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변화
“시아야?”
내가 먼저 스킨십을 한 건 처음이라 당황한 걸까?
손을 붙잡힌 유정이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하지만 기분은 좋은지 입가가 예쁘게 호선을 그리고 있다.
“갑자기 손은 왜?”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왜? 내 노래 이상했어?”
내 망설임을 눈치챈 건지 눈을 지그시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표정 관리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불안한 마음이 아주 잠깐이나마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아니면 유정이의 감이 뛰어났거나.
“아니. 노래는 정말 좋았어. 정말로…….”
“노래는 좋았다는 건 별로 안 좋았던 게 있었다는 거야?”
“……”
마치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는 것 같지만, 너무 정확해서 할 말이 없다.
노래는 좋았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로 고민하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있을까?
친구 사이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일 있어? 왜 그래?”
내가 물음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자 유정이가 내 시선을 따라오듯 고개를 움직인다.
계속해서 빤히 바라보는 유정이의 올곧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리고 내가 눈을 피할 때마다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따라온다.
도망칠 곳이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히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러면 눈을 마주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으……!”
“……왜 계속 눈을 피해?”
이제는 아예 뺨을 두 손을 부여잡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친다.
조금 강압적이기도 했지만, 아마이렇게라도 해서 똑바로 눈을 보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겠지.
애처럼 투정 부리는 것도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자꾸 피하지 마. 알았지?”
“응… 미안, 이제 안 피할게…….”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내 볼을 놓아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다.
“이제 왜 그러는지 말해봐.”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팔짱까지 끼면서 묻는다.
그 모습이 꽤 박력 있어서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다.
평소에 굉장히애교가 많고, 친근한 성격이라 자주 잊어버리고는 한다.
유정이의 외견이 절대로 나처럼 순둥순둥하지 않다는 걸.
굳이 따지자면 기가 세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박하연이랑 비슷한 느낌이다.
물론 성격은 비교할 것도 없이 유정이가 훨씬 좋지만.
아무튼 지금 눈앞에 있는 유정이의 기백이 굉장하다 이 말이다.
마치 납득할 만한 말이 아니라면 집에 보내주지 않을 거 같은 분위기다.
“……”
분명 기다리고 있던 기회일 텐데, 그냥 뭘 숨기고 있냐며 물어보면 되는데, 바보처럼 입을 열지를 못한다.
멍청한 것도 정도껏 멍청해야지…….
이래서는 이도 저도 안 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될 것도 안 된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팔짱까지 끼며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유정이의 표정에 아주 희미하게 금이 가기 시작한다.
뭔가 있는 건 확실한 거 같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조금 더 뻔뻔해지자.
“숨기는 거 있구나……?”
어차피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해?
그냥 이렇게 물어보면 되지.
조금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유정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자 유정이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피한다.
“눈 피하지 말라며.”
방금은 내가 도망쳤었는데, 이번에는 반대가 됐다.
유정이가 조금 분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날 노려본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시선에서 적대감이나 배신감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비겁하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내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흘려넘겼다.
오기가 생긴 건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눈에 힘을 주고 있지만, 이건오히려 내가 바라던 상황이다.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숨기는 거 없는데?”
“숨기는 게 없는데 왜 눈 피했어?”
“피할 수도 있지 뭘 그래.”
음… 유정이도 나처럼 뻔뻔하게 나오기 시작한 것 같네.
바라던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역시 쉽지 않다.
“눈 돌리지 말라고 한 건 너잖아.”
“그건 네가 자꾸 말도 안 하고 숨기려고만 해서잖아.”
아, 이건 조금 좋지 않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과열되기시작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지, 혹시 괜찮다면 말해줄 수 있는지만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되는 건데…….
“이제는 안 숨기고 있잖아. 오히려 지금 숨기고 있는 건 너지. 너 어제부터 갑자기 이상해진 거 알아?”
“뭐가 이상한데?”
“뭐?”
“뭐가 이상하냐고.”
망했다.
이건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유정이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이유,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느낀 이유를 말하라는 건데…….
“그……!”
아주 잠시 말문이 막히면서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려던 찰나.
이놈의 입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맘대로 움직여버렸다.
“갑자기 노래 가르쳐달라고 한 것도 그렇고, 어제 헤어질 때 안 따라온 것도 그렇고, 갑자기 안 달라붙는 것도 그렇고.”
“뭐……?”
“아니, 그러니까…….”
