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머지않아 침대 옆, 신관이 앉아 있던 의자에 롬포드가 자리했다. 쭉 뻗은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까지 낀 그는 군더더기 없이 늠름한 풍채를 자랑했다. 더구나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대공님……?”
에시엘이 눈을 가볍게 끔벅이더니 도르륵 굴려 롬포드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관심이 부담스러워질 때 즈음, 에시엘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괜스레 손가락 장난을 치는 중에도 시선은 느껴졌다.
“그 소리 말고, 이젠 할 때 되지 않았나.”
롬포드의 차분한 음성이 방 안의 고요함을 깨트렸다. 여유로운 듯 느릿하게 퍼지는 목소리는 순간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탓에 에시엘의 고개가 살풋 기울어졌다.
“뭘요?”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여과 없이 망설임을 드러내는 롬포드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을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에시엘은 그가 머뭇거리는 이유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동그란 눈만 끔벅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무사한 듯하니 이만 가지.”
말을 마친 롬포드는 눈에 띄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따라 에시엘의 시선이 부지런히 움직임을 좇았다.
오늘따라 롬포드에게선 평소와 다른 모습이 느껴졌다. 무언가 할 말을 수차례 망설여 빙빙 돌려 드러내다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며 작게 내쉬는 한숨, 또한 여느 때와 달리 느릿한 움직임으로 돌아서는 행동 모두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에시엘은 롬포드가 신경 쓰였다. 저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도 쉬이 하지 않는 느낌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그것을 롬포드에게 나서서 묻기란 쉽지 않았다. 선뜻 물었다가 그가 냉철하게 반응하기라도 할까 덜컥 겁이 난 탓이었다.
에시엘은 멀어지는 롬포드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고민을 했다. 순간이나마 그에게 묻고자 하는 마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생각을 저버렸다.
“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를 전하는 목소리에 잠시 걸음이 멈춰 섰다. 뒤이어 간결하게 답하는 롬포드의 음성엔 어쩐지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찰나일 만큼 굉장히 미약했으나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이 복합된 느낌이었다.
결국 에시엘은 끝끝내 질문을 건네지 못했다.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롬포드와 그 뒤를 뒤따르는 이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중, 왜인지 마지막까지 제자리에 머무르던 렌테가 한숨을 내쉬곤 자리를 떠났다.
* * *
에시엘의 곧게 뻗은 손가락이 책 페이지를 넘기던 찰나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책은 이제 막 읽기 시작한 듯, 넘어간 페이지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손가락에 닿는 딱딱한 겉표지의 거친 질감이 묘하게 손끝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에시엘은 제법 생각에 골몰해 보였다.
책을 읽어 보려 펼쳐 들긴 했었으나 불과 몇 시간 전 롬포드가 수시로 떠올랐다.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대공의 모습에 어떠한 해결책이라도 모색하듯 고민에 빠졌다.
자신에게 하려던 말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못다 한 물음을 던지기 위해 그의 집무실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 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갖가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시엘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기어이 에시엘은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마치 복잡한 제 머릿속을 나타내기라도 하듯이.
똑똑―.
그리고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이에 움직임을 멈춘 에시엘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됐다. 그녀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열린 문 뒤로 사뭇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가 등장했다.
“잘 쉬고 계십니까.”
가벼운 목례를 건네는 렌테의 낯엔 너그러운 미소가 완연했다. 그를 본 에시엘이 뒤엉킨 머리칼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엉망인 제 모습은 둘째 치고 갑작스러운 방문의 이유가 궁금했다.
더구나 렌테의 손에는 찻잔이 놓인 쟁반이 들려 있었다. 에시엘은 더욱 동그래진 눈으로 가만 서 있는 그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번갈아 봤다.
조금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늘 하녀들이 준비해 가져오던 것을 렌테가 대신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각하께서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네? 대공님께서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서 있던 렌테는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의자에 앉아, 어리둥절하게 있는 에시엘을 바라봤다. 마치 함께 앉기를 권하는 듯했다.
“가, 감사합니다.”
에시엘은 얼떨떨하게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마주했다.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손으로 감싸자 따뜻함이 느껴졌다. 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에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끽하고 난 후에야 골몰히 생각하던 대상이 떠올랐다. 혹여나 렌테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시엘은 눈치를 보듯 그를 훔쳐보곤 입을 열었다.
