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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2화 (72/80)

72.

“사과라니요? 대체 어떤…….”

르베이너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제 귀를 의심하듯 말을 되묻다가도 금세 반문을 멈췄다. 매섭게 노려보는 대공의 시선 탓이었다. 몸의 모든 신경을 멈추게 할 만큼 사나운 눈빛은 마치 마지막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공작은 눈꺼풀 하나도 쉬이 깜빡일 수 없었다. 호흡마저 멈추곤 불과 몇 초 전, 며칠 전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감회할 뿐이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롬포드가 입을 열었다. 더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채였다.

“들어와.”

한층 힘이 실린 음성이 응접실 안을 울렸다. 뒤이어 문이 서서히 열리며 한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에시엘이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쭈뼛쭈뼛 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에시엘은 제 옆의 롬포드와, 맞은편의 남자를 연신 힐긋거렸다.

흡사 사실 여부를 따지기 위한 삼자대면이라도 하듯 대치하고 앉은 구도 탓에 여간 신경이 쓰였다. 남자의 주먹 쥔 손이 떨리는 것이 유독 눈에 띄어 궁금한 마음이 크기도 했다.

사치스러운 남자의 차림새로 보아하니 평범한 사람은 아닐 듯했다. 이런 남자가 자신과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조금의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롬포드는 늦은 저녁 시간에 자신을 부르는 일이 없었기에, 그녀로선 지금 이 상황에 대한 부연 설명이 절실했다.

“자야 할 시간을 뺏는 게 아닌가.”

응접실에 흐르던 침묵을 깨트린 이는 롬포드였다. 어쩐지 평소 그의 대외적인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자못 다정한 물음이었다.

“아니요, 아직 초콜릿 우유를 안 먹었거든요. 그래서 아직 괜찮아요.”

“다친 곳은?”

롬포드는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에시엘을 걱정했다. 지긋이 맞춰 오는 시선 속에 아이를 염려하는 따뜻함이 있었다. 에시엘에게 그런 그의 마음이 와닿지 않았을 리 없었다.

에시엘은 싱긋 웃으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이와 함께 추켜세운 엄지를 대공에게 내보이자 그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덕분에요! 언제나 유능한 신관을 불러 주시잖아요?”

“그래, 그렇군. 다행이다.”

르베이너스는 귓속으로 전해지는 말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의 대화는 몹시 잠깐 이어졌으나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완전히 다른 롬포드의 태도 때문이었다.

여느 아버지와 딸의 대화라 해도 손색없을 듯했다. 애초에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그의 곰살궂은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뜬구름처럼 떠돌던 소문은 어쩌면 기성사실일지도 몰랐다.

공작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지 못했다. 흘깃흘깃 곁눈질하며 엿보는 그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 남자가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동일인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뭘 그리 훔쳐보고 있지?”

어느새 시선을 옮겨 르베이너스를 바라보는 롬포드에게선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내를 완전히 감춰 공허한 눈빛은 오히려 서늘한 두려움을 자아냈다.

“예? 그, 그게…….”

“아아. 실물은 처음이겠군.”

짐짓 건조한 어투와 달리 롬포드의 붉은 눈에는 흥미로운 놀잇감을 찾은 듯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이내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그에게선 천연덕스러움이 묻어났다.

“대신, 머리칼은 본 적이 있지 않나?”

롬포드는 제 옆에 가만 앉아 물끄러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에시엘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머, 머리칼이요? 크흠…….”

르베이너스는 대공의 손짓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움직임이 유독 느리게 보인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그의 생각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 더욱 긴장감을 불러왔다.

종내 롬포드의 손길이 멈췄다. 하지만 그의 손이 멈춘 곳은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닿는 허리춤이 아닌 어깻죽지 즈음에서였다.

롬포드의 손에는 다른 부분과 확연히 차이 나는, 마구잡이로 잘려 나간 듯한 머리칼이 쥐어져 있었다. 에시엘 본인마저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부분이었다.

“내 생각엔, 누군가 고의로 자른 듯하군.”

에시엘은 그제야 어지럽혀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납치 후로 이상하게 잘려 나간 머리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큰일을 겪은 뒤라, 그사이에 뭔가 있었겠거니 싶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대공 앞에서 벌벌 떨며 앉아 있는 남자와 갑작스레 불려 와 마주 앉은 자신. 그리고 여전히 위풍이 당당한 태도의 대공까지.

아무래도 남자는 자신에게 있었던 납치 사건과 관련 있는 인물일 듯했다. 에시엘은 제 추론이 맞다고 확신하는 한편, 롬포드의 능력에 새삼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범인을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사건의 주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에시엘은 남자를 애써 피하지 않고 눈 속 가득히 그의 얼굴을 아로새겼다.

자신을 대체 왜 납치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그쳐 묻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대공 앞에서 초조함과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서서히 몸을 일으킨 남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관용을 베풀어 주렴!”

“어머나…….”

