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0화 (60/80)

60.

“아하하……. 그러게, 웬 걸까?!”

어느새 둘 사이도 반절 가까워져 있었다. 테이시의 손에 들린 티스푼을 보며 인위적인 웃음소리를 낸 에시엘이 되레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에 띄게 과장하며 말하는 목소리와 행동이 오히려 수상함을 가증시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색한 웃음기가 서서히 사그라든 그녀가 테이시와 티스푼을 번갈아 보며 골몰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황궁을 향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봤어. 손에서 떨어트린 거.”

테이시가 특유의 무뚝뚝한 투로 말하며 손에 든 것을 건넸다. 날카롭게만 느껴지던 눈빛은 언제 지워 낸 것인지, 지금으로선 그의 속내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늘 봐 오던 모습처럼 그저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뭘 하려던 거야?”

“으응? 그게…….”

하지만 여전히 허를 찌르는 질문에 에시엘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 헤매기 시작했다. 등 뒤로 감추고 있는, 제게 희망이 될 몇 개 되지 않는 커트러리의 무게가 다소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제 와 이것이 발각된다면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에시엘의 머릿속에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가 빠르게 손을 뻗어 티스푼을 낚아챘다. 뒤이어 배시시 해맑게 웃음 지으며 테이시의 눈앞으로 그것을 들이밀었다.

“이것 봐 봐.”

“…….”

“장식이 예쁘잖아!”

티스푼에는 사파이어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보석을 둘러싼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말처럼 예쁜 장식임은 틀림없었으나, 대답이 없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는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장식이 예뻐?”

에시엘의 말을 읊조리듯 되뇌는 테이시의 집요한 시선이 장식을 훑었다. 조그맣게 박힌 보석이며 새겨진 문양을 마치 모두 아로새기려는 듯이.

“으응. 잠깐만 보고 갖다 놓으려고 했어.”

그런 테이시와 티스푼을 또다시 번갈아 보는 에시엘의 머릿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 한 곳에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한 생각의 불씨를 꺼트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갖은 변명을 떠올리던 통에 복잡한 생각이 가득했지만, 끝끝내 내린 결론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답변도 구구한 핑계처럼 들릴 터였다.

‘혹시…….’

이내 그녀가 뻗었던 손을 빠르게 거뒀다. 어색한 미소를 띤 그 찰나, 마음 한편 늘 잊지 않고 지내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에시엘은 등 뒤로 감춘 커트러리 뭉텅이를 사뭇 비장하게 고쳐 쥐었다. 진녹색의 눈동자는 한결 견고해진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의 테이시라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에시엘을 가만 바라보는 검붉은 눈동자엔 냉한 기운과 더불어 예전과 다르게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공존하는 듯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그녀뿐만 아니라 테이시 또한 한층 성장한 것인지도 몰랐다. 거기엔 그간 테이시가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졌다는 사실이 동반되기도 했다.

그렇다. 지금의 그라면 이 저택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될 터였다. 무심한 성격이니만큼 제가 떠난다 한들 붙잡기는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할 테니까.

“테이시.”

에시엘의 부름에 대답 대신 그의 깊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

“싫어.”

“어어? 왜? 아, 아니, 뭔지도 모르잖아!”

단박에 거절 의사를 표하는 테이시에게선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에시엘이 숨 돌릴 새 없이 단숨에 내뱉은, 예상외의 단호한 답변은 오히려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순간 손의 힘이 풀린 그녀가 커트러리 뭉텅이를 떨어트릴 뻔했지만 다시금 고쳐 쥐며 힘을 실었다.

그럼에도 에시엘은 여전히 당혹감에 물들어 덧붙일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떠올리던 시나리오와는 완전히 다른 결론이었다.

“알아야 거절할 수 있는 건가?”

“…….”

“그럼 얘기해 봐. 들어는 줄 테니까.”

테이시는 그대로 뒤를 돌아 의자를 향했다. 저벅저벅 옮기는 걸음 역시도 조금의 망설임이 없었다. 에시엘은 그 뒷모습을 보며 괜스레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말이야…….”

어색하게 서두를 떼며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아까와 달리 사뭇 긴장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분위기 탓인지, 의자에 앉아 짐짓 삐딱한 자세로 저를 쳐다보는 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에시엘은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체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획하는 게 하나 있는데…….”

“…….”

