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를 장악한 아기 볼모가 되었습니다-77화 (77/80)

77.

“왜, 왜요……?”

에시엘은 제법 세게 붙잡힌 팔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는 페르미아는 더욱 상대하기 어려웠다. 이 순간 저도 모르게 삼킨 침에 꿀렁이는 목울대가 괜히 야속했다.

“방금 뭐라고?”

“네?”

“테이시 님한테 말이야, 뭐라 한 거냐고!”

페르미아는 에시엘을 무척이나 보챘다. 화를 털어 내듯 약하게 흔드는 팔뚝을 따라 에시엘의 몸이 맥없이 움직였다.

“이만 갈게. 테이시, 오늘도 고마워……?”

얼떨떨하게 되뇌는 말끝이 어색하게 올라갔다. 페르미아가 갑작스레 쏟아 내는 분노의 화살이 저에게 향하게 된 영문을 도통 알 수 없었다.

“테이시? 감히 테이시 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는 거야?”

“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네가 뭔데 테이시 님을 그렇게 불러?”

눈에 불을 켜고 째려보는 시선은 여전히 모질게만 느껴졌다. 에시엘은 차마 대답도 못 한 채 눈만 끔벅거렸다.

당사자도 지적하지 않았던 터라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고의도 아니었고 자연스럽게 했던 행동이기에 더욱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말해 봐!”

페르미아는 에시엘의 팔뚝을 조금 더 세게 흔들었다. 오로지 제 목적을 취하려는 그녀였기에 테이시에 관한 일이라면 한층 극성을 부렸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은 지금, 페르미아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와중에도 테이시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러라 했어.”

에시엘의 말을 대신하는 테이시였다. 그는 덤덤히 말을 뱉으며 여전히 팔뚝을 붙잡고 있는 페르미아의 손을 떼어 냈다. 그의 움직임을 좇는 페르미아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럼 저는요? 아직 저한테도 허락되지 않은 건데, 고작 저까짓 게!”

그리고 별안간 소리를 버럭 지른다. 팍 구겨진 테이시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됐으니 그만 가.”

“그래, 너 얼른 가. 그만 거슬리게 하란 말이야.”

반색하는 페르미아의 시선이 빠르게 에시엘을 향했다. 거만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쳐들자 시선은 저절로 내리깔게 되었다. 한결같이 무례하게 구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페르미아, 이제 돌아가.”

“네? 저, 저요?”

화들짝 놀라는 페르미아의 시선이 테이시를 향했다. 일말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는 몹시 무미건조했다. 번복은 없을 듯했다.

“배웅은 못 해 줘.”

“테, 테이시 님…….”

페르미아의 목소리는 조금 울먹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녀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저 또 올 거예요! 계속 올 거예요!”

“…….”

양 주먹을 꼭 쥔 페르미아는 다짐처럼 말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어렵지 않았다. 자존심 또한 이미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으니까.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자존심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끝내 페르미아는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선 그 누구의 배웅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를 지켜볼 뿐이던 테이시는 제 옆의 에시엘을 힐금 훔쳐보고는 말했다.

“잠깐.”

금방 걸음을 옮기려던 에시엘을 불러 세우는 소리였다. 그것이 조금은 다급해 보이기도 했다.

“응? 나?”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디를?”

“가자.”

테이시는 끝내 행선지도 알리지 않은 채 무작정 에시엘을 이끌었다.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레 감싸 쥔 채였다.

* * *

그들은 5분이 채 안 되는 거리를 사소한 대화 없이, 그저 향했다. 왠지 기분 나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에시엘은 묵묵히 앞장서는 테이시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저보다 훌쩍 커 버린 키며 널찍해진 어깨와 등판 같은 그의 외양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였을지, 머릿속을 되짚어 보다 이내 포기했다. 이제 와 알아차린 테이시의 뒤태에선 점차 소년의 티가 사라지고 있었다.

더구나 붙들린 제 손목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그의 손과 맞닿은 제 손목에선 이상하게 뜨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뭘까? 이따 슬쩍 물어보러 갈까…….’

에시엘은 애써 객쩍은 생각을 하며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시선도 땅에 처박은 채 테이시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야!”

그러던 중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앞에서 멈춰 서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잡생각에 잠겨 있던 에시엘이 테이시의 등에 부딪히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창피해, 창피해, 창피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마를 마구 문지르는 모습에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그 짧은 찰나에 고개를 들지 않으리란 다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괜찮아?”

“어, 으응. 그럼!”

“조심해.”

걱정스레 돌아본 테이시의 물음에도 에시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빠르게 긍정적인 고갯짓만 해 보일 뿐이었다.

“들어가자.”

피식 흘리는 싱거운 웃음과 함께 에시엘의 이마에 따뜻한 무언가가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곧장 눈을 뜨자 멀어지는 테이시의 손이 시야에 들어찼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어리벙벙한 에시엘은 아무 말도 못 했다. 테이시는 이미 열린 문에 기대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실례합니다.”

