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67화 (67/80)

67.

에시엘의 방, 너른 침대 주위로 길게 늘어진 하얀 캐노피가 하늘거렸다. 방 한편에 크게 자리한 창을 살짝 열어 놓아 봄바람이 이는 탓이었다.

평소라면 살결을 기분 좋게 간지럽힐 바람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사뭇 서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방 안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쥐 죽은 듯 괴괴한 그곳엔 침대맡 의자에 앉은 신관의 골똘한 침음만 흘렀다. 이와 더불어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는 이들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노피만큼이나 새하얀 이불을 덮은 에시엘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베개 위 흐트러진 머리칼은 유난히 붉은색을 띠어 더욱 잔혹하게 느껴졌다. 미동도 없이 옅은 숨만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그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맥을 짚는 등 에시엘의 상태를 확인하던 신관은 이내 그녀의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며 진단을 끝냈다. 돌아보는 신관의 입가엔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경과를 지켜보심이…….”

“경과를 지켜봐? 자네를 부른 이유가 고작 그런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닌 걸 모르나?”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롬포드의 목소리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신관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그의 불같은 성미에 모두의 얼굴 위로 조마조마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말리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결국 신관이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차마 시선을 맞출 용기까진 나지 않았는지 롬포드의 발 끝에 눈을 고정한 채였다.

“지, 지금으로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저기…….”

순간,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냘픈 음성이 들렸다.

“저는 괜찮아요. 하핫.”

에시엘이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이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주변엔 무척 겁을 먹은 신관과 그를 매섭게 쳐다보는 롬포드, 두 사람을 비롯해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어색한 웃음을 지은 에시엘이 멋쩍은 듯 볼을 긁적였다. 잔뜩 화가 난 대공과 적막만이 흐르는 방 안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황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제 모습은 이미 말끔해진 채였다. 흙먼지가 가득 묻었을 드레스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바뀐 것은 물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던 손도 치유를 끝냈는지 멀쩡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을 구하고 신관까지 부른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보, 보십시오, 금방 깨어나지 않았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에시엘 님.”

“다들 엄청 걱정했답니다!”

신관이 몹시 반가워하는 기색으로 말똥말똥 앉아 있는 에시엘을 가리켰다. 이에 주변의 사용인들 모두가 그녀를 보며 안도감 섞인 말을 건넸다.

이내 완전히 정신을 차린 에시엘이 그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입적되어 연고 없는 저를 위해 그간 알게 모르게 친절을 베풀었던 대공가의 사용인들이었다. 온전히 그녀만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 속엔 모두 똑같은 어떠한 감정이 담긴 채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 섞인 목소리, 안도감, 저를 보며 짓는 맑은 미소. 에시엘 또한 분위기 속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다만 받아 본 적 없어 낯설게 느껴지는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 얼떨떨할 뿐이었다.

단순하게 명명하는 것마저 어려운, 대번에 정의 내릴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었다. 가슴속을 온전히 채우는 따스함과 조금씩 피어나는 몽글몽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했다.

에시엘이 그것들을 어렴풋이 깨달을 때 즈음 누군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자, 에시엘! 특별히 준비했다!”

주변 이들의 존재는 개의치 않는지 유난히 씩씩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다가온 이가 나무 쟁반을 내밀었다. 그것에는 하얀 생크림 위에 갖가지 과일이 토핑되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미니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원래는 데뷔탕트에서 돌아오면 주려고 했는데……. 멀쩡한 거 맞지?”

페루딘이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당차게 에시엘 앞에 선 행동과는 다르게 사뭇 조심스러운 투에선 떨림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어…….”

페루딘을 바라보는 에시엘의 입술 새로 멍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자못 진지한 눈빛과 솔직하게 늘어놓는 말은 평소와 달랐다.

장난기 서려 있던 눈매를 지워 낸 페루딘은 진중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걱정하고,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 속에 제 형상이 가득 담겼다.

“아니야……? 아직 어디 아픈 거야?”

어쩐지 에시엘도 다른 때처럼 그에게 가벼운 장난을 치기가 어려웠다. 대답이 없는 자신을 응시하는 붉은 눈이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 그녀가 일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용인들과 페루딘의 걱정 어린 시선에 내포된 감정은 비슷한 색을 띠는 동시에 온전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슴 내면에 따스함을 안겨 주는 몽글몽글한 기분과 한없는 포근함, 이와 더불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서적 안정감이었다.

