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6화 (76/80)

76.

휘잉―, 휘잉―.

테이시의 날렵한 칼날이 바람을 가르고 내리꽂히는 소리가 몹시 서늘했다. 훈련용 짚 인형의 곳곳이 너덜너덜해져 지푸라기가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미 만신창이로 만들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는 듯 연신 검을 휘둘렀다.

테이시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어쩌면 내재되어 있던 그의 역량이 점차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와! 최고다!”

에시엘은 테이시의 근처에 앉아 그의 움직임을 따라 휘둘러지는 검과 호흡을 맞추듯 신이 난 추임새를 넣기 바빴다. 몇 날 며칠을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멋진 장면이었다.

“앗. 떨어트리면 안 되지.”

그녀의 허벅다리 위에는 늘 그렇듯 노란 통이 놓여 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간식이 가득 담긴 그것을, 혹여나 바닥에 떨어트려 뒹굴기라도 할까 살포시 감싸 쥔 채였다.

테이시는 연신 검을 휘두르다가도 에시엘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이제는 들려오지 않으면 왠지 허전한 소음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번 조금씩 달라서,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테면 제 신발의 앞코를 턴다든가 간식 통을 슬쩍 열어 본다든가 하는 행동들이었다.

“이제 너도 이리 와 봐.”

검을 바닥에 내려놓은 테이시가 이마의 땀을 대충 닦으며 말했다. 그의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에시엘에게 더없이 반가운 부름이었다.

“으응. 떨린다!”

에시엘은 간식 통을 자리에 내려놓으며 한차례 깊은 심호흡을 했다. 지난 몇 년간 수차례 연습을 했다지만, 무엇이든 순식간에 벨 수 있는 검이라는 생각을 하면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이와 동시에 테이시는 그녀의 전용 검을 가져와 건넸다.

“네 마음대로 휘둘러 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은 검사받는 날.”

“그럼 나, 나 혼자서?”

잔뜩 당황한 에시엘의 물음에도 테이시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단지 목검일 뿐이지만, 그의 지도 없이 다룬 적은 없었다. 마치 오랜 스승 앞에서 그간 연마한 실력을 처음 선보이는 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후우…….”

진하게 뱉는 숨을 타고 긴장감이 사그라들길 바랐다. 에시엘은 손잡이를 더욱 꽉 쥐곤 목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뒤이어 부웅― 부웅― 둔탁한 소리가 두어 차례 들렸다.

“테이시, 봤어?! 어때?”

잽싸게 그를 돌아보며 반짝이는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깃든 채였다. 발까지 동동 구르며 들려올 평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잘했어.”

테이시는 에시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담백한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는 목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신, 검은 이렇게 쥐어.”

“어어?”

“잘 기억해.”

에시엘이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자그만 손 위로 거칠게 다져진 테이시의 손이 포개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일 뿐인 크기 차이에도 훨씬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느껴지는 까슬한 촉감과는 달리 온기를 품은 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이내 목검을 고쳐 쥐여 주는 사뭇 다정한 손길이 있었다. 맥없이 따라 움직이는 그녀의 손과 시선이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긴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시범을 보이듯 약하게 휘두르는 행동에 에시엘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고마…….”

그리고 그때였다.

“테이시 님!”

낯설면서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이어 뒤따르는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너른 연무장에 크게 퍼졌다.

“설마, 제가 온다고 했던 거 잊으셨나요? 얼마나 찾아다녔는데요!”

페르미아의 등장이었다.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온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말을 쏟아 내기 바빴다. 서운함을 내비치듯 살짝 찌푸린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네? 대체…….”

페르미아의 관심은 온통 테이시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숨을 천천히 가다듬으며 시선을 자연스럽게 내리까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 곳에서 멈춘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테이시 님,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아, 그게―.”

친밀하게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이었다. 불과 몇 분 전보다도 더 찡그려진 인상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다급히 무언가 덧붙이려는 에시엘의 목소리에는 마치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에 테이시의 낯빛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르미아는 서슴없이 말을 이었다.

“둘이 손을 왜 잡고 있어요?”

“…….”

“당장 놔, 당장!”

페르미아가 억지로 헤쳐 놓는 손길이 다소 사나웠다. 잇따르는 앙칼진 눈초리가 에시엘과 테이시를 빠르게 번갈아 봤다. 내쉬는 숨소리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씩씩거렸다.

순간 이성을 잃은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모습만 선연했다. 대상이 누구고 상황이 어떻건 간에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성질은 그 누구도 다루지 못한 그녀의 고질이었다.

결국 그녀는 에시엘의 손에 들려 있던 목검마저 빼앗아 힘껏 팽개쳤다. 저 멀리 떨어지는 목검이 처량하게 나뒹굴었다.

