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추락
* * *
반년 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은 더욱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되어 돌아왔다.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 따른 반동으로 실망과 분노도 컸다.
그리고 그 실망과 분노의 영향이 곧바로 몸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고열로 말이다.
마치 미칠 듯이 타오르는 태양 속으로 내던져진 듯한 느낌.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었던 탓에 이틀을 꼬박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실패한 거 갖고 앓아누운 거냐는 부모의 비아냥을 묵묵히 들으면서.
그나마 형이라는 놈은 조용해서 그나마 다행이었으려나.
어차피 비웃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걸 테지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어디야.
솔직히 시끄럽게 지랄하는 것보다는 속으로 비웃는 게 낫다.
물론 아무 말 없이 속으로 비웃는 김에 아예 얼굴을 안 비추면 더 좋겠지만.
“진우야, 몸 좀 괜찮냐?”
“……”
“너무 힘들면 병원 가라니까.”
“……”
“가기 싫으면 약이라도 먹어. 배 안 고프냐? 죽이라도 먹을래?”
“……”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을 뿐 대답은 없다.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식은 참 부지런하게 내 방에 찾아와 이렇게 상태를 확인하며 질문을 던졌다.
앓아누운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 간격으로.
솔직히 이 정도면 무서울 정도다.
나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존감을 채우는 음침한 속마음을 숨긴 채 좋은 형을 연기하려는 그 역겨운 모습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온다.
평소에도 그랬는데 몸 상태가 안 좋아진 지금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이렇게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 녀석이 찾아와 말을 걸어올 때마다 위액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쏟아져나올 거 같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기에 이불로 시야를 가리며 돌아눕는다.
역겨운 새끼…….
더러운 속내가 다 보이는 것 같아.
“나 오늘은 계속 방에 있을 거니까 뭐 필요한 거 있으면 톡이라도 해. 알았지?”
“……”
“그럼 잘 자라.”
이번에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만족한 듯이 방을 나선다.
자기만족을 위해 날 이용하는 저 모습은 아마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겠지.
내가 이 집을 나가서 연을 끊거나 그냥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약…….”
물론 뒤질 생각은 없다.
시발 누구 좋으라고 죽어.
이 집의 개같은 인간들이 죽으라고 지랄해도 살아남을 거다.
그러니까 좆같은 놈이 가져다준 약이라고 해도 먹자.
안 그러면 진짜 뒤질 거 같아.
몸을 살짝 일으켜 답답한 가슴팍을 쓸어내린 뒤 약 쪽으로 손을 뻗는다.
아니, 뻗으려고 했다.
“……?”
약을 잡기 위해 내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고열에 시달린 탓에 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시야가 너무나도 선명하다.
아직 열은 있지만, 새벽만큼의 엄청난 고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데다가 감각도 딱히 이상은 없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손이 잘 보이니까.
힘줄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새하얗고 너무나도 부드러워 보이는 손이.
“이게 뭐야…….”
내 눈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싶어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떠본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여전히 내 눈앞에 보이는 손은 작고 하얗다.
게다가 이상한 건 이 손만이 아니다.
“모, 목소리… 목소리 왜 이래…….”
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이상하다.
일반적인 남성들보다 조금 높은 음색의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높지는 않았다.
이건 마치 여자 같은…….
“설마…….”
번뜩하고 떠오른 생각에 불편한 몸을 일으켜 거울로 향한다.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병.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발병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병.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징조가 없는 건 아니다.
고열이라는 알기 쉬운 징조가 있지만, 흔하다면 흔한 증상이기에 쉽게 깨달을 수도 없고 깨닫는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
고열에 시달리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인데다가 몸살과 증상도 비슷하니까.
해열제 먹고 자면 낫겠지.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게 대부분이다.
애초에 고열이라는 증상을 발견해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해외에서는 조금이라도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남성 호르몬을 맞은 사람도 있다고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한다.
호르몬을 맞았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여자로 변했다는 뉴스를 인터넷에서 봤으니 확실하다.
즉 호르몬이든 뭐든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뉴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아니, 눈앞에서 일어났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
눈앞도 아니고 내 몸에 일어났다.
“아니, 씨발… 이게 말이 되냐고…….”
아마도 어젯밤에.
고열에 시달리며 힘겹게 잠든 그 몇 시간 사이에.