“대공님 오늘 조금 이상하시던데……. 무슨 일 있나요?”
“아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에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선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던 롬포드의 행동이 떠올랐다.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렌테는 이내 결심한 듯 에시엘과 눈을 맞췄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왜인지 견고하게 느껴졌다.
“아가씨께 할 말이 있으신 듯합니다.”
“대공님이 저한테요? 무슨 할 말이요?”
“글쎄요, 순전히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다른 호칭으로 불리길 원하시는 게 아닐까요.”
렌테는 조심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스스럼없이 의견을 표출했다. 마치 그의 생각이 사실인 것처럼 망설임 없이 전하는 내용에선 은근한 확신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호칭을 원하시는 거지?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고 갖췄는데……. 혹시 기분이 상하신 걸까?’
생각에 잠겨 골몰하는 에시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괜스레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선 일말의 불안감이 드러났다.
그동안 가문 사람들과 허물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롬포드에게만큼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그녀였다. 더욱이 롬포드의 앞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두려움은 그와의 어색함을 가중시켰다.
렌테의 눈길은 여지없이 걱정스러움을 드러내는 에시엘의 손가락을 향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에 잠긴 듯 묵직한 시선이었다. 머지않아 다시금 운을 떼는 그의 목소리는 에시엘을 회유하듯 나긋하게 울렸다.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더 가까운 표현을 원하실 것 같습니다.”
“가까운 표현이요?”
“예. 아가씨께서 오신 지도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그렇지만…… 대공님이 호칭에 연연하실 분은 아니잖아요.”
“하하. 또 모르죠, 대상이 아가씨라면.”
“네, 네에?”
“각하께서 아가씨를 꽤 신경 쓰고 특별하게 여기신다는 걸 느낀 적 없으신가요?”
렌테는 에시엘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느껴지는 그의 분위기가 무척 따스하고 다정다감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롬포드는 제 목덜미를 잡고 살벌한 태도를 보이던 첫 만남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갑작스레 바꿔 주었던 방이며 유명 재단사의 맞춤 의복, 내지는 늘 왕진하는 신관과 납치된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한달음에 향했을 그의 행동까지.
찰나의 순간, 지난 나날이 에시엘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휘감았다.
* * *
에시엘은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문이건만, 제 눈앞의 그것은 여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이 문 너머 롬포드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까.
렌테가 떠난 후 에시엘은 한참을 고민에 잠겼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와 더불어 롬포드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감정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마침내 결단을 내려 대공의 집무실까지 향하는 길에도 고민은 수차례 되풀이됐다. 걸음을 되돌려 제 방을 향하기도 수십 번 반복하다, 끝내 집무실 문 앞에 당도한 후에도 비장하게 문만 노려볼 뿐이었다.
‘정말 더 가까운 표현을 원할까? 더 가까운 호칭이라면, 설마 아버지라 부르길 바라는 걸까?’
에시엘은 생각을 곱씹었다. 반신반의하는 상념이 작은 머리통 안을 헤집었다. 이제 와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도, 어느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버지……?”
되새기기만 하던 생각이 별안간 현실이 되어 에시엘의 올망졸망한 입술 사이로 느릿하게 새어 나왔다.
어색하게 내뱉은 말이 사실 처음은 아니었다. 집무실을 향하기 전, 제 방에서도 연습하듯 여러 번 읊조린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낯간지럽고 여간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순간 예기치 않게 문이 열렸다.
“아가씨?”
모습을 보인 렌테는 다소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에시엘을 불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미소를 지으며 놀란 기색을 지워 냈다. 또다시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그러나 에시엘이 그런 낌새까지 알아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렌테를 마주하고 당황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각하. 아가씨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일순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처럼 변해 버려 눈만 끔벅이던 에시엘의 귓가에 렌테의 음성이 들렸다. 문 너머 안쪽에 있을 롬포드를 향해 전하는 내용일 터였다.
그녀는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만 휘저었지만, 결국 렌테에 의해 등 떠밀려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힐긋 바라본 롬포드는 턱을 괸 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언뜻 눈에 들어온 책상은 특이하게도 가운데만 말끔했다. 마치 에시엘의 방문에 하던 업무를 모두 미뤄 놓은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