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젠장……!”
“우리 기다려 보자. 다른 사람들이 찾고 있을 수도 있잖아.”
바닥에 주저앉은 테이시가 가만히 욕설을 중얼거렸다. 에시엘은 도리어 그를 안심시키듯 가망성 없는 희망을 건넸다. 조심스레 붙든 팔에선 뜨끈하고 축축한 것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몸을 부딪치며 생겨난 생채기에서 피가 배어 나온 듯했다.
“다쳤어! 얼른 치료를…….”
“아니. 그랬다간 네가 위험해져.”
테이시는 단호하게 말하며 애써 돌아앉았다. 지난날 치유로 인해 멀쩡해진 자신과 달리 정신을 잃었던 그녀였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찔하기만 했다. 또다시 같은 상황을 반복할 순 없었다.
“난 괜찮아. 그리고 상처도 깊지 않아서…….”
쾅쾅―.
그 순간 에시엘의 목소리를 뒤덮을 만큼 거친 소음이 마차를 타고 울렸다. 또한 뒤이어 들려오는 말소리는 수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송이들! 크크크,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끼익―.
오랫동안 방치되어 경첩이 녹슨 낡은 문이 열리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이에 홀리기라도 하듯 서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쉬이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신 빛이 발하고 있었다. 시선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꺄악!”
순식간이었다. 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지척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테이시는 재빨리 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는 손 주변으로 서늘한 바람이 닿을 뿐이었다.
머지않아 다급하게 멈춰 선 마차만큼이나 가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괴한들이…….”
“에시엘, 에시엘은요.”
“그, 그게 너무 순식간이라…….”
우물쭈물 답하는 마부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더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테이시는 땀에 젖은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한쪽 팔이 욱신거리며 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피, 피……! 소가주님, 다치셨습니다!”
백지장이 되어 버린 머릿속과 더불어 귓가에 더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발치에는 주인을 잃은 깃털 모양의 머리핀이 나뒹굴고 있었다. 에시엘의 머리칼에 꽂혀 있던 것이었다.
테이시는 그것을 주워 들어 손에 꼭 쥐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죠.”
* * *
영문을 알 수 없는 강렬한 빛은 낯선 괴한들이 내는 둔탁한 소음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그 빛은 간접적인 가해만큼이나 치명적이었고, 선명한 잔상을 남겨 사소한 행동마저도 제약을 가했다. 외부가 모두 차단된 마차 안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 속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터였다.
이렇듯 정신없는 사이 단숨에 에시엘의 팔다리를 낚아챈 괴한들은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 내렸다. 무장 괴한들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고 그녀로선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꺄악!”
갖은 발버둥을 치며 내지른 비명이 마지막 외침으로 남았다. 팔다리가 붙잡힌 탓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우악스러운 손길로 들이밀어진 손수건에 의해 에시엘의 코와 입이 틀어 막혔다. 피부에 닿는 감촉이 거칠면서도 축축하게 젖은 부분이 한가득 느껴졌다.
‘이, 이게 뭐지?’
손수건에선 어떠한 냄새도 풍기진 않았으나 좋지 않은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입을 막아 버린 탓에 이 이상 소리를 내질러도 아무 소용이 없음은 자명했다.
에시엘의 불안한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을 붙잡은 괴한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또다시 우악스러운 손길이 다가와 그녀의 눈두덩이 위로 천을 얹고 매듭을 동여맸다.
그리고 그 순간, 코와 입을 가로막던 거친 감촉이 사라졌다. 손수건이 사라졌음을 느낀 에시엘은 가쁜 숨과 함께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ㄹ…….”
그러나 한 단어조차도 완성하지 못한 에시엘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비웃음을 흘린 괴한들은 에시엘을 옮기기 위해 걸음을 움직였다.
“이거 효과가 엄청나잖아?”
“그래! 어렵게 구했다고 하셨으니까, 크큭.”
머지않아 그들이 지척의 풀을 헤집자 그곳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상자 같은 것이 드러났다. 괴한들은 그것을 열어 거침없는 손길로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맥없이 나뒹구는 에시엘의 팔목과 발목 부근의 여린 살결 위로 붉은 자국이 그득했다. 괴한들은 자신들이 자초했을 포악한 흔적에도 일말의 자책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서둘러! 시간을 지체해선 안 돼!”
“조용히 해,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고!”
오히려 그들은 붉은 자국 위로 밧줄을 칭칭 감았다. 그녀의 손과 다리를 묶기 위함이었으나 어딘가 행동이 어설퍼 밧줄만 수차례 감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종래에는 에시엘의 시야와 손과 발이 모두 속박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팽개쳐져 있는 상자의 뚜껑이 서서히 닫혔다. 순식간에 자리한 캄캄한 어둠이 모든 것을 감췄다.
* * *
여느 때와 달리 활짝 열어 놓은 창밖에서는 단아한 봄이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계절에 맞게 핀 꽃들과 그 사이를 노닐듯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르베이너스 공작의 집무실은 어떤 연유인지 평소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겼다. 다른 점이라면 열려 있는 창문 하나뿐인데 말이다.
