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데뷔
* * *
“심심해~”
“나도 심심해…….”
콘서트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주말 동안은 푹 쉴 수 있었기에 숙소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뜬금없이 김혜림과 박하연이 들이닥쳤다.
정말 오랜만에 게임을 하고 있던 나한테는 그야말로 천재지변과도 같은 상황이다.
“심심하다고~”
“심심해 죽겠어…….”
“아니… 심심한데 뭐 어쩌라고… 난 하나도 안 심심해.”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두 사람을 힘껏 노려본다.
안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라 바뀐 게 많아서 바쁜데 옆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니까 정신 사납다.
“야, 주말에 무슨 게임을 하고 있어. 나가자.”
“맞아. 영화 보러 갈래?”
“어제는 숙소에서 가만히 쉴 거라며… 그리고 갑자기 무슨 영화야…….”
“기껏 쉬는 날인데 게임만 하면 재미없잖아.”
“그러니까 영화 본 다음에 저녁이나 먹고 오자.”
얘네 진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어제는 오랜만에 쉴 수 있으니까 숙소에서 뒹굴거릴 거라면서 좋아하더니, 왜 갑자기 나가자는 거야.
애초에 형들한테 말은 한 건가?
“신 팀장님한테 허락받았어.”
“……”
내 생각을 꿰뚫고 먼저 대답해버리니 말이 막혀버렸다.
무슨 독심술이라도 쓰나.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자~”
“나가자~”
“아니… 나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이러면 어쩌라고…….”
“우리도 안 했어.”
“맞아.”
“……”
확실히 몰골을 보니 준비는커녕 씻지도 않았다.
조금 있으면 12시인데 왜 아직도 안 씻고 있는 거야.
“그럼 빨리 씻고 와…….”
“넵!”
“아, 내가 먼저 씻을 거야!”
“응, 나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방을 뛰쳐나가는 두 사람.
주말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
한숨과 함께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자 몬스터에게 열심히 얻어맞고 있는 내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마이크를 붙잡은 순간.
“……”
어두워진 화면 안에서 토끼 귀를 달고 있는 캐릭터가 쓰러진다.
딱히 큰 패널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굉장히 나쁘다.
무엇보다 내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파티원들의 물음표가 매우 무섭다.
[????]
[뭐함?]
[잠수 에반데;;]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하며 부활 아이템을 사용한다.
다행히도 욕설까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택배라도 왔냐고 넉살 좋게 웃는 걸 보면 그리 나쁜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저번에는 실수했다가 진짜 욕 엄청나게 먹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부모님이 없냐고 욕하는 건 너무 심한 거 같아서 바로 차단하고 신고해줬다.
오늘은 신고 안 해도 되겠네.
“아! 박하연 미친년아! 내가 먼저라고!”
“먼저 온 사람이 먼저임~”
파티원들은 신고는 안 해도 되는데 밖에 있는 년들은 신고하고 싶다.
소음으로.
그나저나 뭐 하는데 저렇게 난리야.
“둘이서 뭐해…….”
사냥도 끝나서 거실로 나와보니 속옷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의 꼴사나운 아이돌 연습생이 눈에 들어왔다.
속옷은 좀 치우고 하면 안 되나.
아니 그것보다 색은 좀 맞춰서 입어…….
왜 짝짝이야…….
“얘가 자꾸 자기가 먼저 씻겠다고 하잖아!”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까 먼저 씻겠다는데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실까? 동생한테 양보 좀 하세요 언니.”
“진짜 별 시답잖은 걸로 싸우네…….”
“시답잖다고?! 이건 멤버들 간의 위계질서 문제야! 가장 언니인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게 맞지!”
“나이는 가장 언니인데 하는 짓은 가장 언니 같지 않은데요?”
“아니 뭐래! 빨리 나오기나 해!”
“응 싫어~”
“야! 박하연! 안 나와?!”
약 올리면서 문을 쾅하고 닫는 박하연.
김혜림이 그런 박하연을 열심히 불러보지만, 이미 문을 잠가버렸으니 들어가서 끌어낼 수도 없다.
그 와중에 얘 표정이 정말 분해 보여.
얘네 진짜 나보다 언니 맞아?
누가 봐도 몸만 커진 초등학생 같은데?
“아니, 저게 언니를 대하는 태도냐고!”
“누가 봐도 아니지…….”
“진짜 한 번 기강을 잡아야겠어.”
“……”
기강을 잡을 수 있었으면 진작에 잡았겠지.
괜한 헛수고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이 딱해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기강 잡기 열심히 해…….
* * *
“피곤해…….”
“놀러 갔다 왔는데 평소보다 더 피곤해지는 게 말이 되냐고…….”
“내 말이…….”
기껏 밖에서 놀다 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셋은 소파에 축 늘어진 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영화나 저녁 식사에 딱히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영화는 굉장히 재미있었고 저녁도 매우 맛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늘어져 있는 이유는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 문제 때문이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리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모여든 덕분에 잠깐 소란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렇게 쉽게 알아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든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은 정말 소수였는데…….
셋이서 같이 다녀서 그런가?
아니면 인지도가 꽤 오른 건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몰려들어서 고생깨나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스크라도 하고 나갈걸…….”
“셋이서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면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신고당할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겠네…….”
“으으……!”
축 늘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김혜림과 박하연을 멍하니 바라본 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와서 곧바로 뻗어버린 탓에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다.
찝찝하니까 화장도 빨리 지워야지.
