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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화 〉 데뷔 (148/176)

〈 148화 〉 데뷔

* * *

“시스터스 준비해주세요.”

살며시 열린 문틈 사이로 스태프 한 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차례를 알려준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왜 다들 저렇게 얼굴만 내밀고 있는 거지?

아까 왔었던 신 팀장님도 저랬었는데.

“벌써 갈 시간이네.”

“그러게. 시간 되게 빨리 가는 거 같지 않아?”

방금 대기실로 돌아온 두 사람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이 둘은 관객으로 와 있는 가족들과 즐겁게 떠들고 왔으니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겠지만, 대기실에서 가만히 있었던 난 드디어 시작이라는 느낌이었다.

빨리 끝내고 김진우 녀석의 허망한 표정을 보고 싶다.

“아까 잠깐 보고 왔는데 사람 엄청 많더라. 너도 봤지?”

“응, 난 진짜 그렇게 많은 거 처음 봤어.”

“얼마나 많길래 그래.”

보기 드물게 둘 다 호들갑을 떠니까 조금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갔다 왔을 때도 호들갑 떨었는데, 나갈 때 되니까 더 난리네.

“그냥 꽉 찼어. 여기 몇 명 들어올 수 있댔지?”

“만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고 했던 거 같아.”

“와… 대박…….”

박하연의 입에서 나온 숫자를 들은 김혜림이 넋을 놓은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어깨를 흔든다.

갑자기 왜 이래.

긴장한 거 같지는 않은데, 눈에 띌 정도로 흥분했다.

“우리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만 명 앞에서 공연하는 거야… 진짜 미쳤다…….”

“기획사 합동 공연에 잠깐 나가는 거 갖고 호들갑 떨지 마.”

“야, 솔직히 이건 호들갑 떨어도 되지 않아?”

내가 반응이 별로라서 그런지 이번에는 박하연에게 매달리면서 동의를 구한다.

나보다 더 무덤덤한 성격인 박하연이 그런 호들갑을 받아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일로 고개를 끄덕인다.

“데뷔 직전이라 반쯤 특혜이긴 해도 이만한 무대에 오르는 건 호들갑 떨 만하지.”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야! 이렇게 큰 무대에 데뷔도 안 한 그룹이 올라가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된다니까?”

“그건 인정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난리야? 긴장했어?”

“아니. 관객석 꽉 찬 거 보니까 갑자기 흥분돼서.”

“흥분된다니… 변태…….”

“뭐? 넌 또 뭐라는 거야!”

박하연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하며 딴지를 건다.

얘는 진짜 가끔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어.

아니 그것보다 김혜림은 대체 뭘 보고 왔길래 이렇게 난리법석인 거냐고.

음… 나도 한 번 보고 올까?

아마도 시간 안 되겠지?

이제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한 난 무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는 묘한 소리에 굳이 볼 필요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어차피 무대에 올라가면 보게 될 텐데 뭐하러 따로 보러 가.

“소리 들리지? 진짜 대박 많으니까 보고서 쫄지 마.”

“안 쫄거든? 무대 올라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무슨…….”

마치 내가 긴장하는 게 확실하다는 듯이 말한다.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나보다는 얘가 더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일부러 더 호들갑 떠는 건가?

그런 의심을 하면서 무대 뒤로 올라왔지만, 딱히 긴장한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너무 신나서 이상해진 건가?

신나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기는 한데 너무 신나서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다.

그런 걱정 따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연습했으니까 괜찮겠지만.

“준비됐냐?”

무대 뒤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이 우리를 맞아준다.

갑자기 나가서 안 돌아오길래 어딜 갔나 싶었는데 여기 있었구나.

“준비는 진작에 끝났죠.”

“빨리 끝내고 숙소 가서 쉬고 싶어요.”

선생님의 질문에 둘 다 평소랑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대답한다.

처음 겪는 큰 무대인데도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하다.

“다들 긴장하지 말고 평소처럼만 해. 알았지?”

“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대 쪽을 바라본다.

조명이 들어와 있지도 않고, 관객석도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제 곧 저 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맘이 들뜬다.

우리가 아니라 완전히 엉뚱한 녀석이 데뷔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기분이 좋다.

진짜 신기하다.

“시스터스 무대 올라가실게요!”

“시간 됐다. 갔다 와.”

멀찍이서 들리는 스태프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선생님이 우리의 등을 살며시 두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손길에 떠밀리듯이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 * *

“같이 가라고요?”

그래, 중요한 분이니까 끝까지 모셔야지. 안 그러냐?

“……”

마치 비웃는 것만 같은 목소리에 기분이 더러워져 구태여 대답하지는 않는다.

대답을 듣고 싶어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러니 굳이 대답해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됐으니까 모시고 가. 너도 가서 그년들 멘탈 좀 흔들어주면 좋잖아. 그렇지?

“예, 그렇긴 하네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가기 싫다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겉으로는 본부장과 내가 손을 잡고 시스터스와 김형원 팀장을 압박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이쪽이 이용당하는 모양새나 다름없다.

이 꼰대 녀석이 내게 안겨줄 수 있는 이익은 굉장히 크다.

본부장이라는 특별하고 높은 위치에 있어야만 얻어다 줄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내가 본부장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이라고는 고작해야 연습생들 사이에서 도는 가십거리나 그걸 부풀린 헛소문, 내가 본디 지니고 있는 음악적 재능 정도다.

마지막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큰 이익은 아니다.

그러니 나와 본부장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동맹 관계가 아닌 본부장이 날 부리는 상하 관계에 가깝다.

이 꼰대 자식도 그걸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려 먹는다.

자작곡을 내 이름이 아닌 본부장의 이름으로 가수들에게 넘긴다거나 어제처럼 큰손들에게 접대하거나.

