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설마, 소문이 사실입니까? 그럼 제게 어떤 도움이라도 청하러 오신 건가요?”
“연기가 영 서툴군.”
르베이너스는 긴장한 티를 숨기며 제법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에 롬포드는 사뭇 담담히 내뱉는 말씨와 달리 몹시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빛과 어우러진 덤덤한 투는 오히려 그곳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제국에 이 패의 의미를 모르는 이가 있던가? 말해 봐.”
“……황제 전하의 권력을 뜻하겠지요.”
르베이너스는 테이블 가운데 놓인 황금 패를 힐끔 바라보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바지춤에 닦아 냈다. 역시나 제 몸은 거짓을 숨기지 못했다.
황금 패는 그저 손바닥만 할 뿐인 크기에도 몹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내리쬐는 햇볕 문양이 황실을 의미하는 만큼 그것은 아무나 소지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오직 황제만이 소지하는 패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 하사받을 수 있었다.
이 귀한 황금 패는 황제의 권한과 동등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롬포드가 이를 가져왔다는 것은, 황제가 그에게 모든 권한을 맡긴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래. 아무래도 전하께서 나를 몹시 신임하는 듯해.”
“그야 제국의 검이시니…….”
“친히 나를 부르시곤 콕 집어 자네에게 가 보라 하시더군. 어떻게 생각하나?”
롬포드는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르베이너스를 다그쳤다. 일말의 여유 따위 주지 않은 채 그를 몰아붙이며 벼랑 끝으로 내몰 기세였다.
하지만 공작의 입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불안한 듯 방황하는 그의 눈동자가 그 답을 대신하는지도 몰랐다.
황금 패가 지닌 의미는 황제의 권능 아래 있는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르베이너스 또한 그러한 실정을 모를 리 없었다. 이 때문에 지금 어떠한 수라도 꾀기 위해 이토록 머리를 굴리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묻지. 아이를 어디에 숨겼지?”
“…….”
“대답할 생각이 없군.”
공작에게서 시선을 거둔 롬포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무정했다. 이젠 공작에 대한 분노조차도 같잖다고 생각하는지 존재하던 감정을 모두 지워 낸 듯했다.
하지만 관점을 돌이켜 보면 애초부터 공작에겐 생각할 시간 따위 주지 않는 편이 롬포드의 성격과 더욱 맞아떨어졌다. 롬포드치고는 제법 인내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단숨에 이 저택을 초토화한들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대치의 결과는 그만큼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롬포드에겐 르베이너스 공작을 포함한 다른 이들, 하물며 황제일지라도 그리 두려운 대상은 아니었다. 아무렴 누군들 자신의 발끝만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단련한 검술과 세력 확장을 위한 각종 사업 등, 그 외 모든 것들에 대한 확신이 자신감의 기반이었다.
그런데도 르베이너스 공작에게 물음을 하고 답을 기다렸던 이유는 순전히 아이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품었을 게 뻔한 악의의 향방이 아이를 가리키지 않길 바랐다.
더군다나 누구보다 맑지만 쉽게 겁먹곤 하는 그 아이에게만큼은 폭력적인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찰츠. 수색하지.”
“자, 잠깐!”
르베이너스가 다급한 외침과 함께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상황을 중재하듯 나섰다. 순간이나마 그의 엉덩이가 들썩들썩 움직인 듯도 했다. 롬포드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장 달려들듯 저지하는 행동 탓에 응접실에는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크흠. 다짜고짜 찾아와서 어찌 행패입니까. 굉장히 불쾌하군요. 아, 아이건 황금 패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대공.”
일부러 목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환기한 르베이너스가 제법 진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제 맘과 달리 롬포드를 나무라는 어투에선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행패?”
공작의 말을 되뇌는 롬포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운 낯을 띠었다.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음성을 들었다면 삽시간에 뒤바뀐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자네가 모르는 일이, 확실해?”
“그, 그게 무슨…….”
르베이너스는 제 계략을 모른 체하며 애써 침착한 척을 했다. 야멸치게 쏘아붙이는 음성과 더불어 자신에게 향하는 핏빛과도 같은 롬포드의 시선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했다. 이에 겁에 질린 그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전부를 실토하고 용서를 비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일도 없었다. 더군다나 수년 전부터 꿈꿔 왔던 순간의 고지가 머지않았기에 더욱 멈출 수 없었다.
르베이너스는 두려운 마음을 제쳐 두고 굳건한 다짐을 재차 아로새겼다. 납치한 인질을 빌미로 시건방진 대공의 콧대를 꺾고 그럴듯한 사업안 또한 얻어 내어 야심을 이루겠다는 의지였다.
“같잖은 짓거리는 그쯤 하지. 퍽 형편없으니.”
하지만 롬포드는 그마저도 훤히 들여다보았는지, 가소롭다는 듯이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조소를 띠고 있었다. 이에 르베이너스의 얼굴빛이 붉게 물들었다. 그것이 창피함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는 도통 분간할 수 없었다.
“대공, 같잖다니요! 말씀이…….”
“이쯤 되면 내 뒷배를 봐주는 이가 누구인지 눈치챌 만하지 않는가.”
