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체육 대회
노래 부르며 춤추는 걸 지그시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둘을 평가해봤다.
솔직히 둘 다 잘해서 굳이 한 명을 골라야 하는 건가 고민됐다.
그래도 둘 다 잘한다고 하면 분명 납득하지 않을 게 뻔하다.
어떻게든 둘 중에 잘하는 사람을골라내야 한다.
“어때? 누가 더 센터에 어울릴 거 같아?”
“야, 나지? 빨리 나라고 말해.”
“고민하고 있잖아 조용히 좀 해.”
“고민할 게 뭐 있어! 누가 봐도 내가 더 잘했는데!”
“그건 얘가 정하는 거니까 기다리기나 해.”
박하연은 아무 말도 없는 날 보고 고민하고 있다고 하고 있지만,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둘 다 잘한다.
이 생각밖에 없다.
특히 박하연은 노래나 춤이 많이 늘었다.
걸즈세븐이 완전히 망해버린 프로그램이 되긴 했지만, 한 달 동안 숙박까지 하면서 몰두한 연습은 헛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혜림이뒤떨어진다는 건 아니다.
김혜림은 원래도 잘했던 만큼 더 잘해졌다.
춤은 원래 잘 췄는데, 노래가 확실히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누군가 한 명을 고르라니, 너무 무리한 요구다 이건.
“미안, 둘 다 잘해서 못 고르겠어.”
그래서 당당하게 못 고르겠다고 말했다.
둘 다 정말 잘해서 못 고르겠는데 어쩌라고.
두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데 난 당당하다.
난 봐준다고 했지 골라준다고 안 했어.
아마도.
“얘한테 물어본 우리가 잘못이지…….”
“그러게. 그냥 다른 애 하나 붙잡고 물어볼 걸 그랬어.”
“……”
한숨 쉬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절레절레 고개까지 젓는다.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줬는데 이것들이.
진짜 다음부터 이딴 거 해주나 봐라.
“야, 나중에 선생님한테 가서 제대로 평가받자.”
“그래야겠다. 한시아 진짜 도움이 안 돼.”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 왜 나만 갖고 난리야!”
“해달라고 한 건 둘 중 한 명 고르라는 거였는데 못 골랐잖아. 그럼 도움 안 된 거 맞지.”
난 고민하고 고민해서 결국 못 고른 거다! 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담담한 박하연의 설명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둘 중에 골라달라고 한 건 맞으니까.
그렇게 보니까 진짜 도움이 안 됐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파.”
“그러게. 배고프다. 밥 먹자.”
멋쩍어서 아무 말도안 하고 있는데, 둘이 갑자기 밥 먹으러 가자면서 날 떠밀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는데,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벌써 가자는 걸까.
이 돼지들.
“뭐 먹지?”
“돈까스.”
“어제도 먹었잖아.”
“그럼 백반.”
“넌 뭐 먹을래?”
내 등을 밀고 있던 김혜림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묻는다.
“돈까스.”
“으……!”
어깨를 살짝 들썩이면서 대답해주니 입을 매만지며 울상짓는다.
혀라도 깨물었나.
“왜?”
“너때문에 혀 깨물었잖아!”
“그러게 누가 갑자기 어깨에 턱 올리래?”
“와… 진짜 싸가지 봐… 야, 너 같으면 얘가 이러는데 안 때리고 배기겠냐?”
박하연은 그 말에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릴 것 같다는 건지 안 때릴 것같다는 건지 모르겠다.
눈이 매서운 걸 보니 아마도 전자인 거 같은데.
난 너희한테만 이렇지 다른 사람한테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란다.
애초에 날 괴롭힌 사람과 선생님을 좋아한다면서 나한테 시비 거는 사람한테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아무리 들어봤자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박하연은 선생님 좋아한다면서, 선생님이 기자님이랑 결혼하는 건 알고 있나 모르겠네.
알면 또 난리가 나겠지?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지.
“너 자꾸 돈까스만 먹으면 살찐다?”
“괜찮아. 나 살 안 찌는 체질이야.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몰라. 기억 안 나. 아, 갑자기 짜증 나네. 키도 조그마한 게.”
살 안 찌는 체질이라는 게 열받았는지 이번에는 내 팔뚝을 툭툭 건드린다.
