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벌써 오늘이 며칠째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페르미아의 행동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쥔 부채 끝이 파들파들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페르미아는 바지런히 출근하는 회사원처럼 레고니스 저택에 발 도장을 찍었다. 삼엄하게 정문의 경비를 서는 기사도 그녀가 하도 난리를 친 탓에 이제는 바로 문을 열어 줄 만큼 익숙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이유에는 더는 오가지 않는 테이시와의 혼담이 큰 몫을 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해 당사자인 그에게까지 수차례 물었음에도 명백한 답이 돌아오지 않아 초조했다. 때문에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그녀의 이면에 늘 내재하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난다구!”
페르미아는 부채를 힘 있게 펼쳐서 연신 부채질을 했다. 부채가 빠르게 팔랑였으나 그녀의 열을 전부 식혀 주지 못했다. 고작 부채질 하나 마음대로 안 되니, 오히려 신경질을 돋우는 것만 같았다.
더구나 제 가문에서는 이렇다 할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결혼을 추진하던 부모는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치 레고니스 가문과의 결혼을 쉬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오늘도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부채질을 멈춘 페르미아는 손바닥에 부채를 내리쳐 접었다. 바람 소리가 사그라든 마차 안에는 순식간에 고요함이 흘렀다.
불안한 마음에 기름이라도 붓듯, 테이시를 찾아갈 때면 늘 함께 있던 붉은 머리칼의 아이는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가문에 입적되었으니 그의 동생이나 다름없을 테지만 함께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심기가 거슬리게 했다.
“아가씨, 곧 도착합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페르미아는 가방에 부채를 챙겨 넣으며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리란 다짐을 했다.
* * *
백작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으리으리한 대공가는 정원마저도 광대한 면적을 자랑했다. 처음에는 괜히 기가 죽고 눈이 휘둥그레졌었으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거닐 만큼 익숙해져 버렸다.
“어차피 다 내가 누리게 될 것들 아니겠어?”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을 하는 페르미아의 얼굴에 금세 기분 좋은 미소가 생겨났다. 비록 잠시 분위기가 좋지 않지만 그런 것쯤은 충분히 견딜 만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테이시와의 성공적인 결혼을 이뤄 내고 말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후후. 오늘은 어디 계시려나.”
페르미아는 한껏 나아진 기분으로 분주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푸르름이 가득하던 정원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대상을 발견했다.
“쟤 왜 저기 있지……. 그럼 혹시 테이시 님도?”
햇볕을 받은 새빨간 머리칼은 더 눈에 띄었다. 페르미아는 걸음을 멈추고 에시엘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하지만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에는 분수대의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다른 누군가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인가?”
잠시 고민에 빠진 페르미아는 고개를 갸웃하곤 에시엘을 더욱 노려봤다. 그런들 테이시의 행방을 알 리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짧은 고민 끝에 시선을 떼려는 순간, 에시엘이 돌아서는 바람에 돌연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어? 안녕하세요!”
페르미아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한껏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제법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에시엘을 무시한 채 자리를 떠나 버릴까 싶었으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페르미아는 그녀에게 휘적휘적 다가가 팔짱을 끼고 선 채 앙칼지게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날씨가 좋아서 산책하러 나왔어요.”
“……웬일로 혼자 있네?”
“네?”
덧붙이는 페르미아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알아듣지 못해 되묻는 에시엘의 물음에도 인상을 찌푸릴 뿐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녀로선 에시엘에게 테이시의 행방을 묻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테이시의 곁에 항상 붙어 다니는 듯 보이는 에시엘은 제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인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한숨을 쉬듯 큰 숨을 토해 낸 페르미아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왜 혼자 있느냐고!”
“어? 그야…….”
“또 시비 걸러 온 거야?”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테이시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그는 에시엘의 앞을 가로막듯 서서 페르미아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테, 테이시 님. 다 오해예요. 시비 거는 거 아니었어요!”
“그럼 내가 들은 건 뭔데.”
“단지 반가워서 말을 걸었을 뿐인데…….”
아래로 처진 입꼬리가 정말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페르미아는 테이시 뒤의 에시엘을 힐끔 훔쳐보며 눈짓을 보냈다. 얼른 상황을 설명하라는 듯 말이다.
“응! 맞아. 인사만 하고 있었어.”
“보통 인사를 악 지르며 하진 않지.”
“에이, 그럴 수도 있지. 페르미아 님이 많이 반가웠나 봐! 하하.”
에시엘은 상황을 모면하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에게 페르미아는 달갑지 않은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그렇다고 테이시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더 불편해질 게 뻔하니 차라리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물쩍 무마하는 게 나으리란 생각이었다.
끝내 어색한 웃음소리가 사그라든 그곳은 물소리, 새소리만 들려왔다. 괜스레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에시엘의 시야에 평소와 다른 테이시의 옷차림이 보였다.
“테이시, 어디 갔다 와?”
“승마 훈련이 있었어.”
“와, 멋지다! 다음에 구경시켜 줘.”
“그래. 얼마든지.”
단숨에 승낙하는 말이 이어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이를 가만 듣고 있던 페르미아는 참지 못하고 테이시를 번뜩 올려다봤다.
“저도 보고 싶어요. 저도요!”
“글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쟤는 되고 저는 왜 안 돼요?”