“뒤, 뒷배? 설마……! 대체 그분이 왜, 왜…….”
르베이너스는 넋이 나간 듯 비탄에 잠긴 신음을 연신 뱉어 내며 서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그의 몸이 점차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려 왔다.
“황제 전하를 대신해 명령한다. 당장 저택을 샅샅이 뒤져 아이를 반드시 찾아내.”
“아, 안 돼, 안 돼…….”
“쯧……. 썩은 밧줄은 진작에 잘라 내야 했거늘.”
얼빠진 그의 모습을 힐끗 바라볼 뿐, 담담하게 혼잣말을 읊조리는 롬포드의 무심한 음성이 공작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일말의 감정도 없어 마치 사물을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그의 언행을 제지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오히려 성난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이 가려져 있던 르베이너스에게서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한층 떨림이 잦아든 모습으로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서두를 꺼냈다.
“롬포드 대공, 어, 그…….”
불안한 듯 바쁘게 이곳저곳을 헤매는 르베이너스의 시선이 수차례 황금 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대공이 저 자그만 것을 가진 덕에 저택을 수색하는 일과 같은 그의 거침없는 행동을 더 일조하는 듯했다.
르베이너스로선 황제의 개입은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황제는 롬포드에게 도움일랑 일절 주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무엇 때문에 대공을 돕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이 저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여전히 냉랭하고 매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롬포드의 모습에 공작의 머뭇거림이 길어졌다. 마뜩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할 터였다.
“인내심이 많지 않다고 한 걸 잊었나?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지.”
“대, 대공……!”
머지않아 롬포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바심 내는 기색이 역력한 르베이너스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몹시 매몰찼다.
공작은 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바지춤을 꽉 부여잡을 뿐이었다. 차마 롬포드에게 맞서지 못한 채, 힐긋힐긋 훔쳐보는 자못 간사한 행동으로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혹여나 이곳에서 아이가 발견된다면.”
“…….”
“그땐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군.”
롬포드는 화를 삭이듯 음절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삭막한 응접실을 더욱이 쓸쓸하게 만드는 차디찬 음성이었다.
이내 가차 없이 돌아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롬포드를 그의 수하들이 뒤따랐다. 끝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르베이너스는 산만한 몸짓으로 연신 다리를 떨어 댔다.
르베이너스의 저택 도처에 흑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늘비했다. 어깨 견장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그들은 모두 레고니스 가문의 소속이었다.
“서둘러 수색해.”
“예. 알겠습니다.”
롬포드는 황제가 넌지시 암시한 것과 공작의 태도로 미루어 아이의 행방을 확실시했다. 하지만 잔악무도한 롬포드라 한들 귀족의 저택을 멋대로 뒤지는 몰상식함이 허용되진 않았다. 이는 황제가 허용한 권세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
롬포드는 진한 숨을 짧게 뱉었다. 지금 자신에겐 무엇보다도 에시엘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머릿속을 비집고 떠오르는 황제의 말은 무척 꺼림칙했다.
정보를 대가로 거래를 하자던 제안. 꿍꿍이를 알 수 없음에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롬포드는 어느새 찌푸려진 인상을 숨기듯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 * *
“하인들의 말로는 방치한 지 수년도 더 됐답니다.”
찰츠의 안내에 호응하듯 롬포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공작의 저택 외부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적당히 자그마한 크기의 창고처럼 보였다. 내버려 둔 채 족히 수십 년은 지난 듯 나무로 만들어진 외관 곳곳에 썩은 흔적이 그득했다.
끼이익―.
창고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어쩐지 아주 손쉽게 열렸다. 예상과 다름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창문이 없어 어두컴컴한 그곳에 비로소 빛 한 줄기가 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머지않아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롬포드의 낯이 어렴풋하게 찡그려졌다. 그득한 먼지와 케케묵은 곰팡내가 후각을 자극하는 탓이었다.
“젠장.”
그리고 그의 시야에 조그만 형체가 들어찼다. 구태여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도 그게 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흙바닥에 쓰러지듯 널브러져 있는 아이는 에시엘이었다.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간 롬포드는 곧장 그녀의 생사부터 확인했다.
조심스레 가져다 댄 손가락에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약간 서늘한 숨은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암시라도 하는 듯했다.
“세상에, 에시엘 님! 이런 곳에 가둬 뒀다니……. 꼴이 말이 아니네요. 이 상처들을 다 어쩐답니까.”
“…….”
“정말 공작이 범인이었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허겁지겁 뒤따라온 찰츠 또한 에시엘의 상태를 살피며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 흙바닥에 쓸린 피부와 엉망이 된 옷, 특히나 눈에 띄는 손에는 자잘한 나무 가시가 박힌 채 피가 굳어 딱지가 앉아 있었다. 데뷔탕트를 향하던 아이의 행색이라기엔 너무나도 처참한 몰골이었다.
롬포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말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이를 바득 갈았다. 어둠 속에서도 검붉은빛을 내는 그의 눈이 형형했다.
“일단, 아이 먼저 데려가지.”
롬포드는 에시엘을 들어 안아 창고를 나섰다. 언뜻 보인 그의 표정이 몹시 살벌했기에, 찰츠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