에시엘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감정을 깨닫게 된 순간,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들어맞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은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들 이미 그녀를 가족으로서 대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움은 차후 문제였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 먼저 일었다. 동시에 이곳에서 더 머물러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두렵게 느끼는 대상의 심중을 멋대로 넘겨짚어도 괜찮은 걸까.

“이제 괜찮아! 상처도 다 없어져서, 아프지도 않아.”

밝은 목소리를 내는 에시엘의 마음 한편이 왜인지 씁쓸했다. 그녀는 제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쓰라린 아픔도 나무 가시의 흔적도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말끔했다. 살풋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드는 그녀의 시선이 순간 롬포드에게 향했다.

신관을 쏘아붙이던 대공의 얼굴에 어느새 노기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감정 없이 에시엘을 바라보는 모습에선 어딘가 알 수 없는 평안마저 느껴졌다. 항상 차디찼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다행이군.”

롬포드는 에시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전에 없던, 여태껏 보지 못했던 모습에 주변의 비서와 사용인들 모두가 의아함을 느낀 듯 시선을 주고받았다.

‘뭐지……?’

이상함은 그들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에시엘 역시도 대공의 모습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다. 찰나이지만, 일렁이던 그의 눈빛엔 어딘가 익숙한 감정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후…….”

비로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롬포드는 옅은 숨을 뱉으며 제 눈두덩이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가 뱉은 숨에 어떤 의미를 토해 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시금 에시엘을 바라보는 얼굴엔 어쩐지 편안함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곳 모든 이가 에시엘에게 같은 마음을 내비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나같이 그녀가 가족 일원임을 알리듯 애정 가득한 진심을 표현했다. 전해 오는 진심을 알아차리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에시엘은 괜스레 북받치는 뭉클한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가 원하던 완전한 행복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소왕국인들 레고니스 가문인들, 신분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막연한 두려움에 떠는 일 없이 충만한 소속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싶었다.

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더 머물러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로써 충분했다.

금세 밝은 얼굴을 한 에시엘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님! 봐요, 완전 튼튼해!”

그녀는 직각으로 만든 양팔에 힘을 주며 작고 소중한 알통을 자랑했다. 옷에 가려졌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난기 어린 미소까지 배시시 짓는 모습이 무척이나 해맑았다.

이를 보며 방 안의 이들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글쎄.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안 그런가?”

다시금 본연의 모습을 한 롬포드는 몹시 냉철한 투로 신관에게 물었다. 혹여나 물음에 동조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돌변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듯했다.

“예, 예. 맞습니다.”

“그래. 다시 눕는 것이 좋겠군.”

원하는 대답이 들려온 후에야 그의 눈빛이 한층 수그러들었다.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해 입만 벙긋거리던 에시엘은 결국 시종에 의해 강제적으로 침대에 눕고 말았다. 제법 포근해 춥지 않은 날씨에도 이불은 턱 밑까지 덮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극진하게 느껴지는 대우에 쉬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무엇 때문인지 집요하게 따라붙는 롬포드의 시선은 모든 것을 꿰뚫듯 날카롭게 느껴졌다.

눈동자만 도르륵 굴리며 분위기를 살피던 에시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괜찮아요, 대공님…….”

“잠깐.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에시엘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 롬포드가 인상을 찡그리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온전히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았다.

“네……? 뭐, 뭐가요?”

인상을 찡그린 탓인지 롬포드의 음성은 더욱 사납게 들렸다. 하지만 에시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불 속에 숨긴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아직 에시엘에겐 롬포드 대공의 잔악무도한 심상이 느껴졌다. 무사한 제 모습을 보고 안도하던 그에게서 믿음을 얻긴 했으나 일차원적으론 두려움이 앞선 탓이었다. 아무래도 수년간 느껴 왔던 것이 단번에 바뀌기란 쉽지 않았을 터였다.

반면 롬포드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 응시하던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더욱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로 인해 방 안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흘렀다. 저마다 힐긋힐긋 눈치만 살피는 통에 쥐 죽은 듯 고요함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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