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0화 〉변화 (70/176)



〈 70화 〉변화

치킨을 시킨 나는 곧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배달이 오기 전에 제로콜라를 사와야 하기 때문이다.

기본으로 딸려오는 콜라는 선생님이 마시면 되지만,  제로콜라를 더 선호하니 어쩔  없다.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서둘러 달려가1.5L짜리 제로콜라를 들어 올렸다.

제법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기분 좋게 계산대로 향하자, 방금까지 앉아서 핸드폰만 바라보던 알바생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시간에는 꼭 이 사람이 있는데, 상당히 큰 키에 항상 기분 나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원래 그런 얼굴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기분이 나빠서 일그러뜨리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다.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손님으로써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게다가 조금 위압감이 느껴진다.

솔직히 말해서 무섭다.

남자인 주제에 겨우 인상  찌푸렸다고 무섭다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기세가 움츠러들고 만다.

한 번 험한 일을 당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낯선 남자가 조금이라도 위협적으로 행동하면 나도 모르게 겁을 먹고 만다.

상대방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오로지 내 주관적 판단에 의한 위협인  문제지만 말이다.

아마 지금 이 알바도 딱히 위협하려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건 아닐 거다.

원래 조금 인상이 험악한 사람이거나 짜증 나는 일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 아무런 의도도 없는 행동과 표정마저도 위협으로 느껴진다.

의심증 환자도 아니고…….

근데 애초에 알바가 험악한 표정으로 계산을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무섭지 않을까?

남자든 여자든 이 정도 덩치의 사람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흠칫할 거다.

분명히 그럴 거다.

그러니까 딱히 내가 쫄보나 찐따인 건 아니다.

“3600원입니다. 비닐봉투 필요하세요?”

“아뇨, 괜찮아요.”

날 내려다보는 알바생의 눈을 살짝 피하면서 카드를 건넸다.

표정은 별로  좋아도 목소리는 그냥 평범하다.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조금 인상이 험악한 사람인 건가?

괜히 미안해지네.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공손하게 카드를 건네받고, 그대로 콜라를 챙겨 나가려고 했다.

날 불러세우는 그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기요.”

“네, 네……?”

화들짝 놀라면서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그 짜증스러운 표정 그대로인 알바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쪽 한시아 아니에요?”

“네? 아, 그… 네… 한시아 맞습니다…….”

아까 찐따가 아니라고 큰소리쳤었는데, 아무래도 철회해야 할 거 같다.

지금 이 반응은 아무리 봐도 찐따가 맞다.

험상궂은 남성의 눈빛 하나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있다니.

윤시우가 봤다면 가오가 죽는다면서 한심해했을 거다.

지금은 나밖에 없어서 아무도 뭐라고  하겠지만.

“성추행인지 뭔지 뉴스에도 막 나오던데. 그러고 다녀도 돼요?”

“네……?”

“그렇게 돌아다녀도 되냐고요.”

당황한 내가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답답하게 되묻자 알바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하얀 티셔츠 밑에서 미친 듯이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두 둔덕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분홍빛 무언가가 아주 희미하게 비치고 있는 둔덕이.

그걸 깨달은 순간.

그에게서 느껴진 위압감으로 인해 두려움으로 물들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수치심으로물들기 시작했다.

무슨여자가 남자에게 치부를 보여서라든가 그런 게 아니다.

순수하게 인간으로써의 수치심이다.

아마 남자라고 해도 이럴 때는 분명 수치심을 느낄 거다.

만약 편의점의 여자 알바생이 남자의 옷에 비친 그것을 지적했다고 생각해봐라.

어느 누가 창피하지 않을까.

아마 열 명 중에 여덟아홉 명은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할 거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여자라서 창피해하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으로써 창피한 거다.

“아, 그… 제가 부주의했던  맞는데… 뉴스에 나온  제가 아닌데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새빨갛게 익었을 얼굴을 애써 식히며 그의 말을 부정해본다.

일반 대중들은 뉴스에 나온 성추행 피해자 연습생 H양이 나라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내보낸 공식 발표는 어디까지나 연습생 H양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KIS에 소속된 난 여기서 시치미를 떼야 한다.

 그러면 성추행 피해자가 나라는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꼴이 된다.