“어, 내 검…….”

놀라서 다물어지지 않는 에시엘의 입술 사이로 멍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연히 서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테이시의 시선이 있었다.

“저까짓 검이 뭐가 중요해!”

“나한테는…….”

“조용히 해! 너 테이시 님이랑―.”

“그만.”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말하는 테이시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은 상태였다. 상황을 정리하듯 단언하는 태도로, 짧지만 강력하게 페르미아를 중재하고 있었다.

이내 감았던 눈을 뜨는 그의 눈빛이 몹시 서늘했다. 페르미아로선 이처럼 서늘한 눈빛은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고 어떠한 말도 내뱉기가 어려웠다.

“페르미아. 검을 던진 행동, 사과해.”

“테, 테이시 님.”

“남의 것을 함부로 던져선 안 되지. 그게 검이라면 더. 위험하잖아.”

“그, 그렇지만…….”

페르미아는 선뜻 사과하지 못했다. 연신 테이시의 눈치만 살피는 그녀의 입술이 마구 짓이겨졌다. 자존심을 굽히는 행동은 추호도 하기 싫었으나,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테이시가 에시엘의 편을 드는 것처럼 되어 버린 상황이 무척 분하고 짜증이 났다.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입적되었다 할지라도 한낱 볼모였던 저 계집과 결혼을 논하는 자신 사이에서, 그녀를 옹호하다니.

“검술을 알려 주는 중이었어.”

“검술을요?”

다소 이질적인 설명에 페르미아의 머릿속이 더 의아해졌다. 레고니스 가문의 누구도 가르침을 베풀 만큼 자애로운 사람은 아닐 터였다. 지금의 그는 제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 그랬구나. 미…… 미안.”

계속해서 테이시의 눈치를 힐금힐금 살피던 페르미아는 마지못해 입을 여는 듯했다. 그의 화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네, 괜찮아요. 부서진 것도 아니니까요.”

페르미아가 무척 작은 목소리로 사과를 건네는 반면 에시엘의 태도는 덤덤하기만 했다. 그녀는 어느새 주워 온 목검으로 애꿎은 바닥을 콕콕 찌를 뿐이었다. 그리고 이를 은근히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던 테이시의 시야에 노란 통이 들어왔다.

“에시엘, 간식…….”

“테이시 님! 테이시 님!”

페르미아는 언제 풀이 죽었었냐는 듯 호들갑을 떨며 시선을 끌었다. 그것이 하필 테이시가 에시엘에게 말을 걸던 순간이었으나 페르미아의 고의성을 알 순 없었다.

에시엘에겐 지난번처럼 또다시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가문의 장남인 테이시와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는 페르미아와 굳이 척져서 미움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 사이에서 괜스레 눈치를 보듯 분위기를 살필 뿐이었다.

“저한테도 검술 알려 주세요. 네?”

“글쎄.”

“저도 배우고 싶어요!”

“네가 배워선 득이 될 게 없어.”

테이시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제 검을 들어 정리하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상대가 나타난 이상 더는 연습을 할 수 없을 듯싶었다.

계속해서 테이시의 뒤를 쫓는 페르미아는 그를 보채기 바빴다. 눈에 거슬리는 붉은 머리칼의 아이가 테이시와 하는 것을 저도 꼭 하고 말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누가 뭐래도 그와 가장 가까운 여자는 페르미아, 자신이어야 했다.

“그래도요, 배울래요!”

“정 그렇다면 네 가문의 기사단에게 얘기해.”

“네? 왜요? 저 아이는 알려 주잖아요.”

손가락질로 가리키는 곳엔 에시엘이 있었다. 테이시 또한 그 끝을 힐금 쳐다보다가 바삐 눈길을 거뒀다.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인 노란 통이 함께 시야에 들어온 탓이었다. 저게 뭐라고 자꾸만 눈에 밟혀 마음이 쓰였다.

테이시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에시엘과의 시간을 자꾸 방해하는 상황이 심기를 거슬리게 했으나, 그렇다고 아버지가 정해 준 결혼 상대를 처참히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네게는 알려 줄 시간 없어.”

“너무해요!”

“분명히 말했으니 기억해.”

제 뜻을 확실하게 전하는 테이시의 눈빛은 오히려 건조했다. 오롯이 담긴 감정은 그의 차가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페르미아에 대한 분명한 표현이었다.

뒤를 돌아섰을 땐 에시엘이 가까이 와 있었다.

“나, 난 이만 갈게. 테이시. 오늘도 고마워.”

에시엘은 자신의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옆에서 저를 지켜보는 페르미아의 따가운 눈총 탓에 말이 절로 더듬어졌다.

그리고 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제 팔이 덥석 붙잡혔다.

“잠깐! 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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