게다가 박하연까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
이 돼지들이 뭐 하는 짓거린지 모르겠다.
“하지 마. 간지러워.”
“어떻게 그렇게 막 먹는데도 살이 안 찌지? 사실 사람이 아니라 로봇인 거 아니야?”
“막 먹기는 뭘 막 먹어. 되게 조금 먹는데.”
“별로 안 먹어도 메뉴가 이상하잖아. 사옥에서 먹을 때는 맨날 돈까스고 집에서는 치킨이나 피자 자주 시켜 먹는다고 하고.”
돈까스도 치킨이랑 피자가 살찌기 쉬운 요리인 건 맞지.
근데 돈까스만 먹는 건 그냥 다른 음식 고르기 귀찮아서 그런 거다.
맛있기도 하고.
치킨이나 피자는김혜림 말처럼 그렇게 자주 시켜 먹지는 않는다.
그냥 2주에 한 번?
저녁 만들기 귀찮을 때나 주말에 한 번 먹는 정도?
그게 전부다.
“난 물만 마셔도 찌는데…….”
“얘가 이상한 거니까 괜히 기죽지 마. 미친 외계인 년이야 얘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생명체인가 봐.”
“뭐라는 거야…….”
가만히 있으니까 아주 자기들끼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외계에서 온 로봇 생명체라고?
그렇게 따지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은 무슨 완벽 초인인가?
“뭐하냐 너희?”
한동안 바빠서 얼굴도 못 봤던 녀석이 오늘은 웬일로 회사에 있다.
그것도 혼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밥 먹으러 왔지. 넌 여기서 뭐 해.”
“나도 밥 먹으러 왔는데?”
“왜 혼자 여기서 밥 먹으려고 하냐고 묻는 건데?”
원래라면 멤버들과 함께 있을 터인 윤시우가 지금은 혼자서 사옥 식당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 일인데, 표정이 조금 많이 불편해 보인다.
녀석이 슬쩍슬쩍 시선을 보내는 곳을 보니 김혜림과 박하연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하고 있다.
방금까지 내가 무슨 외계인이라면서 놀리던 사람들이 맞나 싶다.
“안녕하세요,선배님! 시아랑 같은 팀인 김헤림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박하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세븐즈 윤시우입니다.”
세상에 맙소사.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김혜림과 안절부절못하며 바들거리는 박하연.
덤으로 어색한 미소로 답하는 윤시우까지.
뭐지 이 재밌는 풍경은?
내가 평소에 봤던 이 녀석들은 이럴 인간들이 아닌데?
“너네 뭐하냐?”
인사 후에는 이렇다 할 말도 못 꺼내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세 사람이 너무 웃기다.
마치 나한테 빨리 아무 말이나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지? 아까 나한테 뭐라 그랬더라? 외계에서 온 로봇 생명체? 미친 외계인 년?”
“시, 시아야, 우리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밥 뭐 먹을까 얘기하고 있었잖아…….”
“맞아! 돈까스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사줄까?”
박하연의 말을 받은 김혜림이 내게 팔짱을 끼면서방긋 웃었다.
나도 지금은 여자인데,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진짜 무섭다.
방금까지 날 신나게 놀려놓고는 윤시우 앞이라고 입을 싹 닦고 친한 척이라니.
으으… 무서워…….
“저도 마침 밥 먹으려고 했는데,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윤시우는 꼴에 아이돌이라고, 금방 카메라 앞에서나 보일 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화사한 미소와 함께 식사를 권하는 게 퍽 자연스럽다.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 선뜻 같이 식사하자고 권하지는 못했을 텐데.
참 사교성 하나는 좋다.
“정말요? 저희야 좋죠. 그래도 계산은 저희가 할게요. 바로 이렇게 얻어먹는 건좀 죄송해서…….”
“괜찮아요. 얘랑 같은 팀이라고 들어서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사드리는 거니까.”
“진짜요? 그럼 감사하게 얻어먹을게요.”
“그럼 가죠.”
“네!”
소위 인싸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김혜림과 윤시우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앞장서 식권을 샀다.
인싸보다는 아싸에 가까운 나와 박하연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야, 어떡해… 진짜 같이 밥 먹어도 돼……?”