“유명 연습생 H양이라던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수치심으로 인해 정신이 없긴 하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바생도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는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딱히 상관은 없는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할게요. 자주 그런 차림으로 오시던데, 아무리 이 동네가 살기 좋은 동네라고는 해도 밤길은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랩이라도 하는 듯 빠르게 내뱉는 그의 말에 황당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내가 무슨 꼴을 하고 다니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밤중에 속옷도 입지 않고  티만 입은 채로 돌아다니는 건 확실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에서도 집값 높기로 유명한 동네라 치안은 확실하겠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도 있으니까.

학교에서 겪었던  덕분에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집에서는 속옷을 안 입는 게 버릇이 돼서 나도 모르게 이런 꼴로 나왔는데, 솔직히 이 사람 말대로 조심해서 나쁠  없다.

편하다는 이유로 이런 꼴로 돌아다녔다가 만에 하나라도 험한 일을 당하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을 테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건들거리는 태도였기는 해도 일단  걱정해준 거니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뜬금없이 속옷 입고 다니라는 말을 들어서 발끈하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요즘 같은 시대에 방금 같은 말 하는  쉽지 않았을 텐데, 내 추태를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충고까지 해준 거잖아?

그럼 고맙다고 해야지.

그러는 편이 내 이미지에도 좋고.

여기서 그게 지금 말이냐며 화를 내봤자 내 이미지만 나빠진다.

이렇게 적당히 넘어가는 것도 연예인으로써 가져야 할 스킬이다.

“아뇨, 뭐… 저야말로 괜히 오지랖 떨어서 죄송합니다…….”

내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그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고개를 숙인 게 아니라 허리를 굽혔다.

완전히 90도로 굽히는 걸 보니 왠지 내가 미안해진다.

“어… 그럼 저 이만 가볼게요…….”

“예…  가요.”

그의 배웅을 받으며 편의점을 나섰다.

무난하게 넘겼다고는 생각하지만, 아까 달아올랐던 목덜미가 아직도 후끈거린다.

7월이라 더운 것도 있지만, 치부를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 게 훨씬 클 거다.

여자가 된 지 벌써 4개월이나 지났다.

내가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남자로 지냈다고는 해도, 이제는 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자인 채로 남자처럼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하니까.

요즘에는 남녀평등이다 뭐다 해서 여자가 조금은 남성적인 면모를 보여도 그러려니 하게 됐지만, 아이돌 연습생은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그런 수요가 아예없는 건 아닌데, 다수라고 할 수도 없다.

여자 아이돌은 여자다.

여성스러운 면이 기본이 돼야 하는 거다.

그러니 오늘 내 행동은 진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 여성이 자기 치부를 당당히 드러내고 싶어 할까.

세상에 별의별 사람이  있다는 걸 아는 만큼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거다.

소위 말하는 꼬투튀든 꼭투튀든 보는 사람도 드러내는 사람도 불편하기만 하다.

아무리 노브라가 편하다고는 해도 진짜 조심해야지.

만약 집에 있다가 갑자기 집 앞으로 외출할 일이 생기면 가볍게 겉옷을 걸치고 나가자.

 번 벗어 던진 브래지어를 다시 착용하는 것도 번거로우니까.

집에서도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는 건 조금 불편하니까 당연히 벗을 거라서 남은 선택지는 겉옷밖에 없다.

집에서까지조심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밖에 나갈 때는 조심하자.

“후우…….”

자주 이런 상태로 편의점에 갔었던 걸 떠올리니 얼굴이 터질 거 같다.

편의점 알바들은 대체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속옷도 안 입고 치부를 드러낸 채로 돌아다니는 문란한 여자라고 생각했을까?

맨살을 드러낸  아니라고는 해도 다 큰 여자가 이런 꼴로 돌아다녔었다니.

진짜 미쳤어.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다행히도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자.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에 수치심이 한계까지 차오른 난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멈춰  수밖에 없었다.

속옷을 입지 않은 탓에 위아래로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는 이 살덩어리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전속력을 뛰어갔을 텐데…….

그리고  콜라만 아니었다면…….

일부러 가리고 가는 것도 이상하겠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게 된 난 어쩔 수 없이 흔들리지 않을 만한 최적의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마시고 싶어서 산 콜라가, 원하지 않지만 달려버린 이 살덩어리가 오늘만큼은 정말로 미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