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위기
* * *
“선생님…….”
숙소로 뛰어 들어온 선생님을 보니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툭하고 끊어진 기분이었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고, 범인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괜찮냐? 뭐 당한 거 있어?”
“아, 아뇨…….”
욕설과 협박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바보 같은 안도감에 빠져서 넋이 나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빨리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채간 선생님은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걸 금세 알아챘다.
“안 당하긴 뭘 안 당해. 이건 뭔데.”
“……”
잔뜩 표정을 구긴 선생님이 화면을 내게 보여준다.
차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내 옆에 앉은 선생님이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큰일 난 건 아닌 거 같으니까 다행이네요.”
“……?”
조금 황당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엄청나게 큰일이 난 거 같은데, 큰일 난 게 아니라고?
대체 무슨 소리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생님에게 의심 섞인 시선을 보내는데.
선생님과 함께 온 남성 두 분이 우리 반대편에 앉으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준비는 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올 테니까 그때 얘기해 보죠. 태영이도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까요.”
서류를 들여다보며 자기들끼리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을 노려보았다.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남자였다는 걸 아는 선생님의 입에서 별일 아니라는 듯한 말이 나오니 조금 발끈해버렸다.
선생님도 아무 설명도 없이 자기들끼리 얘기한 게 미안했는지 내게 핸드폰을 건네주며 사과했다.
“아… 미안.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다고요……?”
“그래, 괜찮아. 다 해결될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확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저…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협박당하고 있는데요…….”
“넌 누군지 몰라도 우리는 알고 있고, 이제 곧 올 거니까 괜찮아.”
“네? 여기로 온다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괜히 온 게 아니니까.”
“……”
날 협박했던 놈을 벌써 잡았고,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고?
그럼 선생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 내에 범인을 찾아서 잡아온다는 뜻?
어느 쪽이든 평범한 건 아닌 거 같다.
“뭐야? 선생님, 언제 왔어요?”
목소리를 높여서 떠들지는 않았는데, 조금 소란스러웠던 걸까?
방 안에 있던 김혜림이 나와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리를 본다.
“방금 왔지. 잠깐 볼일 있어서 온 거니까 얘 좀 데리고 들어가.”
“네?”
서류를 조심스레 흔든 선생님이 돌연 내 등을 살며시 민다.
깜짝 놀라 얼떨결에 일어나기는 했는데, 갑자기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협박당한 당사자는 나인데?
혹시 내가 겁먹었을까 봐 이러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겨우 협박 정도로 겁먹을 만큼 겁쟁이는 아닌데.
“저도 여기 있을래요.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요.”
“안 돼. 들어가.”
들어가기 싫다는 뜻을 전했지만, 선생님은 엄한 표정으로 선을 그었다.
날 위해서라고는 해도 너무 싸고도는 거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혜림아, 얘 좀 데려가.”
“네… 야, 가자.”
“응…….”
내가 도망가는 것 같은 상황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온 선생님의 말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들어가 있다가 나중에 범인이라는 놈이 오면 그때 다시 나오면 되니까.
“야, 이거 가져가.”
“……”
선생님의 말대로 김혜림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까 먹으려고 했던 컵라면을 건네신다.
이미 불어 터졌을 게 뻔한 컵라면을 받아들고는 김혜림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문을 닫은 김혜림이 팔짱을 끼며 심각한 표정을 한다.
“……”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협박을 당했다고 하면 되겠지만, 무슨 약점을 잡혀서 협박당한 거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내가 사실은 남자였었다는 걸 밝히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는데.
김혜림에게 털어놓아도 될까?
김혜림에게 털어놓는다면 박하연에게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멤버인데 한 명만 따돌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비밀을 말해버려도 되는 걸까?
이런 일이 이번만 일어날 거라고는 단언할 수도 없잖아.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해 비밀을 털어놓을 거야?
정혁이 형이나 태영이 형한테도 말할 거야?
신 팀장님한테는?
한 명 한 명 계속 털어놓다 보면 끝이 없다.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김혜림이 그 선 안에 있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해봐야 한다.
“야, 무슨 일이냐니까?”
“……나중에 선생님한테 물어봐. 나 잘래.”
하지만 그 확인을 굳이 지금 여기서 할 필요는 없겠지.
컵라면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뭐…? 아니… 야, 진짜 잔다고?”
김혜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이 상황을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
* * *
회사에 돌아와 장비 정리와 영상 편집 작업과 내일 제출할 보고서 작성까지.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출장에서 돌아온 우리 팀은 담당 아이돌인 시스터스를 숙소까지 보낸 뒤에도 회사에 돌아와 남은 업무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 남은 일을 모두 끝낸 후에야 드디어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그래봤자 뒤풀이 회식이 남아있기에 나 같은 말단 직원들은 바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팀장님은 안 가세요?”
“집사람이 빨리 오라고 난리야. 너희끼리 가. 주말 동안 푹 쉬고.”
“예,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하지만 우리 팀장님은 회식에 갈 맘이 없으신 거 같다.
보통은 팀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들을 모아 주도할 텐데.
