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1화 (61/80)

61.

여태껏 소왕국에서도 가져 본 적 없던 마차였다. 이 굉장한 마차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만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 어딘가 불안함이 생겨났다. 아무리 생애 한 번 있을 데뷔탕트라지만 대공은 자신에게 의아할 정도로 베풀고 있었다.

제가 아는 롬포드는 제 이득만을 위해 행동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무엇을 대가로 이토록 극진한 대우를 아끼지 않는지 예상할 엄두조차 안 났다. 설령 에시엘 머릿속의 위험한 예상이 기정사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늦겠어.”

꽤 나긋한 테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손을 뻗은 채인 그는 마차의 문을 열고 에시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에시엘은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마음은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그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마차에 올랐다. 적응될 법하나 아직까지 적응되지 않는 매너 탓인지 살짝 떨림이 느껴졌다.

테이시 또한 그녀를 뒤따라 오르고 머지않아 그들을 태운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감상할 기회라도 주듯 저택 앞 메타세쿼이아 길을 느긋이 달리다가, 이내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빠르게 달렸다.

“같이 가 줘서 고마워.”

“…….”

“하핫.”

정적을 깨트리며 멋쩍게 웃고 만 에시엘의 시선이 이내 창밖을 향했다. 입가에 지은 기분 좋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정면만 응시할 뿐이던 테이시도 그런 그녀를 슬며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조금 자 둬.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

“으응. 알겠어.”

에시엘이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곤 테이시를 바라봤다. 곤히 감고 있는 눈두덩이 끝의 속눈썹이 몹시 짙었다. 이외에도 날렵한 콧날이며 남자다운 턱선 등 한층 어른스러워진 그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릴 때와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던 중, 그가 시선이라도 느낀 것인지 뒤척이듯 고개를 돌렸다. 에시엘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들이 깊은 잠에 빠진 조금 뒤, 갑작스레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 * *

테이시의 머릿속에선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회고에 잠겼다.

“나 여기서 떠날 거야.”

느닷없는 발언을 하던 에시엘의 표정은 꽤나 비장했더랬다. 그간 보지 못했던, 유난히 씩씩하고 굳센 모습이었다. 마치 이러한 상황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사람처럼, 분명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한편으론 에시엘이 생각한 계획이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다만 자질구레할 뿐인 제 호기심 때문에 그 뜻을 따라 도피를 돕고 싶진 않았다.

더욱이 테이시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저 안 된다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것들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좋아하는 디저트들을 준비해 와 함께 먹어 주는 사람이 사라져서라거나, 자신에겐 없는 아이의 명랑함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분하지 않다는 것 등.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처럼 단조로운 근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시엘은 저택을 떠나 잠정적으로 가문의 영역 안에서 벗어나겠다 말했고, 순간 그녀가 없을 저택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의 뜻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직간접적인 이유로 제 본심을 드러내지 않게 된 이후 처음이었다. 마음속에서 조금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꿈틀거리는 어떠한 감정이 있었다. 주변의 바람대로 큰 문제 없이 고분고분 행하기만 하던 그가 저만의 의지를 내보이던 찰나였다.

하지만 테이시는 그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지금으로선 제 눈앞에서 결연함을 내비치는 아이의 뜻을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홀연히 사라지겠다고 선언하는 그녀를 어떻게 해서든 제지하고 저택에 머무르도록 해야 했다.

그의 머릿속에선 그 단 한 가지 사고가, 안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강하게 들었으나 이 또한 어떤 연유인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으아악!”

생각에 잠겨 있던 중에 비명 비슷한 소리가 설핏 들렸다.

“뭐야…….”

별안간 마차 밖에서 들려온 소음은 테이시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마차 내부는 빛이 들지 않는 암흑 속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려 눈을 수차례 깜빡인 그가 주변을 휘둘러봤다. 가까스로 적응해 살핀 주변의 모든 창엔 무언가를 덧댄 듯 전부 가려져 있었다.

이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테이시가 다급히 제 옆을 바라봤다. 에시엘이 있을 자리였다. 다행히 그곳엔 그녀로 추정되는 작은 형체가 언뜻 보였다. 미동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아직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비로소 안도하듯 옅은 숨을 내쉰 테이시가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외부의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럿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제법 선명히 들려왔다. 그것은 누군가의 겁먹은 울먹임과 윽박지르는 고함이 주를 이뤘다.

도통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좋지 않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테이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의 문으로 다가갔다. 창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외부에서 가려진 듯 아무런 손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손잡이를 잡아 거세게 수차례 돌렸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고정된 듯 거치적거리는 소음만 들려왔다.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텐데!”