윤시우를 발견한 순간부터 안절부절못하던 박하연이 내 팔뚝을 살짝살짝 때리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같이 밥 먹는 게 뭐 대수라고.
“쟤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떨어.”
“넌 아는 사이라서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아니거든? 이런 반응이 원래 보통이야.”
그래, 박하연이나 김혜림이 보이는 반응이 평범한 거겠지.
한창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신인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고 있는 내가 이상한 쪽이겠지.
근데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고, 내가 그 신인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할 뻔했으니까 당연한 건데.
왠지 조금 우월감이 느껴지네.
연습생이 선배 아이돌이랑 서로 반말하면서 인사하고, 연습생 동료들은 그걸 대단하다고 바라보는 거지.
게다가 연습생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송 타서 어느 정도 팬도 생기고.
이건 어깨가 올라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나 사실 엄청 대단한 연습생인 거 아닐까?”
그래서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해봤다.
근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박하연의 표정은 별로 안 좋다.
썩어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 같다.
“이 년이 갑자기 뭐라는 거야…….”
“……”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 선배님이 부르잖아.”
“……그래.”
우리 몫까지 식권을 구매한 윤시우에게 다가가 어떤 메뉴를 주문했는지 봤다.
윤시우가 들고 있는 식권에 쓰여 있는 걸 보니 4명 모두 똑같은 메뉴다.
그리고 내가 먹으려고 했던 것과 전혀 다른 메뉴다.
“야, 나 돈까스 먹으려고 했는데?”
“근데?”
“이거 백반이잖아.”
난 분명 돈까스 먹겠다고 한 거 같은데.
왜 4명 모두 백반인 걸까.
어떻게 된 거냐는 뜻으로 김혜림을 바라보니 활짝 웃는다.
이 가증스러운 것…….
“시아야, 선배님이 사주시는 거니까 불만 그만하고 그냥 먹자. 선배님이 곤란해하시잖아.”
“……”
아주 제대로 착한 연습생을 연기하고 계신다.
자기 딴에는 나한테 설교 비슷한 걸하면서 착한 언니 행세를 하려는 모양인데.
이미 자주 싸우는 게 방송에 다 나왔는데, 이제 와서 참 쓸데없는 짓을 한다.
윤시우는 바빠서 못 봤을 수도 있나?
아무리 바빠도 한 번은봤을 텐데.
윤시우의 표정이 조금 혼란스러운 걸 보니 이건 분명 봤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데.
같은 표정이야 이건.
“평소처럼 하셔도 돼요.”
“네……?”
“방송에서는 얘한테 막 뭐라 하고 꼽주고 그러시던데. 내가 잘못 봤나?”
“……”
윤시우의 장난기 섞인 말에 김혜림은 화사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가 그랬나요? 잘 기억이 안 나서…….”
“아, 그럼 뭐… 제가 잘못 봤나 보죠. 정말 죄송해요.”
미소는 유지한 채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을 하는데, 윤시우가 미안하다며 머리를 긁적인다.
근데 표정은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다.
아, 그래요? 그랬구나~
이런 표정이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김혜림의 얼굴이 아주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아마 지금 귀랑 목덜미를 만져보면 손을 데는 거 아닐까.
괜히 어설프게 연기하겠다고 까불더니 꼴좋다.
“푸흡… 겁나 웃겨…….”
비웃어주려고 했는데, 박하연이 나 대신 웃어줬다.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죽여 웃는 걸 보니 김혜림이 윤시우에게 된통 당하는 게 정말 웃겼나 보다.
하긴 김혜림은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데다가 유일하게 성인이라서 그런지 은근히 잘난 체가 심했으니까.
그런데 그 김혜림이 나랑 동갑인 윤시우에게 놀림 받고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다.
그동안 당한 게 많은 박하연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겠지.
사실 나도 지금까지 당한 게 있어서 막 놀려주고 싶은데 많이 참고 있는 중이다.
지금 김혜림의 손이 아주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보이니까.
수치심에 젖어 발갛게 변한 얼굴과 손에 힘을 얼마나 준 건지 바들거리는 손.
안 그래도 나중에 난리 날 것 같으니까 나라도 조용히 있어야지.
난 아무 상관 없으니까 둘이 열심히 싸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