남자의 돌발 행동에 에시엘의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르베이너스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에시엘에게 용서를 빌고 있었다.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그는 제 지위와 체면을 모두 내려놓은 듯 거침없었다. 아무리 딸처럼 키웠다 한들 공작의 친자가 아닌, 입양된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

아무리 제 납치를 사주한 이라지만 롬포드보다 나이가 많은 공작이 저러니 불편하기만 했다. 덩달아 좌불안석이 된 에시엘은 괜스레 롬포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조아린 공작의 모습을 개의치 않은 채 눈으로 훑을 뿐이었다. 마치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리석었어.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짓을 감히…….”

또다시 사죄하는 공작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저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쉽사리 마음먹을 수 있는 행동이 아님은 분명했다. 에시엘은 그런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물었다.

‘아니야. 더 이상은 안 돼.’

마음속으로 다짐을 새기는 그녀의 녹청색 눈이 더욱 총명하게 빛났다. 심호흡하듯 한차례 숨을 내쉰 그녀가 굳게 주먹을 쥐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롬포드는 픽― 하곤 들릴 듯 말 듯 한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네. 좋아요.”

“부디 자비를 베풀…… 어어?”

그제야 한참을 중얼거리던 르베이너스의 독백이 멈췄다. 그는 죄인처럼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시엘을 바라봤다. 한층 강단 있는 얼굴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저는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너무너무 괴로워요. 그래도, 아저씨를 용서할게요.”

“고, 고맙다! 고마워!”

“아저씨가 불쌍해서는 아니에요. 단지…….”

에시엘은 잠시 뜸을 들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다시금 르베이너스와 시선을 마주하는 그녀의 표정이 사뭇 건조했다.

“꼬투리 잡으려는 거예요. 앞으로 아저씨 보기 싫거든요. 내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마세요.”

“뭐, 뭐?”

“또, 우리 아버지 앞에도 보이지 마요. 절대요.”

“이, 이 무슨…….”

“내 말대로 안 하면 반드시 후회할 거예요.”

거침없이 용서를 빌던 르베이너스처럼 에시엘 또한 막힘없는 당찬 태도로 관용을 베풀었다. 재차 강조하는 말과 행동이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해맑던 소녀는 사라진 채, 전에 없던 모습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서 마치 롬포드가 떠오르는 듯한 순간이었다.

“가세요. 아저씨.”

르베이너스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뒤로 구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순탄하진 못했다. 순간 스텝이 꼬여 중심을 잃은 공작이 볼품없이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려 했으나 긴장이 풀린 나머지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그리고 찰나 마주친 롬포드의 시선도 냉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대신했다.

끝내 공작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응접실의 문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 나가는 모양새가 몹시 초라해 안타까울 정도였다.

짝―. 짝―. 짝―.

분위기를 환기하는 간결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에시엘은 단숨에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잘했다.”

곧장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정수리로 투박한 손바닥이 얹혔다. 이내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은 애쓴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성심껏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와 함께 마주쳐 오는 롬포드의 시선 역시도 다사로움이 가득했다.

“잘 시간이 지났겠군.”

“괜찮아요! 이제 막 잠이 오거든요.”

“우유를 준비하라 얘기해 놨다.”

“네? 우유요?”

“초콜릿 우유.”

“정말요? 와―, 감사합니다!”

에시엘의 말갛던 볼이 금세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낼 초콜릿 우유를 떠올려서인지, 생소하기만 한 롬포드의 칭찬을 떠올려서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답하듯 싱긋이 미소 짓는 에시엘의 눈매가 어여쁘게 휘었다.

“푹 자 두도록 해.”

* * *

침대에 걸터앉은 에시엘의 손에는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뜨끈하게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달큼한 향이 그녀의 콧속을 휘젓곤 폐부 속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

이곳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접했던 초콜릿 우유는 이젠 마시지 않으면 잠에 들 수 없을 정도로 의지하는 무언가가 됐다.

“에이, 아쉽다.”

에시엘은 얼마 남지 않은 음료를 보며 아쉬운 눈초리로 입맛을 다시다가도, 컵을 기울여 남은 것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혓바닥이 아리고 목구멍이 따가웠다. 마치 뜨거움에 덴 세포들이 날뛰는 것만 같았다.

협탁 위에 컵을 내려놓은 그녀는 주저 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노곤한 기분에 금방이라도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공님의 칭찬…….”

조금 전의 상황을 상기하는 그녀의 입가에 금방 미소가 생겨났다. 가족이라는 기분을 느낀 뒤에 받은 칭찬은 또 남다른 느낌이었다.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더욱더 가족이 되고 싶고, 더욱더 잃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에시엘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울타리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리 무너트리려 해도 소용없던 두껍고 단단한 목재에서 형식만 갖춘 무릎 높이의 울타리가 되기까지.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또 받고 싶다…….”

마지막 웅얼거림이었다. 졸음을 이겨 내듯 수차례 깜빡이던 그녀의 눈꺼풀이 머지않아 스르륵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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