춤을 추듯 현란하게 움직이며 글씨를 써 내려가던 만년필이 끝내 마침표를 찍었다. 르베이너스 공작은 그제야 제 할 일을 마친 듯 서류를 덮으며 책상 위로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쯧쯧…….”
책상 위 탁상시계를 흘겨본 그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 약하게 도리질을 치며 혀를 찼다. 시곗바늘과 바늘 사이의 각은 어느덧 직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손등에 턱을 괴곤 또다시 시계를 노려보며 불안하게 다리를 떨었다.
열린 창을 통해선 온화한 기운이 전해지고 있었다. 평화롭기만 한 집무실에 경망스럽게 떨리는 다리의 소음이 잔잔하게 퍼졌다. 르베이너스 공작은 유난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똑똑―.
“들어와!”
순간 들려온 노크 소리에 재빠르게 문가를 바라본 그가 호통치듯 말했다.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는 탓이었다.
이내 공작의 비서인 캐러드가 허둥지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한 채 르베이너스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조심스레 서두를 꺼냈다.
“도착했답니다. 이제 어, 어떻게 할까요?”
“뭐?! 어쩌긴 뭘 어째, 당장 데리고 와!”
공작의 한껏 성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캐러드가 잽싸게 뒤를 돌았다. 대답할 생각도 채 하지 못한 그가 여태껏 볼 수 없던 빠릿빠릿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베이너스는 심호흡을 하듯 큰 숨을 두어 차례 내뱉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숨에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활짝 열려 있던 문을 닫곤, 뒤이어 거침없는 손길로 커튼까지 치며 제법 완벽하게 외부와의 차단을 조성했다.
이제 집무실 안에는 인위적으로 켜 놓은 빛만이 감돌고 있었다. 천천히 책상 앞에 선 르베이너스의 시선이 초조한 듯 갈팡질팡했다. 그의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한데도 제 비서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느릿하게 서성이던 걸음은 끝내 날쌔게 바뀌며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서성이던 중간중간 문가를 힐끔 바라보며 입술을 짓이기는 행동도 함께였다.
한참을 그러던 중 르베이너스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험상궂게 변해 있었다. 더는 기다릴 마음이 없는지 빠르게 돌아서 문가를 뚜벅뚜벅 향하는 발걸음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캐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작은 그의 뒤로 낯선 이들의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어, 어디 가십니까? 혹시 너무 늦은…….”
“조용! 그만 나불대고 들어오기나 해!”
르베이너스는 고함과 함께 뒤돌아 다시 큰 책상을 향했다. 화를 삭이듯 가쁜 숨을 내쉬는 호흡과 달리 만면에 비열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이내 의자에 앉아 손등으로 턱을 괴곤 기세등등하게 제 쪽으로 다가오는 낯선 두 남자를 노려봤다. 옆에서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캐러드는 괜스레 자신의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렸다.
캐러드의 안내로 책상 앞에 선 두 남자는 범상치 않은 차림새였다. 멀끔하긴 하나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는 행색이었다.
이와 더불어 험상궂은 얼굴에 자리한, 정돈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언뜻 보아도 귀족처럼 보이지 않는 그들은 왜인지 공작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르베이너스는 여전히 그들을 노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답을 재촉하듯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 전에…… 약속하셨던 게 있지 않습니까?”
그들 중 한 남자가 넌지시 반문했다. 공작의 신경을 거슬리게 할 법한 조금 시건방진 말투였으나, 그 물음에는 공작의 옅은 신음만 뒤따랐다.
르베이너스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오른편의 서랍을 열었다. 은밀하게 숨긴 듯 안쪽에서 꺼낸 가죽 주머니를 풀어 헤쳐 그들의 앞에 내던졌다. 주머니 속에는 각양각색의 보석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이 한데 부대끼며 책상과 맞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두 남자는 가죽 주머니를 쳐다보곤 서로 시선을 힐끔 주고받았다. 그러곤 무언가를 결심하듯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시지요.”
머지않아 그들 중 한 남자가 자신의 품속에서 하얀 천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르베이너스는 단숨에 낚아챈 그것을 망설임 없이 펼쳤다. 새하얀 천과 극명하게 대비되듯 붉은색의 가닥가닥이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군…….”
르베이너스는 모두에게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펼친 하얀 천의 끄트머리를 쥐고 있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가 천 사이에 끼워 비밀스럽게 건넨 것은 머리칼이었다. 그것은 현 제국에서 아나이스 왕족에게만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붉은색 머리칼일 터였다.
“드디어……. 드디어…….”
공작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계속해서 혼잣말을 되뇌었다. 그의 고동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한 곳을 응시했다. 이내 잘게 떨리는 그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붉은 머리칼을 콱 움켜쥐었다가 스르륵 힘을 풀었다.
“크큭……. 크하하!”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르베이너스를 제외한 모든 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힘을 푼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온 몇 가닥의 붉은 머리칼이 나부끼며 하얀 천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