에시엘은 누구에게 전하는지 모를 인사말을 건네며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선 테이시와 눈이 마주쳤을 때엔 괜스레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여기 누가 쓰는 곳이야?”

방 안을 휘둘러본 에시엘이 말했다. 군데군데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있어 누군가 지내는 곳이라는 느낌이 물씬 든 탓이었다.

“내가.”

“어?! 진짜?”

테이시의 짤막한 답변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놀라 되묻는 에시엘의 반응에도 그는 제 어깨만 으쓱이고 마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방은 생각보다 밝은 분위기를 풍겼고, 그런 부분이 의외로 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소파와 테이블, 작은 협탁과 침대, 서재를 작게 옮겨 놓은 듯 무수한 책이 꽂힌 서가까지. 다소 단조로움이 느껴질 법한 가구들인데도 에시엘의 눈에는 그저 새롭고 신선하게 와닿았다.

“와, 꽃이다!”

개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테이블의 꽃이었다. 화병에 꽂힌 새하얀 리시안셔스는 단 몇 송이뿐임에도 몹시 진한 향을 풍겼다.

테이블 근처로 다가간 에시엘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까이에서 더 짙게 풍기는 꽃향기는 순식간에 폐부 깊숙이까지 모두 메웠다가 삽시에 빠져나갔다.

에시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꽃 덕분인지 한층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 봐.”

테이시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서가 쪽을 향했다. 그곳의 한편에 놓인 간이 테이블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그는 왜인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 옆에 섰다. 차곡차곡 쌓인 것들 위로 손을 얹더니 톡톡톡 노크하듯 상자를 약하게 두들겼다.

“그게 뭐야?”

“네가 좋아한다고 했던 거.”

“내가……? 저렇게 작은 걸?”

에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좋아한다고 떠들었던 것들이야 많지만, 이토록 작은 상자에 알맞게 담길 무언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만만하게 주는 것인지, 얼른 상자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흔들어 봐도 돼?”

“안…….”

애초에 테이시의 말을 따를 마음은 없었는지, 그가 첫마디를 내뱉는 순간부터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에시엘이 손목을 흔드는 속도에 맞춰 이따금 쇠 같은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흠, 소리를 들어도 모르겠다. 그냥 열어 볼게!”

“하, 큰일이네.”

천진난만한 에시엘의 반응에 피식 실소를 흘린 테이시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곧 그의 귓가에는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어어? 이거…… 티스푼이잖아?”

장난감처럼 마구 흔들어 버린 탓에, 갖가지 티스푼은 틀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뒤섞여 마구잡이로 놓여 있었다. 티스푼 곳곳에 박힌 보석 조각으로 미루어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할 터였다.

“여기 다른 상자에, 숟가락도 있어.”

“뭐? 숟가락까지?”

“취향을 잘 몰라서 종류별로 준비했어.”

테이시는 수십 개 쌓인 상자 중 가장 바닥에 깔린 것을 가리키며 말을 덧붙였다. 티스푼과 숟가락을 왜 주는 것인지, 도무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설마…….’

에시엘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쌓여 있는 상자와 티스푼, 테이시를 번갈아 봤지만 뚜렷한 연관성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예쁘다고 했잖아. 그냥, 선물이야.”

“어? 그, 그렇긴 하지만…….”

혹시나 하던 생각은 테이시의 한 마디에 사실이 되었다. 그는 티스푼의 장식이 예쁘다던 에시엘의 말을 기억하고 이 모두를 준비한 것이었다.

잔뜩 동그래진 눈으로 에시엘이 손에 들린 상자 속 마구 뒤섞인 티스푼을 가만 내려다봤다. 당시에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무심코 내뱉은 거짓말이었는데. 심지어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예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머지않아 끙 앓는 신음과 함께 입술을 꾹 물었다. 생각에 골몰한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약하게 생겨났다.

“……마음에 안 들어?”

“에이, 그럴 리가! 고마워, 엄청 예뻐! 최고야!”

내색하진 않으려는 듯 보이지만 은근슬쩍 묻는 테이시의 얼굴엔 시무룩한 기색이 비쳤다. 에시엘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아무래도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이를 알아챈 그녀가 들고 있던 상자를 허둥지둥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양 엄지를 눈앞에 턱 하니 들이밀었다.

“매일 바꿔 가며 써도 1년은 거뜬하겠다. 그치?”

거기에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테이시를 추켜세웠다. 그제야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전부 에시엘 네 방으로 옮겨 놓으라 하지.”

“저, 전부를?!”

“응. 다 네 거니까.”

차분하지만 힘이 실린 어투에 차마 토를 달 수 없었다. 언제 호출했는지도 알 수 없건만, 순식간에 등장한 수하의 손에는 벌써 상자가 들려 있었다. 모두가 테이시의 진두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 이걸 다 어쩐다!’

에시엘의 어색한 웃음 내면에선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