벙찐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유정이를 보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아니,그것보다도 그냥 입을 열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내가 뱉은말이 어떤 식으로 들릴지가 떠올라서 아무 말도 못 하겠다.
얼굴이고 몸이고 간에 전부 뜨거워… 터질 거 같아…….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바로 방금 똑같은 짓을 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눈 돌리지 말라고 했는데 또 피하네?”
“너도 피했잖아 방금……”
다시 내 볼을 붙잡더니 고개를 들어 올린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하고 있다.
차마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다.
“시아야, 나 좀 봐봐.”
“……”
“한시아. 나 봐.”
열심히 눈을 피하려고 해보지만, 갑자기 돌변한 유정이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마주 본다.
조금 매서우면서도 예쁜 눈매와 가지런한 속눈썹, 맑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 비친 내 모습.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완전히 새빨개져 있겠지?
“내가갑자기 노래 가르쳐달라고 해서 불안했어?”
“아닌데…….”
방금과 똑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묻는 유정이에게 마지막으로 저항해봤다.
하지만 유정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헤어질 때 평소랑 다르게 배웅 안 해줘서 삐쳤어?”
“아, 아니… 아니라고…….”
진지하면서도 아주 담담하게 이어나가는 말에 애써 부정하며 시선을 다시 피했다.
“눈 피하지 마. 나 봐.”
“……”
그래봤자 유정이의 말 한마디면 저절로 다시 돌아온다.
말다툼으로 기세를 잡으려고 했는데, 역으로 완전히 잡혀버렸다.
“원래는 하루가 멀다고 달라붙었었는데, 갑자기 안 달라붙어서 섭섭했어?”
“……”
“그래서 아까 손 잡았던 거야? 빨리 달라붙으라고?”
대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면 되는 건가?
아니면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면 되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갑자기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하거나 헤어질 때 배웅해주지 않는 건 그냥 그러려니 했다.
딱히 불안하지도 삐치지도 않았었다.
정말 단언컨대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말.
매일같이 달라붙었었는데 갑자기 안 달라붙어서 섭섭했냐는 말.
그거 하나만은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부정할 수가 없을 수밖에.
섭섭했던 건 사실이니까.
정말 하루종일 달라붙던 애가, 내가 살짝 밀어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라붙던 애가 갑자기 어느 날 달라붙지 않으면 대체 누가 섭섭하지 않을까.
내심 즐기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는 대답밖에 안 나온다.
솔직히 만날 때마다 팔짱을 끼고, 가벼운 스킨십을 하루에도 몇 번을 하는데 어떻게 그걸 싫어해.
평범한 여자였다면싫어했을 수도 있지.
근데 난 평범한 여자가 아니잖아.
몸뚱이는 이래도 내용물은 남자잖아.
그런데 그걸 대체 어떻게 싫어하겠냐고.
어떻게 섭섭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응? 시아야? 응? 어때? 섭섭했어?”
내가새빨간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 건가?
히죽 웃으면서 계속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너무 얄미운데, 다시 마구 달라붙던 유정이로 돌아온 느낌이라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다.
“시아야, 말 좀 해봐. 혹시 삐친 거야?”
“안 삐쳤어…….”
내 뺨을 주물럭거리는 손을 잡아챈 뒤 뺨에서 떼어냈다.
아직 창피하긴 하지만 어떻게 말을 뱉을 수는 있게 됐다.
유정이는 뭔가 아쉬운 거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다시 헤실헤실 웃었다.
“그래서 어떤데? 내가 팔짱도 안 끼고 그래서 불안했었어?”
“아니, 안 불안했어.”
“정말로?”
“응, 정말로.”
술렁이는 마음을잠재우며 최대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웃고 있지만, 유정이의 표정에서 아주 잠깐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랬구나. 그럼 아무렇지도 않았겠네?”
목소리도 날 놀릴 때와는 달리 조금 정말 미세하게 가라앉아있다.
어떨 때는 이상할 정도로 알기 어려운데, 이럴 때는 또 이상할 정도로 알기 쉽다.
새삼 여자의 감정 변화는 어렵다는 걸 느끼며 한숨을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는데…….”
“어? 어…그, 그래…? 어땠는데……?”
“서, 섭섭했어…….”
그냥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뱉었다.
이미 뻔뻔해지기로 했지만, 훨씬 더 뻔뻔하게.
정말 얼굴에 철판을 두른 것처럼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말로 내뱉었다.
목소리는 무슨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었다.
유정이의 얼굴이 내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것.
그거 하나만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