌테가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순간, 살짝 열린 문틈으로 다급한 구두 굽 소리와 언성을 높여 옥신각신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 다가오던 탓인지 희미했으나 점차 볼륨을 키우듯 선명해져 갔다. 말다툼을 하는 듯한 그들은 무언가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양인지 가까워질수록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문이 확 젖혀지며 기세 좋게 페루딘이 등장했다. 그 뒤를 따라 허둥지둥 서둘러 들어오는 그의 수하도 함께였다.
“야, 에시엘!”
씩씩대는 페루딘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어찌 된 까닭인지 페루딘의 수하는 그를 저지하려는 듯 보였지만 차마 말리진 못하겠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진짜야?!”
“뭐, 뭐가?”
뜬금없이 본론만 내뱉는 탓에 페루딘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세에 눌려 당황한 에시엘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페루딘의 뒤에 선 수하는 불안한 눈초리로 에시엘과 그를 번갈아 봤다. 그러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움직임으로 연신 도리질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수하의 행동은 무척 수상해 보였다. 게다가 화가 난 듯한 페루딘의 모습을 미루어 보아 섣불리 무어라 답할 수도 없었다. 에시엘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나랑 놀기 싫다며! 대체 왜!”
우렁차게 소리친 페루딘이 입술을 꾹 물었다. 에시엘을 노려보듯 바라보는 그의 눈망울이 제법 촉촉해 보였다.
“뭐어?”
에시엘이 말꼬리를 늘이며 되물었다. 급기야 페루딘의 눈 앞머리에 맺혀진 눈물방울은 톡 건드리면 또르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수하가 결국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