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페르미아 레베카.
그녀는 레베카 백작 가문의 차녀로 태어나 기개를 떨치며 꿋꿋이 살아왔다. 가문을 이을 수 없다는 단순한 명목하에 비합리를 겪었을지도 모르는 그녀가, 가문의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건 다른 누군가의 선례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레베카 백작 가문의 장녀와 혼인이 이루어진 가문은 꽤나 능력이 좋았다. 가세에 보탬이 되어 금전난에 봉착한 가문을 일으킬 만큼 말이다. 자연히 이를 모두 보고 듣고 느끼며 자랐던 페르미아로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페르미아의 신조는 좋은 결혼이었다. 명예가 드높고 돈도 많다는 전제 조건에 합당한 상대를 만나, 여타 귀족들처럼 좋은 가족을 꾸리는 것이 작지만 굳센 소망이었다. 본보기가 되었던 자신의 언니처럼 말이다.
이렇듯 제 가문에 으스댈 만큼의 입지를 갖추기 위해서 자신보단 상대의 입지가 몹시 중요했다. 그것이 바로 제 가치가 되고 삶의 전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페르미아가 눈여겨본 상대는 레고니스 가문의 장남 테이시였다. 그에게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가문과 그것을 이끌 지성과 검술 실력, 게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뒤따랐다.
테이시는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여식 모두가 우러러보고 한 번쯤 호감을 품어 봄 직한 대상이었다. 개중엔 그의 옆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히 넘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페르미아는 전자에 속하는 이였고, 본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선 누구보다 으뜸인 테이시가 탐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란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겐 아버지의 뒷받침이 있었다. 바로 롬포드의 수지 타산적인 성향을 전부 파악한 후 거절할 수 없게끔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마치 누가 꾸며 내기라도 한 양, 모든 상황이 페르미아가 소망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쪽으로 굴러갔다.
이래로 레고니스 가문의 장남과 레베카 가문의 차녀 사이에는 미래를 약속하는 혼담이 오갔으나,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이렇다 하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페르미아가 자존심도 굽힌 채 레고니스 가문 저택까지 한달음에 달려오도록 만든 이유였다.
“테이시 님!”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고, 금빛 머리칼을 나부끼며 페르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기대감이 잔뜩 실려 있던 그녀의 얼굴은 삽시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페르미아는 호기로운 등장과는 달리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을 보기라도 한 듯 나릿나릿한 움직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그러졌던 낯은 점차 놀라움에 물들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아무렴 그녀가 마주한 광경이 경악스러울 만도 했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테이시가 웬 여자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온 거지?”
“대체…….”
테이시의 침착한 물음에도 페르미아는 답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눈이 바쁘게 움직이며 테이시와 여자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디저트를 수차례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테이시 님, 이 계집아이는 누구예요?!”
“…….”
“왜 같이 차를 마셔요? 왜요?”
페르미아는 검지를 곧게 뻗어 낯선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한 손은 화를 참듯 굳게 주먹 쥔 채였다.
“페르미아. 시답잖은 용무라면 돌아가 줬으면 하는데.”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고 이 아이, 계집아이가 아니라 에시엘이야.”
사뭇 단호하게 말하는 테이시의 모습에 페르미아는 우물쭈물할 뿐,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다. 자존심마저 굽히고 찾아왔기에, 그와 할 이야기가 남은 그녀로선 쉬이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시엘. 이쪽은 페르미아.”
“안녕하세요. 아하핫……. 여기 같이 앉아요!”
이어지는 테이시의 소개에 어색하게 웃은 에시엘이 살짝 비켜 앉으며 제 옆을 팡팡 두들겼다.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테이시의 이름을 반갑게 부른 것과 찬연한 금빛 머리칼로 미루어, 이 소녀는 테이시와 결혼이 약속된 인물일 터였다.
“아니!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내 자리는 여기야.”
앙칼지게 답한 페르미아는 단숨에 테이시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야무지게 팔짱을 낀 채 예리한 눈으로 에시엘을 노려봤다. 나름대로 정체를 파악하려는 모양이었다.
‘으아,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테이시와 즐겁게 보냈던 시간이 오늘만큼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그저 거북할 따름이었다.
에시엘은 애먼 허공을 쳐다보기도 하고 괜스레 찻잔을 매만지기도 하는 둥, 부지런히 딴청을 부리면서도 자리를 피해 주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너,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어느 가문이야?”
“저는 원래…….”
“얘기 들었을 텐데. 입적된 아이가 있다고.”
“세상에! 온갖 소문의 주인공이 너구나?”
페르미아는 서재에 들어선 이래로 에시엘에게 가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에시엘이 입적된 지도 몇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제국에는 레고니스 가문의 소식이 가장 뜨거운 가십거리였다. 그만큼 그녀는 에시엘에 대한 엄청난 궁금증을 내비쳤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질문 공세를 퍼부을 기세로 눈을 빛내는 페르미아에게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시답잖은 용무가 아니라고 했잖아.”