“나 여기서 떠날 거야.”

그동안 테이시에게 공을 들였던 시간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디저트들을 함께 먹으며 나름의 신뢰를 쌓고, 검술을 배우며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지난날을 보냈다.

모든 것은 마음속 한편에 묻어 두었던 목표, 온전한 자신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테이시는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조력자로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지금의 그가 가진 권력은 물론이거니와 저의 어떠한 행동에도 무관심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느릿하지만 단호하게 내뱉은 에시엘의 말이 못 박히듯 방 안에 들이박혔다. 이와 동시에 확고한 의지를 담은 결연한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폭탄선언처럼 뱉어진 말에도 계속해서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그 탓에 극도의 긴장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분명 테이시라면 신경도 안 쓸 터인데, 어딘가 이상했다. 좀 전의 상황 때문인지 마치 거절 의사를 내비칠 것만 같은 모습은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

“떠나? 지금, 여기서 도망치겠다고?”

짧은 정적 뒤에 들려온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매우 냉랭했다. 살짝 찌푸려진 인상에서 그의 못마땅한 심정이 드러나는 듯했다.

“으응. 그런데 혼자선 어려워. 네 도움이 꼭 필요해.”

에시엘은 무척이나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면서도 할 말을 잊지 않았다. 그만큼 학수고대하며 간절히 기다려 온 세월 동안 테이시의 도움을 절실하게 원했다.

하지만 불안하게도 찡그려진 그의 인상은 펴질 줄 몰랐고, 오히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에시엘보다도 더욱 단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도망치게 도와줄 생각 없어.”

“……뭐?”

“그냥 이곳에서 지내.”

끝내 힘없이 흩어지는 그의 음성은 어쩐지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제 착각인지 아닌지 판가름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허튼소리 끝났으면 나갈 준비 해.”

“…….”

“오늘 네 보호자로 함께 갈 거니까.”

테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 없이 방을 나섰다. 에시엘이 허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이내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있어도 바뀌는 사실은 없을 터였다.

도통 테이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 터인데 왜인지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심중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예상치 못한 결과이긴 했으나 테이시가 이것저것 캐묻지 않은 게 어딘가 싶었다. 만일 도망의 이유라도 물어 솔직하게 답했다면 그것 또한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혼자서라도 이뤄 내야 해.”

에시엘이 입술을 오밀조밀 움직이며 굳건한 뜻을 조용히 내뱉었다. 그녀에게 플랜B는 없다. 도움받을 수 없다면 혼자의 힘으로라도 해내야 했다. 생각을 마친 작은 머리통에 두통이 이는 듯했다.

에시엘은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커트러리를 내보였다. 도피 자금으로 쓰이기엔 어림도 없을 개수에도 손에 쥔 쇳덩이는 몹시 무겁게만 느껴졌다.

* * *

테이시의 뒤를 따라 향한 대문 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에시엘의 드레스와 색을 맞추기라도 한 듯 전체적으로는 하얀색을 띠었으나, 마차 곳곳의 테 부분은 금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조화를 이뤄 말끔하면서도 화려함을 자랑하니, 단연 눈에 돋보이는 마차였다.

“우와! 설마 이걸 타는 거야?”

감탄사를 내뱉는 에시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뜬 마음에 아까 있었던 테이시와의 짧은 대치는 어느새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져 까맣게 잊힌 뒤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봐 왔던 대공가의 마차들은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만 그득했다. 그런데 눈앞의 마차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빛이 나다 못해 절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언뜻 보아도 레고니스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래. 우리가 타는 거지.”

그녀와 달리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테이시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마차의 앞에 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문을 열어 주기 위해 움직였으나, 테이시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곤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해. 얼른 와.”

에시엘을 향한 부름이었다. 넋 놓고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입에선 연신 조용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테이시를 향해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점차 우러러보게 되는 마차는 크기 또한 무척 압도적이었다. 그 내부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 장정 두 명은 거뜬히 누울 듯했다.

정신없이 감상하는 새에, 물러나 있던 시종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주인님께서 에시엘 님께 이 마차를 선물하셨습니다. 앞으론 에시엘 님 마음대로 이용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서, 선물이요?!”

놀라 되묻는 에시엘이 되레 머쓱해질 만큼 시종은 평온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답을 대신했다. 이에 다시금 바라본 마차는 변함없이 호화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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