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광장 분수대의 물줄기가 맑은 하늘을 향해 뻗치며 힘있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곳곳에는 거리를 거니는 행인들과 저마다 뛰어놀기 바쁜 아이들이 주를 이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 참새가 지저귀는 온화한 봄날이었다.
하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에도 안온함을 해치는 이질적인 것은 존재했다. 바로 광장 한편에 흑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그들 주위로 범상치 않은 공기가 흘렀다. 이를 힐끔거리며 수군대는 상인들은 두려움에 시선을 피하면서도 그들의 어깨 견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빛의 견장엔 검을 타고 오르는 형상의 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보석이 박힌 눈이 매섭게 빛나며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은 레고니스 가문의 기사단이었다. 보통 광장까지 나설 일이 없는 그들이건만,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거리의 온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었다. 심지어는 지나다니던 어린아이며 어른이며 할 것 없이 붙잡아 세우는 강압적인 행동도 보였다.
주어진 임무는 하나였다. 행방이 묘연해진 아이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
즉, 롬포드 대공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머지않아 제국이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정적이 흐르는 레고니스 가문의 집무실 안, 덩그러니 위치한 책상 위에 반짝임을 뽐내는 깃털 모양의 머리핀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산처럼 쌓아 올려진 서류 뭉치들 사이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마차 습격?”
가만히 머리핀을 노려보고 있던 롬포드가 시선을 서서히 옮겨 그의 앞에 선 테이시를 바라봤다. 이에 부자를 관망하듯 살피던 렌테의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테이시는 일전의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모습이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날의 밤처럼 잔잔한 목소리에선 오히려 알 수 없는 싸늘함이 배어 나왔다. 그로선 자신이 무능했던 순간 생겨난 돌이킬 수 없는 사고에 대한 화를 삭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더불어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테이시는 롬포드의 매서운 시선을 곧이곧대로 받아 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물러날 마음이 없는 듯 공중에서 맞부딪히는 시선들이 몹시 날카로웠다. 서로를 닮은 눈빛은 여느 때보다도 차디차고 매서웠다. 되레 이를 지켜보던 렌테가 서류 파일을 들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실으며 꽉 쥐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습격이라니, 대체 어느 누가 그런 짓을…….”
말끝을 흐린 렌테의 목소리에는 자못 팽팽한 긴장감을 억누르려던 미약한 노심이 담겨 있었다. 렌테는 이내 조용히 눈동자를 움직이며 두 남자를 살폈다. 분위기마저 닮은 듯 닮지 않은 그들은 흡사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지뢰 같았다.
“아이가 납치되는 동안 뭘 했지?”
“…….”
“각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소가주님께서도 놀라셨을 겁니다. 일단 지금은 에시엘 님을…….”
결국 렌테는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씨로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 중 가장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일 터였다. 더군다나 지금으로선 납치된 아이를 찾아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후…….”
롬포드는 진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뒤이어 찌푸려지는 미간에서 노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머지않아 그는 눈두덩이를 거칠게 문지르며 화를 떨쳐 내려는 듯했다.
“저는…….”
“그만.”
담담한 듯 힘 있는 어투로 운을 떼는 테이시의 말은 채 완성되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한층 선명한 음색을 띠는 롬포드의 목소리 탓이었다.
짧은 언사로 테이시의 말을 저지한 롬포드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앞에 놓인 머리핀을 쥐었다. 그리고 시야 가까이 들어 올리곤 촘촘히 박힌 크리스털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매끄러우면서도 날렵하게 가공된 보석들의 촉감이 가감 없이 느껴졌다.
이내 롬포드의 시선이 다시금 테이시를 향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테이시의 의중을 꿰뚫는 듯했고, 자연스레 가문의 상징적 문양인 뱀을 떠올리게 했다.
“본론만 말해.”
“제가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테이시는 깃털 모양의 머리핀을 빠르게 힐끔 바라보곤 말했다. 롬포드를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전에 없이 형형했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선 특히나 드러낸 적 없던 강건함이었다. 여태껏 고분고분한 착한 아이처럼 순응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아이를 가만 바라보던 대공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졌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마음을 가늠하려는 듯 고개가 살짝 갸우스름해졌다.
“그때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사뭇 냉철한 롬포드의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하지만 꽤 긴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마땅한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차분히 말아 쥐고 있던 테이시의 주먹에 슬며시 힘이 실렸다. 그의 손등이 점차 새하얗게 질리며 미세한 떨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배어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홀연히 납치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제 능력으로 되찾고 싶은 마음이 컸는지도 몰랐다.