이번에는 운 좋게 누나라고 해도 좋을 만한 젊은 여성이었지만,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여자일 때도 있었다.

그래봤자 서른 후반이기는 해도 그 두 배라는 단어가 꽤 무겁게 다가왔다.

그나마 남자가 없던 게 천만다행인가?

어떤 돈 많은 남자가 보이그룹의 멤버를 불러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난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문 열고 들어갔는데 남자가 기다리고 있으면 좆같긴 하겠네.”

기분 나빠지는 상상에 허탈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그러자 타이밍 좋게도 욕실 쪽에서 발소리가 점점 다가온다.

“벌써 가요?”

“아뇨, 오늘 콘서트 보러 가실 거죠? 갈 때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정말요?”

“그럼요. 근데 그전에 볼일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아, 예… 일단 한국에는 일 때문에 왔거든요…….”

“그럼 일 끝나면 연락해주세요.”

번호는 이미 알고 있기에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조금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이 굉장히 부담스럽지만,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줄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좋아해 준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다만 이 사람은 그다지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아서 문제다.

어젯밤 침대에서 미친 듯이 요구해오던 것도 그렇고, 지금 날 바라보는 눈빛도 그렇고, 지금까지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다.

보통 맘에 들어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질척하게 달라붙지는 않는데, 이 여자는 정도가 심하다.

본부장은 귀한 분이라고 했는데, 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건지…….

상대가 누구든 제대로 지원만 해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아침… 같이 먹을래요?”

“아뇨, 호텔식은 조금…….”

“제가 살게요. 같이 먹어요.”

“……”

분명 한 번 거절했는데도 사주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꺼림직하다.

꺼림직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럼 바로 먹으러 가요!”

손목을 잡아끄는 그녀의 손을 당장이라도 떼어놓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좋은 꼴 못 몰 걸 알기에 꾹 참으면서 애써 미소 짓는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하게 될지 생각하면서.

* * *

“역시 사람 많네요.”

“기획사 합동 공연이니까요. 혹시 이런 콘서트 처음이에요?”

“네, 처음이에요. 진우 씨는 많이 왔어요?”

“예전에 많이 왔었죠. 요즘에는 연습 때문에 바빠서 못 왔는데 야요이 씨 덕분에 오랜만에 와서 좋네요.”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시선을 무대 위로 던진다.

아직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무대.

무대 뒤편에서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중에는 시스터스도 있겠지.

“죄송해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무난한 핑계를 대고는 대기실 쪽으로 향한다.

원래 관계자가 아니라면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본부장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대기실을 담당하는 스태프가 출입 인원 등을 통제하고 있지만, 기획사 관계자라는 걸 알려주는 목걸이를 보여주니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본부장이 있어서 정말 편하다.

꼰대 새끼이기는 해도.

“……시스터스 대기실이나 찾자.”

그 꼰대 새끼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는 내 처지에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둘러본다.

세븐즈나 IF를 포함한 유명 아이돌은 물론이고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도 잔뜩 있다.

그런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 아니더라도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니, 시스터스라는 그룹이 얼마나 특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세븐즈를 띄워주는 역할이라고는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런 무대에 선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어쩌면 그 세 명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밟아놓아야 하니까 알 바 아니긴 한데, 연예계라는 곳은 역시 썩어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새로 들어와서 시스터스의 매니저가 됐다는 사람이었다.

무섭게 생겼다고 소문이 났던데 진짜네.

“안녕하세요.”

“너… 왜 여기 있냐……?”

표정을 잔뜩 찌푸리며 묻는 그에게 조용히 목에 걸고 있는 걸 보여준다.

KIS 소속이기는 해도 연습생일 뿐인 내가 이걸 갖고 있을 리 없다.

그걸 알기에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그게 조금 재미있기는 해도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관객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시스터스 분들한테 인사라도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인사? 무슨 인사? 엿이라도 먹이려고 왔냐?”

“아뇨, 그럴 생각은 없는데요. 인사 좀 하고 싶은데 들어가도 되죠?”

“미안한데 들어가도 아무도 없을 거다. 다들 나갔거든.”

“벌써요? 아직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아무튼 없으니까 인사는 다 끝나고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가고 싶기는 한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의 제지를 뚫을 자신은 없다.

멘탈 좀 건드려주고 싶었는데 아깝네.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올 거니까 기다려달라고 말해주세요.”

“……”

대답 대신 일그러진 표정을 더욱 구기는 매니저를 뒤로하고는 관객석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문득 무대로 나가는 쪽에 그 셋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완벽하게는 아니고 반만.

“무대 뒤는 이렇게 생겼구나? 너도 이런 거 만지는 거야?”

“비슷한 거 만지긴 해.”

“진짜? 당신도 예전에 이런 거 썼다고 하지 않았어?”

“이거 그거잖아? 음향 세트? 맞지? 아빠도 이거 만져봤었는데.”

“방송부에서지? 그거 백 번은 들었어.”

들을 때마다 그 시절이 떠올라 그리우면서도 동시에 내 꿈과 계획을 전부 망가트려 원망스럽기도 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중년 남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아마도 부모겠지.

대기실까지 가족이 찾아오는 건 드물지 않지만, 이런 곳까지 구경을 오는 건 처음 본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관계자인 거 같지도 않은데,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네.

멘탈도 건드릴 겸 스태프인 척하고 한마디 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다가가려는데, 나보다 먼저 다가간 스태프로 인해 세 사람이 쫓겨난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세 사람.

순간 당황해서 무심코 몸을 숨기고 말았다.

병신같이 뭐 하는 건가 싶어서 다시 쫓아가서 말을 걸려는 순간.

어깨를 붙잡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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