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59화 (59/80)

59.

6년 후, 마카이른 제국력 303년. 어김없이 온화한 계절인 봄이 찾아왔다.

“에시엘 님! 아직까지 주무시면 어떡해요!”

다른 시녀들을 대동한 라비아나가 요란을 떨며 잰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커다란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확 젖히곤 문을 살짝 열었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껌껌한 새벽의 서늘한 공기가 천천히 흘러 들어왔다.

“으음…….”

라비아나의 야단법석에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에시엘이 잠투정을 하듯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봄이 찾아왔다곤 해도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의 공기는 아직 차갑게 느껴질 터였다.

“오늘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살짝 보이던 얼굴마저 모두 감춰 버린 그녀를 본 라비아나가 난감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리춤에 가만히 손을 얹은 행동에서 고민이 엿보이는 듯했다.

라비아나와 함께 찾아온 시녀들의 손에는 각기 다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큰 타월부터 붉은색 꽃잎이 가득 담긴 유리그릇과 향수, 그리고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얀 드레스였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곤 에시엘 가까이 다가가 처음 방을 들어섰을 때보다 더욱 큰 목소리와 몸짓으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에시엘 님! 큰일 났어요!”

“으응……?”

“큰일, 큰일이에요! 주인님께서…….”

“주인님……? 대, 대공님?!”

별안간 에시엘이 이불을 벌컥 젖히고 일어났다. 얼핏 보아도 자다 깬 모양새인 부스스한 머리칼 사이로 에시엘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법 젖살이 빠져 어린아이 티를 벗어났으나 여전히 앳된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롬포드를 칭하는 단어에 반사적으로 감응을 보인 듯했다.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에 대한 반응은 숨길 수 없었다. 라비아나는 허둥대는 그녀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물을 준비하셨어요.”

“엉……? 선물?”

“네, 목욕물도 준비 끝났답니다. 조금 서두르시는 게 어떨까요?”

“으응. 알겠어.”

에시엘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멍한 표정을 지워 냈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작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다가, 라비아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303년, 올해 봄에도 어김없이 황제가 주최하는 무도회가 열렸다. 귀족 자제들이 사교계에 첫발을 내디딜 데뷔탕트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구태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들도 어쩌면 이날만을 학수고대하는지도 몰랐다.

* * *

호화스러운 욕실, 가운데 놓인 커다란 욕조 안에 굽이치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몸을 담그고 있다.

그녀가 눈을 느릿하게 끔벅거렸다. 제 의지와는 다르게 또다시 졸음이 밀려드는 탓이었다. 분명 잠은 다 깼건만, 무척 이른 시간 때문인지 욕실의 후끈한 온기가 정신을 노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머지않아 라비아나가 손짓하자 주위에서 목욕 시중을 돕던 이 중 하나가 붉은 꽃잎이 가득한 유리그릇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리고 곧바로 욕조 안에 그것을 주저 없이 쏟아부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라비아나, 갑자기 이건 웬 꽃잎이야?”

커다란 욕조엔 이젠 수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꽃잎이 가득 메워졌다. 에시엘은 물 위를 동동 떠다니는 꽃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흡수되지 않은 채 표면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주인님께서 준비하신 장미꽃이에요. 잎을 따 내어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귀족 자제의 데뷔탕트 때 선물하는 것 중 대표적인 물품으로 붉은 장미꽃과 향수가 있었다. 보통은 주변의 친분 있는 귀족이 데뷔를 축하해 주며 가문 간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해 관습처럼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롬포드가 에시엘에게 선물을 줬다는 사실은 조금 남다른 의미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추론이나, 장남의 데뷔 때와 달리 선물을 준비한 약간의 특별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시엘이 지난 과거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예쁘다…….”

에시엘은 소왕국의 왕녀였긴 하나 그곳에선 갇혀 있다시피 지내 친분 있는 귀족도 없었다. 연고가 없는 아이를 염려해 더욱 신경 썼을 수도 있고 별다른 의미 없이 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붉은 장미 꽃잎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리는 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생겨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명령처럼 권하던 예절 교육과 사교댄스 연습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그것들을 의아하게 여겼지만 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훗날 자신의 데뷔탕트를 위한 롬포드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는 것을.

붉은 꽃잎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라비아나가 말을 이었다.

“에시엘 님, 놀라시긴 일러요. 장미꽃뿐만이 아니거든요.”

“뭐어? 그럼 다른 게 또 있어?”

“그럼요. 데뷔탕트에 향수와 아름다운 드레스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라비아나의 손짓이 향하는 곳에는 함께 찾아왔던 다른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향수와 드레스를 손에 든 채였다.