“페르미아, 그만해. 이럴 거면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그시 감겼다가 뜨이는 테이시의 붉은 눈에 무미건조함이 그득했다. 사사건건 에시엘을 물고 늘어지며 성가시게 구는 페르미아를 받아 주기엔 인내심이 더는 버텨 주질 않을 듯했다.
갑작스러운 대치에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에시엘뿐이었다. 그를 말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망설임 가득한 손이 허공에 맴돌았다.
“테이시 님은 저를 더 우선시해야 하는 거잖아요!”
“왜 그래야 하지?”
“당연히 저는…….”
목구멍에서 걸린 말이 차마 새어 나오지 못했다. 테이시가 풍기는 냉정함은 롬포드를 닮아 있었다. 말투에서도 묻어나는 차가움이 현실을 바로 보게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짧게 혼담이 오갔을 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마저도 저 혼자 안달복달하는 지경이었으니 충분한 근거가 되긴 모자란 감이 있었다.
페르미아는 입술을 꾹 물었다. 제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쓰라렸다. 또 한편으론, 테이시가 가진 마음에 대한 의심도 들었다.
에시엘에게 보이는 태도의 의미가 무얼까. 단순히 가족의 일원으로서 베푸는 배려라기엔 한도를 훨씬 넘어 보이는 호의였다. 이들은 평범한 가문이 아닌 잔악무도한 레고니스 가문이었기에 더더욱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유를 얘기하지 못하는군.”
“테이시! 잠깐 시간 있어?”
에시엘은 다급히 테이시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페르미아에게 향하던 시선을 제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기엔 마음이 좋지 못했다. 이곳에 처음 와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자신이 떠오른 탓일지도 몰랐다.
“아직. 일정이 바빠서.”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주 잠깐이라면 괜찮아.”
망설이는 듯하다 끝내 덧붙이는 말이었다. 이에 에시엘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생겨났다.
“좋아! 그럼 다 같이 더위를 날려 볼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싫어! 됐다구!”
에시엘의 신나는 외침에 각기 다른 반응이 따라왔다. 그녀의 말에 반문하며 순순히 이끌리는 테이시, 생각에 잠겨 있다 기겁하며 거절하는 페르미아였다.
이들의 반응은 개의치 않는지 멋대로 잡아끄는 힘이 제법 셌다. 에시엘이 거침없이 끌고 가, 자신만만한 듯 허리춤에 손을 얹어 보인 곳은 정원의 분수대 앞이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는 이따금 작은 새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또한 크기도 크기지만 아름다운 조각이 더해져 정원의 볼거리 중 하나였으나 여전히 그녀의 의중을 짐작하긴 어려웠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테이시 먼저!”
에시엘은 손을 모아 분수대의 물을 떠 테이시에게 뿌렸다. 말릴 새 없는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어때, 시원하지? 더위도 날아가고 말이야.”
“이런 물놀이도 나쁘지 않네.”
가볍게 막을 뿐,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 테이시의 낯에 생기가 돌았다.
서로 물을 뿌리며 천진하게 놀이를 즐기는 사이, 한쪽에 서 있던 페르미아의 낯빛은 점차 어두워졌다.
제삼자가 되어 즐겁게 노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관계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사람이 마치 저인 것만 같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을 텐데 말이다.
주먹을 말아 쥔 페르미아는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그들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에시엘의 몸이 페르미아에 의해 강하게 밀쳐졌다.
첨벙―.
물에 빠진 그녀는 다행히도 금세 고개를 들어 숨을 뱉었다.
“푸하!”
“페르미아!”
“조심히 놀아야지. 내 드레스에 물이 다 튀었잖아.”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테이시는 페르미아를 붙잡고 다그치다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빠르게 에시엘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레 부축하는 그가 평소답지 않게 몹시 걱정스러운 투로 에시엘의 상태를 수차례 물었다. 괜찮냐, 춥지 않냐, 열이 나면 알리라는 둥, 자칫하면 당장 신관을 부를 기세였다.
“나 괜찮아. 페르미아 님, 저 괜찮아요! 걱정 마요.”
“하!”
페르미아는 애써 걱정을 덜어 내려는 에시엘의 모습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사실 물 같은 건 조금도 튀지 않았다. 좋아 보이는 둘의 모습을 그저 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금 장난을 친다고 한들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원망 가득한 눈으로 둘을 노려보다가 끝내 돌아서는 그녀의 팔이 덥석 붙잡혔다.
“페르미아.”
“네, 네?”
“에시엘에게 사과해.”
“사과를…… 하라고요?”
“당장.”
하지만 테이시의 이러한 반응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이토록 단호하고 차갑게 딱 잘라 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상처받은 제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미안.”
결국 페르미아는 들릴 듯 말 듯 한 사과를 짓씹듯 건넸다. 마음 깊은 곳부터 차오르는 불쾌감에 속이 부글거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뱉은 채 돌아서는 그녀의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당차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고작 저런 예상치 못한 변수에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까 봐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런 상황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대론 안 되겠어.”
페르미아는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며 휙 뒤를 돌아봤다. 그들은 어느새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띤 채 에시엘을 바라보는 테이시의 얼굴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의 겉옷이 어느새 에시엘의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그가 줄곧 보이던 무심한 모습과 대비되어, 한동안 자리에 서서 멀거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