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1화 (71/80)

71.

타닥―. 타닥―.

“좋은 수가…….”

롬포드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피아노를 치듯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그는 의자에 다시금 등을 기대곤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렌테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 바라봤다. 제 주인은 제 생각보다 월등하게 아이한테 마음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문제는 둘째 치고 공작을 벌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듯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불안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대공비의 죽음 이전과 비슷할 만큼 활력이 돌았으니까.

“마음대로 하려니 더 고민이 되는군.”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일정하던 소음이 멈췄다. 독백하는 롬포드의 얼굴엔 오히려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미소가 떠올랐다.

분명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 미소에선 포악한 맹수가 흥미로운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섬찟함이 느껴졌다.

* * *

머지않아 마카이른 제국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제국민들이 술렁술렁하여 뒤숭숭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특히나 광장에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저 더 놀면 안 돼요?”

“안 돼, 조금 있으면 어두워져서 위험해.”

“그래두요…….”

“아니, 얘가! 대낮에도 납치당하는 판국인데 겁이 없어!”

아이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곤 엄마라 칭한 여인의 손에 그대로 이끌려 갈 뿐이었다.

아이를 혼내던 여인의 말대로, 어느덧 광장과 더불어 제국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특이점은 너 나 할 것 없이 움직임을 서두르던 이들이 모두 아이와 함께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상 구석구석을 진한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태양은 마지막 발광을 끝으로 순식간에 어둠을 불러왔다.

약한 등불이 거리를 비추며 생겨난 인위적인 빛은 오히려 스산함을 불러왔다. 이제 광장에는 흔한 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간혹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를 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초조하고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어딘가 불안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그는 붙잡고 있던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확 치며 돌아섰다. 커튼의 자락에는 꾸깃꾸깃한 주름이 생겨났다.

“제길, 제길!”

르베이너스 공작이었다. 공작은 분풀이하듯 발을 구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데도 진정되지 않는지 제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주변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잔뜩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르베이너스의 숨소리가 거칠게 씩씩거렸다. 그는 곁에 서 있던 수하에게 다급하게 캐물었다.

“저택 앞은? 앞은 어때?”

“아, 아직 엉망진창입니다.”

“뭐? 아직도?!”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하는 건지……. 어, 얼른 잡아들이겠습니다!”

눈치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수하는 금세 따끔거리는 눈총을 느끼곤 말을 거뒀다. 그리고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요즘 공작의 상태라면 그를 피하는 게 가장 상책이었다.

지금 르베이너스 공작의 저택 앞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몰라도, 온갖 쓰레기와 악담이 적힌 벽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말라는 둥, 지옥 불에 떨어지라는 둥, 심지어는 공작이라는 신분이 아까우니 내놓으라는 이도 있었다.

“후…… 후…….”

르베이너스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지 방 안 이곳저곳을 빠르게 서성였다. 괜히 서류를 뒤적이고, 만년필을 쥐었다가도 금세 내려놓았다.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다가 끝내 고함치듯 비서를 불렀다.

“캐러드! 캐러드, 당장 들어와!”

“예, 예!”

허둥지둥 모습을 드러낸 비서는 르베이너스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집무실의 소파에는 공작과 그의 비서가 마주 보고 앉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엉?!”

“그, 그게…….”

“망했어. 가문의 위상이…… 이대로라면 몰락과도 다를 바 없다고.”

“…….”

“아니, 아니지…… 어쩌면 몰락보다도 더 나락에 빠진 거야. 하하…….”

르베이너스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불과 몇 분 전 분노에 차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이중적인 면모였다. 망연히 터트린 실소는 그를 더욱 정신 나간 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떠한 말도 건네기 어려울 터였다. 캐러드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대체 누구야. 누가 그딴 소문을 퍼트린 거야! 아직도 알아볼 시간이 부족한가? 그래?!”

르베이너스는 또다시 참지 못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 화살은 캐러드에게 향했다.

“아, 아무래도 제 생각엔!”

그리고 그는 공작을 저지하듯 다급히 외치곤 약간의 뜸을 들였다.

“롬포드 대공……일 것 같습니다.”

“뭐라? 어째서지?”

