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상황의 전말은 이러했다.
수하는 페루딘이 평소 에시엘에게 만큼은 남다른 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을 눈치챈 차였다. 뻔질나게 에시엘을 찾아다니는 것이며 말끝마다 그녀의 상황을 궁금해하는 이유를 아이는 그저 괴롭히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마음이었다. 수하는 늘 페루딘과 함께 다니기에 오히려 그의 사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업을 듣기 싫다며 막무가내로 떼를 쓰던 페루딘에게 수하는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었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와 같은 속설처럼, 바로 에시엘을 무기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리한 거짓말이었던 그 강수로 인해 지금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점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자초지종을 듣고 난 에시엘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았다. 지금이야말로 막무가내 도련님을 교육할 수 있는 적절한 때였다.
그녀가 페루딘의 수하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름하여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작전이라 할 수 있겠다.
“맞아! 공부 안 하면 같이 안 놀 거라고 했는데?”
에시엘은 거짓말로 인해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최대한 뻔뻔스럽게, 또 제법 심드렁한 투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보였다.
그러곤 답이 들려오지 않는 페루딘 쪽을 향해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상황을 설명하느라 벌게진 낯이 된 그의 눈망울엔 여전히 물기가 어린 채였다. 마치 고양이를 연상케 하듯 살짝 올라갔던 눈꼬리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져 보이기도 했다.
“저, 정말로?”
“으응. 공부는 중요하니까…….”
방을 들어설 때와는 다르게 풀이 죽어 목소리가 작아진 페루딘은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황급히 거둔 에시엘은 누군가 뾰족한 물건으로 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 때문인지,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옷장을 만지작거리는 등 의식적으로 딴짓을 하는 중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눈에 띄지 않게 힐끔거리며 몰래 훔쳐본 그는 여전히 울상인 채였다.
“도련님. 이제 그만 돌아가서 책을 펼쳐야겠지요?”
“씨이…….”
수하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곤 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열곤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제 페루딘으로선 꼼짝없이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해야 했다. 에시엘과 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왜인지 모르게 상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작은 어깨가 눈꼬리만큼이나 축 처졌다. 이내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조금씩 문을 향하는 아이는 전에 없던 가여운 행색이었다.
“저, 저기요!”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시엘이 결국 수하를 불러 세웠다. 이에 느릿하던 페루딘의 걸음도 우뚝 멈췄다.
“예? 저 말입니까?”
“공부가 중요하지만…… 원래 뭐든 내일부터잖아요?”
“예……?”
에시엘과 페루딘을 번갈아 보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수하의 불안한 눈빛이 끝내 에시엘에게 닿았다. 마치 그녀의 아리송한 말에 해답이라도 요구하는 듯했다.
멈춰 선 페루딘 또한 빠르게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반짝이는 빨간 눈동자에 무언가를 바라는 염원의 기운이 가득했다. 수업이 싫은 것인지 에시엘과의 시간을 기대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둘 다일지도 몰랐다.
“내일부터 해도 잘할 수 있잖아, 그치?”
“그럼 당연하지!”
숨 쉴 틈도 없이 답한 그가 단숨에 에시엘의 옆까지 달려왔다. 그녀를 보며 늘 그렇듯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짓는 입가에 이제 막 자라나는 송곳니가 빼꼼히 보였다.
에시엘은 그제야 좋지 못하던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언제부터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울고 웃게 됐는지 가늠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라 자신에게 의지하는 이유가 충분히 짐작은 되었다.
페루딘에게 에시엘은 놀이 상대를 해 주는 시종들과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존재일 것이다. 하나 그가 아직 그것을 분명하게 명명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울러 지금은 허구한 날 땡땡이 칠 생각만 하는 아이에 불과했지만 훗날 그가 테이시와 더불어 제국을 제패하는 뛰어난 이가 된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기에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 그게 무슨…….”
불안한 눈빛으로 말을 더듬는 수하의 목소리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선 갑작스럽게 판도가 바뀌어 버린 상황이 당황스러울 터였다.
“안녀엉, 이따 봐!”
“오늘까지만 놀게요!”
말꼬리를 늘이며 인사하는 페루딘과 에시엘이 수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퍽 얄미워 보였으나 수하는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엔 페루딘의 손길에 의해 강제로 밀려 방에서 쫓겨났다.
“자! ……어라?”