그리고 그때 몹시 성이 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일순간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덩달아 몸이 휘청인 테이시가 중심을 잡는 사이 지척에서 한껏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렸다.

“테, 테이시?! 거기 있어? 아무것도 안 보여!”

어두움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주변을 더듬으며 팔을 마구 버둥거리는 불안한 몸짓이 보였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에시엘로선 난데없는 어둠이 두렵게 느껴질 터였다.

중심을 잡으며 찬찬히 의자 가까이 다가온 테이시가 에시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 손에 붙잡힐 만큼 가는 손목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도 잠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침착하게 옆에 앉았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마차는 이따금 거센 움직임을 보였다.

“진정해.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

손목을 감싸는 테이시의 온기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긴장감에 물들어 한층 체온이 낮아진 에시엘에겐 그의 접촉이 유난히 따스하게 다가왔다. 더욱이 그러한 온기는 그녀에게 따뜻함을 넘어 안정감을 느끼게 했다.

에시엘이 어둠에 적응하는 사이, 둘 사이엔 익숙할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어 눈만 도르륵 굴리고 있던 그녀가 테이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일이야? 창문이 왜 다 가려져 있어?”

“이상해. 문도 열리지 않아.”

“뭐? 그럼 갇힌 거야……?”

“…….”

그의 대답이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에시엘은 당황한 시선을 거두곤 캄캄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시금 찾아온 정적은 주변의 소음을 한층 뚜렷하게 만들었고, 이는 보이지 않는 외부에 대한 공포심을 일게 했다.

에시엘은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나 마차의 문가를 향했다. 문손잡이를 수차례 돌려 봤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망연자실하여 넋이 나간 듯한 상태로 문을 바라봤다.

마차의 주변을 말들이 에워싸기라도 한 듯 세찬 말발굽 소리가 겹겹이 들렸다. 이와 더불어 거칠고 굵은 목소리와 야유하는 소리가 뒤섞여 몹시 요란스러웠다. 개중에는 누군가를 선동케 하듯 몰아붙이는 아우성도 들려왔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소설의 내용을 더듬어 봐도 테이시가 마차에 갇히던 사건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입적이 변수로 작용하여 원작과 다른 일이 생긴지도 몰랐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에시엘을 사고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문이 열리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려와 바라본 곳엔, 반대쪽 문에 다가간 테이시가 손잡이를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그는 문이 부서질 기세로 온 힘을 다하는 듯했으나 문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마차 밖에서 건들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야, 애송이들아!”

쾅쾅―.

“대, 대체 뭐야…….”

단단한 무언가를 내려치는 듯 위협적인 소음은 마차 전체를 타고 울렸다. 이에 움찔한 에시엘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녀의 구두 뒤축에 막다른 벽이 닿았다. 와중에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은 식은땀마저 증발시키는 듯했다.

두려움에 동하는 순간, 에시엘을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따스한 온기가 다시금 손목을 감쌌다. 곧이어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그녀를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이끌었다.

“앉아 있어. 산적이 따라붙은 것 같아.”

“산, 산적이라고?”

놀라 되묻는 에시엘과 달리 테이시는 침착하기만 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사람 같기도 했다.

테이시는 무언의 당부를 하듯 에시엘의 어깨에 손을 얹곤 그녀를 가만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각자의 색과 함께 빛을 잃은 시선이 서로 맞부딪혔다. 찰나의 시간에 영겁이 지난 것만 같다.

머지않아 이내 눈길을 거둔 테이시가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열리지 않는 문을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차기 시작했다. 마차의 거센 흔들림을 견뎌 내며 수차례 발길질해도 문은 까딱없었다.

“테이시, 다치겠어……!”

에시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문을 향해 몸을 세차게 부딪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저 아이만이라도 이곳을 무사히 탈출시켜야 한다는 일념이 가득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만큼 계속해서 부딪힌 탓에 팔뚝에 느껴지는 통증 또한 느낄 새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소란스러움이 점차 잦아드는가 싶더니 또다시 위협적인 소음이 마차를 울렸다.

쾅쾅―.

“그만! 너흰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어! 명령이 있기 전까지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다!”

마차 밖 산적의 공갈을 끝으로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휘파람과 함께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소리에 멈칫한 에시엘은 마차의 가죽 시트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명령……?’

산적의 말이 어딘가 꺼림칙했다. 짐작 가는 이를 곰곰이 생각하며 불안한 눈초리로 테이시를 바라보던 에시엘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도 그의 엉망이 된 차림새가 선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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