“납치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은 대공뿐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캐러드의 어투는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심증만으로 감히 그를 언급하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또,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가뜩이나 공작이 품고 있을 악감정에 부채질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말끝을 흐리며 턱을 매만진 르베이너스는 캐러드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제가 아는 롬포드라면 그럴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대공은 소왕국의 애송이를 이상하리만치 감싸고 돌았기 때문에.

“준비해! 대공저로 간다.”

“예? 지금은 시간이…….”

캐러드의 반발에 따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분명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았건만 막무가내인 그를 말리자니 눈앞이 아찔했다. 어쩌면 르베이너스는 시간 예절 정도는 가볍게 무시할 만큼 눈에 뵈는 게 없는지도 몰랐다.

캐러드가 자신도 모르게 공작의 눈총을 피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강압적인 목소리는 또다시 들려왔다.

“길거리에 나앉고 싶은 거야? 엉?!”

“아, 아니요!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결국 캐러드는 황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 * *

레고니스 가문의 저택, 응접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대적하고 있다. 흔한 홍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아 테이블 위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롬포드로선 공작에게 예의를 차릴 마음이 없었다. 지위를 막론하고 밤낮마저 불문하며 들이닥친 이에게 들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성가신 존재를 그저 빨리 내쫓고 싶을 뿐이었다.

“무례하군.”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롬포드가 거리낌 없이 말을 내뱉었다. 이에 르베이너스가 눈에 띄게 움찔했으나 곧 페이스를 다잡았다. 공작은 제가 대우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내심 언짢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을 따져야 했다.

“이 시간에 찾아와서 해야 할 말이라는 게 뭐지?”

“저에게 하실 말씀이 없습니까?”

“할 얘기라…… 글쎄. 오히려 내가 듣고 싶은데.”

“큼, 크흠.”

롬포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침착함을 유지하는 그의 태도에선 점점 싸늘함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대공의 재촉에도 쉽사리 서두를 꺼낼 수 없었다. 납치를 인정하는 꼴이 돼 버리고 말 테니까.

끝내 르베이너스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갈피를 잃은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거침없던 공작의 모습에 점차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냥 넘어가 준 걸 고맙게 여기지 않는군.”

“그냥 넘어갔다니요! 농담도 아니고, 말이 지나치십니다.”

“그래. 그냥 넘어가진 않았지. 그래도 그 정도면 살 만할 텐데, 아닌가.”

“대공……!”

잔뜩 발끈한 르베이너스는 분을 삭이듯 무릎 위로 놓아둔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이내 바르르 떨리는 주먹이 그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을 힐끔 쳐다보고 말 뿐인 롬포드에게 타격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차디찬 기운을 자아낼 뿐이었다.

제국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은 전부 롬포드의 지시 아래 생겨난 일이었다. 이로 인한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안 좋은 소문을 일부러 퍼트려서 공작 가문의 위상과 신망을 떨어트리기 위함이었다.

소문의 내용은 ‘피온 가문이 데뷔탕트 무도회를 향하던 마차를 급습, 아이를 납치했다’였다.

사실만을 나열했음에도, 자극적인 내용 탓인지 소문은 쉽게 과장되고 쉽게 퍼졌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공작을 괴롭히기엔 어쩌면 가문의 몰락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니.

“가문이 온전한 것만도 다행이지 않나?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었거늘.”

“아아…….”

비스듬히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비뚜름히 올라간 롬포드의 한쪽 입꼬리 사이로 비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계획한 사람처럼 태연자약했다.

이제야 상황을 인지한 듯, 르베이너스의 입에선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대공의 수를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한 제 오산이었다. 예상치 못한 묘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숙이곤 제 머리통을 감싸는 르베이너스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신음을 흘리는 모습이 퍽 괴로워 보였다. 결국엔 결자해지였다.

“아무튼.”

“…….”

“사과, 받아야겠어.”

“예. 예?!”

롬포드의 강단 있는 목소리는 뜻밖의 단어를 내뱉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의 그는 감성적인 판단보단 확실한 결과물을 원하는 사람이었기에, 르베이너스는 당황하며 화들짝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롬포드는 미동 없이 여전히 여유로움이 가득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꼬고 앉은 다리며 의자에 기대어 앉은 모습, 비딱한 고개는 자못 거만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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