이 팀은 이상하게도 신인개발팀의 팀장님이 이런 일을 주로 맡으신다.
우리는 신인개발팀 소속이 아닌 매니지먼트 3팀 소속인데도 말이다.
“팀장님, 오늘도 안 가신대?”
“어, 사모님이 찾으신다고 하시네.”
“또? 그분도 참 집착 하나는 알아줘야 해 진심…….”
“좀 심한 것 같기는 하지.”
같은 아이돌을 담당하고 있는 정혁은 팀장님의 사모님을 영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육으로 다져진 커다란 체격에 얼굴도 험악해서 처음 만났을 때는 앞날이 걱정만 됐었는데, 함께 일해보니 그리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무뚝뚝하기는 해도 나 같은 놈보다 훨씬 똑 부러진 녀석이라 부럽기까지 하다.
애들이랑도 잘 지내는 걸 보면 난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럴수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고민이다.
아무래도 시스터스의 멤버들은 날 그리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으니까.
“하아…….”
“뭔 한숨을 그렇게 쉬냐?”
회사에서 자주 회식 장소로 선택하는 식당, 매번 똑같은 메뉴와 똑같은 사람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자리.
이번에도 내 앞자리는 형석의 차지였다.
정확히는 내가 형석을 담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여성 사원들은 형석의 인상이 무섭다는 이유로 같은 테이블에 앉지를 않고, 그나마 있는 남자 사원들도 다들 김형원 팀장님께 꼬리를 흔드느라 바쁘니까.
이 녀석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런 걸 보면 이놈이나 나나 참 안타까운 족속들이다.
그건 좀 아닌가?
그나마 담당하고 있는 애들이랑 사이가 좋은 이놈의 처지가 조금은 더 나으려나?
“아무것도 아냐…….”
“아니긴 씨발. 표정이 보기만 해도 뒤질 거 같은데.”
“……”
소주를 한잔 걸친 뒤 깊은 한숨을 내쉰 순간부터 고민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낸 것이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정혁의 말대로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얼굴이겠지.
잔뜩 기대하고 각오를 다졌던 일본 출장이 영 별로였으니까.
기껏 애들한테 붙어있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전보다 친해졌다는 느낌은 딱히 없고, 오히려 사이가 안 좋아져 버렸지.
특히 시아랑.
혜림이와 하연이는 그나마 괜찮더라도 시아에게는 완전히 미움받아버렸다.
그때 그냥 모른 척 지나가야 했던 걸까?
하지만 매니저로서 그냥 지나치기에는 힘든 말들이었는데…….
“후우…….”
“이 새끼는 왜 한숨 쉬냐고 묻는데 또 쉬고 있네… 술도 혼자 처마시고. 진짜 뭔 일 있냐?”
“아니, 그냥… 매니저가 참 쉬운 게 아니구나 싶어서……”
차마 한시아가 연애를 하는 거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리며 다시 잔을 채웠다.
혼자 통화하고 있는데 왜 굳이 가까이 갔을까.
그냥 친구랑 전화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지나갔으면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나?
어차피 조금 삐걱거리기는 했었으니 언젠가는 이렇게 됐으려나?
잘 모르겠다.
최대한 세 사람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자꾸만 엇나가는 건지.
특히나 시아와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고만 있다는 게 맘에 걸린다.
혜림이나 하연이는 조금이나마 진전이 보이는데, 시아는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경계의 눈빛을 보내오니 말 다 했지.
그것도 모자라서 들어서는 안 되는 걸 엿들어버려서 이제는 아예 혐오의 눈빛이 돼버렸다.
사과하고 싶어도 시아는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이쪽에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
매니저니까 계속 이럴 수도 없는데…….
아무래도 내 쪽에서 용기를 내야겠지?
각오를 다지며 술을 들이켜려던 순간.
“잠깐 나와봐라.”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에 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나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군말 없이 밖으로 나와 물었다.
함께 따라온 정혁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지 안 그래도 험악한 표정이 완전히 조폭처럼 변해버렸다.
“그… 시아한테 일이 생긴 거 같아서 빨리 가봐야 할 거 같다. 너희는 혹시 모르니까 회사에서 대기 좀 해줘. 미안하다.”
“시아한테 일이요?”
“그래.”
어딘가 급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니다.
일단은 팀장님의 말대로 회사로 향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일인지만 간단하게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하지만 정혁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같이 일해본 바로는 확실한 게 아니면 하기 싫어하는 성격 같았으니 더욱 무슨 일인지 듣고 싶겠지.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 되더라도 일단 지시에 따르는 나와는 확실히 다르다.
팀장님도 그걸 알고 있기에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표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 같다.
“하아… 그… 어떤 놈이 시아 번호를 알아낸 건지 협박 문자 같은 걸 받았다고 해서…….”
“협박 문자요?”
“아니지… 톡으로 협박당하고 있다고 하더라 지금.”
“지금이요? 아니… 그럼 빨리 가셔야죠. 저희는 바로 회사로…….”
초조와 불안으로 물든 표정인 팀장님을 재촉하며 정혁과 회사로 향하려고 하던 그때.
문득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모른다는 맘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