허리춤에 손을 얹고 에시엘을 돌아본 페루딘의 시선이 문득 그녀의 뒤편에 머물렀다. 그의 눈에 담긴 건 렌테가 롬포드의 선물이라며 가져왔던 액자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가 액자를 빤히 바라봤다.
“큭큭, 이게 뭐냐? 잡초를 왜 액자에 넣었어?”
“잡초 아니거든? 네잎클로버야! 대공님이 선물해…….”
“뭐?! 아버지가?”
다급하게 되묻는 아이의 외침이 우렁찼다. 제 목소리에 놀랐는지 입을 틀어막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페루딘의 새빨간 눈이 잔뜩 확장되어 있었다.
“어어? 으응.”
“왜?!”
“음, 그게…….”
에시엘은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고민하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왜라는 물음에 이렇다 답할 수 없었다. 행운을 바라고 준 것 같긴 했으나 딱히 명쾌한 해답은 아닌 느낌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극악무도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롬포드에게서 호의를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자신은 그 호의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체 왜 그랬지……?’
사그라지지 않는 의아함에 에시엘의 작은 머리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결론을 내린 그녀가 고개를 가뿐하게 끄덕였다. 몹시 긍정적인 태도였다.
혹은 대공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왕성에서와 달리 따뜻하고 친절한 사용인들은 학대의 기억을 왜곡시킬 만큼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곤 했으니까.
“나도!”
“……엉?”
“나도 너한테 선물해 줄래!”
“어엉?”
복잡한 상념을 헤치듯 당돌한 페루딘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대뜸 장난스레 내뱉는 포부와 달리 그의 눈빛엔 굳은 의지가 비쳤다.
“가자, 잡초 찾으러!”
* * *
벌써 세 시간째였다. 하루를 오랫동안 비추는 여름의 태양도 어느새 저물려는 듯 슬그머니 기울고 있었다. 초저녁이 된 시각임에도 풀밭에 쪼그려 앉은 두 아이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으아, 나 더는 못 해!”
아니, 이젠 한 아이였다.
에시엘은 자신의 매무새를 신경 쓸 여유도 없는지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피가 몰려 저릿하던 다리에 혈액 순환이 되자 조금씩 얼얼함이 느껴졌다. 기운 빠진 표정의 그녀가 자그만 손으로 천천히 다리를 주물렀다.
페루딘이 제게 선물해 준다던 것을 얼떨결에 같이 찾아 나섰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에시엘은 고개를 들곤 시선을 옮겼다. 그녀 가까이 자리한 페루딘의 뒷모습에 의욕 가득한 불길이 이글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이 무색할 만큼 성과가 없었다. 세 시간이 지나도록 네잎클로버는 꽁무니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유인즉, 지난밤 기사들을 시켜 그것을 모두 싹 쓸어버린 롬포드 때문이었다.
“왜……. 대체 왜…….”
쪼그려 앉아 있던 페루딘이 제 노란 머리칼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숨겨진 사연을 알 리가 없는 그는 자신을 자책하는 듯했다.
비탄에 젖어 고개를 푹 수그린 페루딘의 동그란 뒤통수가 점차 땅을 향해 처박히고 있었다. 고작 풀 따위를 찾지 못하는 자신을 한심하게 느끼는지도 몰랐다.
“이건 말도 안 돼……. 겨우 잡초인 주제에……!”
“나 선물 안 받아도 괜찮아! 우, 우리 숨바꼭질할까?”
흙이 묻은 옷을 대충 털어 낸 에시엘은 서둘러 페루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고개를 기울여 어깨 너머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 했지만 잔뜩 숙인 낯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화제를 돌리려 제안한 놀이에도 그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끄응……. 큰일 났네.’
오히려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앙다문 입술을 꾹 깨문 에시엘이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그토록 아이의 승부욕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여태껏 본 적 없는 심통 난 상태의 그를 달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불평불만이 섞인 중얼거림이 서서히 잦아들자 그녀가 머뭇거리느라 달싹이던 입술을 움직였다.
“저기, 페루딘…….”
그러던 그때, 페루딘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조금 느린 속도로 몸을 일으킨 그가 서서히 뒤를 돌았다. 금빛의 머리칼이 엉망으로 마구 헤집어진 모습은 절로 웃음을 자아냈지만 어딘가 이상한 그의 분위기에 가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때문에…….”
“너 신력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야?”
그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이와 더불어 한껏 매서워진 목소리는 에시엘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