그런 테이시의 머릿속에 명령에 대한 반감들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로선 꽤 생소한 감정이었으나, 단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라고 치부할 뿐이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내 롬포드는 쥐고 있던 머리핀을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그는 렌테를 응시하며 한 음절, 음절마다 힘을 주어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말했다.
“모든 병사를 동원하고.”
목소리에선 분노의 대상이 누군지 알 수 없음에도 과히 섬뜩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당장 제국 전역을 수색해.”
“알겠습니다.”
눈치만 살피던 렌테의 긴장 가득한 음성이 들렸다. 그 순간까지도 테이시의 주먹 쥔 손을 타고 느껴지던 떨림은 잦아들지 않은 채였다. 더욱 붉은빛을 띠던 그의 눈동자가 불안정한 듯 흔들렸다.
“넌, 저택에서 잠자코 기다려.”
“…….”
차디찬 눈빛과 어김없는 명령조의 말투가 테이시를 향했다. 이에 테이시는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더불어 그에게 머무르던 롬포드의 시선이 일순간 빠르게 거두어졌다. 머지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롬포드는 거침없는 발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나섰다.
“후…….”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테이시는 진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혼자 남겨진 그의 주변을 맴도는 공기가 제법 냉랭하게 느껴졌다.
한 차례 심호흡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책상 위에 놓여 반짝이는 깃털 모양의 머리핀이 그의 시선을 옭아맸다.
그것을 가만 바라보던 테이시는 사뭇 신중한 움직임으로 손을 뻗었다. 눈이 부시도록 빛을 내면서 한 손에 다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의 머리핀은 그 아이와 많이 닮아 있었다.
테이시는 손바닥에 놓인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손에 닿는 철제의 감촉이 그리 차갑지 않았다.
* * *
“제국 분위기가 어수선하던데?”
황제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다소 성의 없는 자세로 만년필을 연신 휘갈겼다. 그의 시선은 바쁘게 움직이는 펜촉에서 생겨나는 글씨에 고정한 채였다. 심드렁한 듯 넌지시 묻는 투가 어쩐지 그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스윽, 스윽. 방 안에선 물음의 답 대신 여전히 만년필을 마구 움직이는 잔잔한 소음만 울렸다. 살풋 인상을 찡그린 황제가 불편한 기색을 나타내듯 제법 힘 있게 마침표를 찍곤 서류를 넘겼다.
“그, 그렇습니까……?”
꽤 긴 침묵 후에야 대기하고 있던 비서의 어리숙한 반문이 들려왔다. 이에 손을 멈칫한 황제가 삽시간에 눈을 치켜뜨곤 날카로운 눈초리를 했다. 언뜻 들어도 어물쩍 넘기려는 듯한 응답에 자연스레 미심쩍은 마음이 생겨난 탓이리라.
“뭔가?”
“예? 아, 그게…….”
선뜻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태도에 황제는 결국 쥐고 있던 만년필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서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냥 넘어가선 안 되겠다는 예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누가 반란이라도 모의하고 있는가?”
날 선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황제가 누군가를 염두에 둔 듯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이어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방 안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제의 마음 한편에선 짐작하는 이의 이름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지도 몰랐다.
“로, 롬포드 대공께서…….”
“롬포드 대공?!”
조심스레 내뱉은 비서의 한마디는 황제를 순식간에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게 했다. 황제의 내면 깊은 곳에서 대공이 여전히 두려운 존재로 자리 잡은 탓이었다. 몹시 놀라 품위 없이 잔뜩 커진 그의 눈매가 퍽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비서는 애써 황제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대공께서 입적한 아이가 납치되었다고 합니다.”
“뭐라? 아이가 납치됐다고?”
“레고니스 가문의 병사들이 제국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일말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비서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황제는 표정을 풀며 서서히 자리에 앉았다. 이내 팔짱을 끼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이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는 듯했다.
정리가 잘된 황제의 책상 위로는 그의 움직임에 팔랑이며 뒤집힌 서류와 제멋대로 나뒹굴던 만년필이 책상 가장자리에 간신히 멈춰 있었다.
“혹시 짐작 가는 자라도 있으신 겁니까?”
기나긴 정적을 깨트리고 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이상한 황제의 모습 때문이었다. 평소 롬포드 대공의 일이라면 화가 나건 기쁘건 극명한 기분의 변화를 보이곤 했는데, 지금의 황제는 이상하리만치 긴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짐작 가는 자라……. 그보다, 내 제국을 들쑤시고 다니다니. 안 되지, 안 돼.”
허공을 응시하던 황제의 눈동자가 한층 선명해지며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끌어 올려졌다. 퍽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대공을 두고 짐짓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는 이제껏 비치지 않던 모습이었다.
“대공을 만나야겠어. 약속을 잡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