한층 가라앉은 테이시의 음성은 평소보다 야멸찬 분위기를 풍겼다. 단번에 상황을 정리하려는 의도였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다간, 페르미아의 성미에 더욱 끈덕지게 달려들 것이 뻔했다. 그녀를 적당히 쳐 내어 귀찮은 상황은 미연에 방지하려는 생각이었다.
이에 페르미아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입술을 꾹 물었다. 지금의 그라면 자신을 금방이라도 내쫓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음……. 나는, 찻잔을 가져올게!”
삭막해진 분위기 속에 마침 우연찮게 떠오른 것은 찻잔이었다. 에시엘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 달가운 속내는 감춘 채 두 사람을 향해 예의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깐.”
테이시는 순식간에 에시엘의 손목을 붙들어 그녀를 멈춰 세웠다. 급하게 그러쥐는 행동에선 그답지 않은 조바심이 엿보였다.
“맛있는 케이크인데 같이 먹어야지.”
“먼저 먹어! 금방 갔다 올게.”
“그냥 앉아.”
테이시는 손목을 붙든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에시엘을 제자리로 이끌었다. 맥없이 끌려온 그녀는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았다. 괜히 맞은편에 앉은 페르미아의 눈치가 보였다.
‘지난번 약속 때문인가?’
에시엘은 테이시의 완곡한 표현이 그저 약속을 함께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머리띠를 선물했던 그에게 답례처럼 제안한 티타임에 대한 약속 말이다.
하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페르미아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인상을 찡그린 그녀의 미간 사이에 미약한 주름이 생겨났다. 또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눈초리에는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어차피 페르미아는 안 마실 거야.”
“…….”
“차를 안 좋아하거든. 그렇지?”
“어머나! 테이시 님, 기억하실 줄 전혀 몰랐어요!”
페르미아는 손뼉까지 치며 순식간에 기쁜 얼굴을 했다. 테이시를 흡족하게 바라보는 그녀에게선 속마음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좀 전의 의심스러웠던 것은 몽땅 잊고, 아직 저에게 관심이 있다고 확신을 하는 듯했다.
“한번 얘기했을 뿐인데 기억해 주시다니…….”
페르미아는 감격스러움이 가시지 않는 듯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보다는 혼자 떠드는 것에 가까웠음에도 조잘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테이시도 차만 홀짝이는 에시엘을 이따금 살필 뿐, 페르미아의 대화에 가벼운 끄덕임만 보이며 그녀를 저지하지도 부추기지도 않았다.
“아! 테이시 님, 우리 결혼은 어떻게 된 거예요?”
“…….”
“소식이 없길래 제가 직접 찾아왔는데에…….”
사뭇 쑥스러운지 페르미아가 말꼬리를 늘이며 고개를 숙였다. 제 어깨 아래로 늘어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에서도 그녀의 수줍은 마음이 잔뜩 드러났다.
하지만 테이시의 대답은 곧장 들리지 않았다. 찻잔을 든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손잡이를 매만지다가도 이따금 눈앞의 에시엘을 힐긋 쳐다봤다. 마치 그녀의 눈치라도 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에시엘은 제 개인 접시에 덜어 놓은 케이크 조각을 포크로 괴롭히고 있었다. 작은 구멍들이 가득한 케이크 조각은 잔뜩 헤집어져 있었다. 약 10여 분 전부터 대화에 낄 수 없었던 탓이었다. 작정하고 자신을 배제하는 페르미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이제 슬슬 한계였다.
“글쎄. 모르겠다.”
“네? 모르겠다니요?”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없어서.”
제 할 말만을 끝낸 테이시는 식어 버려 미지근해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제야 느껴지는 약간 달큰한 맛에 그의 인상이 설풋 찡그려졌다. 뜨거움이 가신 차는 역시나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
“네? 네? 물어봐 주세요!”
애교를 부리듯 잔뜩 보채던 페르미아가 은근슬쩍 테이시의 팔을 붙잡았다. 약한 힘에 의해 흔들리는 그의 팔이 나른히 움직임을 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의식적으로 손을 밀어 내는 그는 다소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테, 테이시 님……?”
심히 당황한 페르미아는 멍하니 제 손을 바라봤다. 제법 부드럽게 이어지는 대화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선을 긋다니, 아차 싶은 생각에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다. 의도치 않은 순간에 알아챈 테이시의 감정은 예상한 것임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제 야망과 다름없는 테이시와의 결혼을 위해서라면 이런 거절쯤은 무뎌져야 했다. 어찌 됐건 결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면 다 괜찮을 자신이 있었다.
페르미아의 말소리를 듣기는 한 건지 계속해서 에시엘을 흘겨보는 테이시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분명한 건, 그의 시선이 온전하게 에시엘에게 닿아 있단 사실 뿐이었다.
“제 말…… 듣고 계신가요?”
“뭐, 시간 날 때.”
언젠가 느꼈던 건조한 어투였다. 이내 테이시는 포크로 크게 찍어 낸 케이크 덩어리를 입 안 가득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