“나 먼저 씻는다?”
“그래…….”
“다음은 나…….”
아침과는 다르게 순순히 승낙하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걸 보니 금방 이해가 됐다.
아침에는 나갈 생각으로 신나서 빨리 씻고 싶었지만, 지금은 피곤하니 움직이기도 싫다 이거다.
참 알기 쉽네.
당장이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꿀꺽 삼키고는 속옷을 챙기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거실 쪽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온다.
김혜림의 벨소리.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소리지만, 지금은 듣기만 해도 온몸에 털이 곤두설 지경이다.
누구한테서 온 거지?
김혜림의 친구나 가족?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김혜림에 한해서 그럴 리는 없다.
왜냐면 김혜림은 거의 모든 연락을 메신저로 주고받으니까.
어느 정도냐면 김혜림이 전화 받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런 김혜림이 전화를 받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신 팀장님 혹은 선생님.
그럼 신 팀장님인가?
숙소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할 겸 전화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박하연이 전화로 신 팀장님께 알렸다.
그러니 그럴 일은 거의 없지만,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로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 만에 하나의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단 하나.
선생님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이런 다소 뜬금없는 시간에 전화를 한다는 건?
뭔지는 몰라도 급한 일이라는 것.
뭐? 뭔지는 몰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뭔지 모를 리가 없다.
지금도 맘속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멍하니 있던 것도 잠시.
서랍에서 꺼냈던 속옷을 잽싸게 집어 던진 뒤,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던 2명에게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둘 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로 시선을 보낸다.
전화를 받고 있는 김혜림은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이었다.
“누, 누군데? 선생님이야?”
“응…….”
김혜림 대신 박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리고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김혜림이 전화 너머로 묻는다.
“저희 데뷔하는 거예요……?”
그 질문과 함께 나와 박하연이 마른침을 삼킨다.
콘서트를 무사히 끝마친 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신경 쓰여서 미칠 거 같았다.
아마도 그건 이 두 명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몇 달 만에 갖는 휴일에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숙소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드니까 나가자고 난리를 친 거겠지.
“진짜요……?”
“뭐, 뭐래? 데뷔할 수 있대?”
“야, 쉿…! 조용히 해!”
“어… 응…….”
김혜림의 놀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박하연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그렇게 인상 잔뜩 찌푸리면서 노려보면 무서운데요…….
생각보다 험악한 표정에 김혜림 쪽으로 시선을 피한다.
뭔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한데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혹시 안 좋은 얘기인 거야?
설마 우리가 아니라 김진우 그 자식이 데뷔한다는 얘기?!
아니 진짜 그건 좀 아닌데.
진짜 안 되는데…….
“네, 알았어요… 그럼 월요일에 봬요. 네.”
“뭐래? 데뷔래? 설마 우리 말고 걔네가 데뷔하는 건 아니지? 우리 데뷔 맞지? 응?”
김진우 자식이 우리 대신 데뷔조가 되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는 사이에 통화가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박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목소리에서 불안함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김혜림 얘 표정만 보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나 완전 실망했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안심할 수 있을까.
누가 보더라도 데뷔 실패를 전해 들은 표정이다.
그걸 어렴풋이 느낀 나와 박하연의 분위기가 점점 곤두박질친다.
“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우리 아직 시간 있으니까…….”
“어, 응… 그렇지…….”
애써 밝은 척하고 있지만, 우리 둘 다 김혜림의 눈치를 보고 있다.
시간이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
김혜림에게는 이제 남은 시간이 없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용하면서도 울적한 분위기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나게 떠들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면 귀신이 지나가는 거라던데.
지금은 차라리 귀신이라도 나와줬으면 좋겠다.
정말 질색인 귀신이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하다.
겨우 이 정도로 눈물을 보일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하아…….”
코끝을 훌쩍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그 목소리마저 떨리는 걸 보니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로 울어버릴 거 같았다.
어차피 샤워할 거였으니까 빨리 들어가야지.
무엇보다 얘들 앞에서 울고 싶지도 않고.
그런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푸흡…….”
순간 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웃는다고?
지금 이 상황에?
순간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진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웃을 수가 있을까?
김혜림인가? 아니면 박하연?
아니, 어느 쪽이든 그냥 정신줄을 놓아버린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소리였다.
그냥 이대로 무시할까?
아니면 나도 같이 웃어버릴까?
“푸하핫……!”
또 다시 들려오는 웃음소리.
이번에는 훨씬 더 크고 유쾌한 목소리였다.
나도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다른 애들이 아니라 내가 정신이 나가버린 게 아닐까?
그런 의심과 함께 고개를 살짝 돌려본다.
“너, 너네 얼굴… 진짜… 하핫! 존나 웃겨!”
“……”
“……”
그제야 이 웃음소리의 주인과 지금 이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배를 움켜잡고 자지러지고 있는 김혜림.
그리고 그런 김혜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박하연.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을 나까지.
아…….
속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야 이 미친년아!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이 또라이 같은 년아!”
“아 진짜! 너 미쳤냐!”
정신을 차려보니 나와 박하연은 김혜림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어렸을 적에 친구들끼리 뒹굴고 놀던 것처럼 말이다.
“미안…! 알았어! 무거워! 진짜 미안! 살려줘!!”
무겁다고 소리를 빽 지르고 있지만, 정작 목소리에서는 웃음기가 잔뜩 섞여 나온다.
진짜 이 미친년, 얄미워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