몸의 구조가 완전히 바뀌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진짜 말이 되냐고…….”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일 텐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입고 있는 옷이 내 옷이다.
그리고 내 행동 하나하나를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눈앞에 있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하룻밤 사이에 여자가 됐다.
그것도 보통 여자가 아니다.
이제 곧 성인이 되는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여자.
너무나도 작은 여자아이.
그 여자아이가 거울 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 *
“결과가 나올 때까지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그 애가 진짜 진우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병원에 입원시키는 방법도 있는데 그러면 병원비 아깝잖아요. 보험 처리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판 처음 보는 애를 데리고 있으라니 그게 말이 되니?”
집이 조용한 탓인지 아니면 어려진 탓에 귀가 좋아진 건지.
안방에서 하고 있는 대화인데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생생하게 들려서 기분 나쁘다.
어머니가 저런 반응을 보일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형이 이상할 정도로 날 싸고도니 평소보다 더욱 역겹다.
어차피 여자로 변한 것도 모자라서 중학생 정도로 어려져 버린 날 비웃고 있을 게 뻔하다.
저 새끼는 그런 새끼다.
위선으로 가득 찬 쓰레기 새끼.
“너무 그러지 마세요. 만약에 진우가 아니라고 해도 아직 어린애인데.”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남의 집… 하아… 말을 말자…….”
“결과도 금방 나온다니까 일단 그거 보고 결정해요. 아버지한테는 제가 말해놓을 테니까 어머니는 먼저 주무세요.”
“그래… 한밤중에 이게 뭐 하는 짓이라니… 네 아빠는 이 난리인데도 술 처마시느라 안 들어오는 거니?”
“연락 없으신 거 보면 그런 거 같아요.”
“하아… 됐다 됐어… 그 양반이 그렇지 뭐…….”
“그럼 전 진우한테 가볼게요.”
“그래, 아빠 너무 안 오면 그냥 자고.”
“네, 주무세요.”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병에 걸린 탓에 잠시 착각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단순한 착각이 아닌 모양이다.
확실하게 민감해졌다.
저런 작은 소리에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니, 무슨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사이즈 괜찮아? 급하게 산 거라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 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
“잘 맞으니까 됐어…….”
“다행이네. 아직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지? 뭐 시켜 먹을까?”
“됐어, 배 안 고파…….”
언제부터 그렇게 챙겨줬다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평소랑 다른 상황이니만큼 다른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거부감만 든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거실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귀찮은 놈이 자꾸 달라붙는 걸 보니 그냥 방에서 기다려야겠다.
“방에서 쉴 거니까 아버지 오면 불러.”
“진짜 밥 안 먹게? 점심도 대충 때웠잖아.”
“배 안 고프니까 됐다고.”
자꾸만 귀찮게 구는 녀석을 노려보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아본다.
내가 듣기에는 제법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실실 웃는 걸 보니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알았어. 햄버거 시켜놓을 거니까 먹고 싶어지면 나와서 먹어.”
한껏 짜증을 냈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기만 한다.
누구는 갑자기 이렇게 돼서 심란해 죽겠는데 기분 나쁘게 웃고 자빠졌네.
진짜 미친 새끼인가.
“쯧…….”
보란 듯이 혀를 차도 표정은 변화가 없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욕이라도 뱉을 거 같기에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기분 나쁜 놈을 계속해서 상대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병신도 아니고 뭐가 좋다고 저 지랄인지 진짜…….”
평소보다 높아진 침대에 몸을 던진 뒤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이 몸은 추위를 많이 탄다고 해야 하나?
따듯한 게 이상할 정도로 끌린다.
그다지 춥지는 않은데 그저 이불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포근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을 정도다.
“졸리네…….”
이불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와 포근한 온기에 금방 잠기운이 몰아닥친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피곤하다.
아마 몸이 변한 탓이 가장 크겠지.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데도 이렇게 잠이 쏟아지는 걸 보면 진짜 어린애가 따로 없다.
근데 아버지 오면 설명해야 하는데…….
지금 자면 또 설명 안 하고 퍼질러 잤다고 지랄할 텐데…….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아까 그 미친 새끼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지금은 너무 졸려서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다 귀찮고 너무 졸리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마에 빠져든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