이내 라비아나는 향수를 시향할 수 있게 만들어 주려는 듯 공중에 분사해 향기를 퍼트렸다. 노곤한 기운이 가득하던 욕실에 향기로운 플로럴향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눈을 감은 채 향을 맡는 에시엘의 표정에 차차 분홍빛 기운이 스며들었다. 설레는 마음을 온전히 만끽하며 심호흡을 하는 사이, 또다시 라비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에시엘 님을 위한 것이에요.”

그녀가 시녀의 손에 들린 드레스를 펼쳐 보였다. 보석을 수놓지 않아 얼핏 단조로워 보일 법한 드레스에는 물결치는 프릴이 곳곳에 주름 잡혀 있었다. 찬란한 봄 햇살만큼이나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색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 * *

“이것, 참…….”

방 안에 혼자 남은 에시엘이 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며 유심히 살폈다.

반묶음 한 붉은 머리칼과 그곳에 가지런히 꽂힌 깃털 모양의 머리핀, 특유의 생기발랄함을 살린 옅은 화장, 마지막으론 대공이 선물했다던 드레스까지.

이내 에시엘은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자 움직임대로 바람을 타는 드레스 자락이 춤을 추듯 펄럭이며 플로럴향이 곳곳에 흩어졌다.

멈춰 선 뒤에도 거울에 비치는 행색을 천천히 훑어 내리는 그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생겨났다.

“너무 예쁘잖아?!”

들뜬 목소리가 방 안에 퍼지는 것도 잠시, 입가의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토록 누군가 자신을 정성껏 가꾸어 준 적은 처음이었다. 대공가에서 지낸 지 6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치장한 일은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거울 속 또 다른 모습에 낯섦이 가득할 텐데도 그녀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 늘 잊지 않고 지냈던 것이 떠오른 이유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늘이…….’

에시엘에겐 아직 해내지 못한 목표가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대공을 포함한 가문의 사람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잘 대해 주었으나, 그것만으론 이곳에 남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롬포드는 여전히 독살스러운 자였고, 그가 내일 당장 자신을 내친다 한들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 또한 여전했다.

에시엘로선 그런 조마조마한 생각들 때문에 제가 누리는 일상들이 불완전한 행복으로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불행하기 그지없었던 나날의 연장선이 되고 말 뿐이었다.

그렇기에 저택을 벗어날 틈이 주어진 오늘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더욱 욕심내기 전에 도망치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가 침대 옆 협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커트러리를 하나둘 손에 쥐었다.

‘그래. 충분치는 않지만…….’

달칵―.

그 순간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기미도 없이 갑작스레 들려온 문소리에 놀란 에시엘의 손에서 작은 티스푼 하나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댕그랑―.

대리석 바닥과 맞부딪힌 그것은 제법 큰 소음을 내며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떨어트린 것을 미처 주울 겨를도 없이 잽싸게 뒤돌아본 곳엔 어느새 훌쩍 커 버린 테이시가 서 있었다.

그는 평소 장식이 거의 없다시피 해 단정한 차림새와는 다르게 언뜻 눈길이 머무는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머리칼과 같은 색의 흑빛 정장에 붉은 눈의 뱀 문양이 있는 금빛 어깨 견장, 넥타이를 고정한 은빛 넥타이핀과 검은 용이 새겨진 은색 커프스는 단출하지만 제법 호화스러운 느낌을 줬다.

“테이시! 무, 무슨 일이야?”

손에 쥐고 있던 커트러리를 등 뒤로 숨긴 에시엘이 말했다.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목소리에선 자못 떨림이 느껴졌고, 제 의지와 다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기민한 테이시가 이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침착하자, 괜찮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무감하게만 보였던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워진 듯했다. 마치 잘 벼린 칼날을 겨누고 있다는 착각도 일었다. 의아함을 느낀 것인지 살짝 갸웃하는 고개를 보고 있자니 커트러리를 쥔 손에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뭐야.”

테이시의 시선이 둘 사이의 가운데쯤 놓인 티스푼을 향했다. 식사를 한 것도 아니거니와 이곳은 주방도 아니었다. 난데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식기와 더불어 긴장한 티가 역력한 에시엘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뭐, 뭐가?”

긴장감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한껏 경직된 에시엘이 그저 눈만 끔뻑이며 나름대로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했다. 등 뒤에 숨긴 손으론 나머지 커트러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꽉 그러쥐며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이내 테이시가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숙여서 바닥에 놓인 티스푼을 줍는 그의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 효과가 씐 비디오처럼 느릿하게 느껴졌다.

이를 보는 에시엘의 녹색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다. 당황한 나머지 그것을 뺏어 들 생각도 들지 않는 머릿속에선 비상 상황을 알리듯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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