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계속 나아가는(完)
* * *
“으아… 죽을 거 같아……!”
인터뷰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김혜림이 힘없이 소파 위로 쓰러졌다.
그리 길지 않은 인터뷰였는데도 불구하고 기운이 다 빠지는 기분이라 나도 어디든 눕고 싶은 기분이다.
“다들 수고했어. 일본어 공부한 보람이 있었네?”
“오빠, 나 뭐 실수한 거 없었어? 괜찮았어?”
“실수 안 하고 잘했어. 들어가기 전에는 못한다고 호들갑 떨더니 제일 잘하더라.”
“진짜? 다행이다…….”
박하연은 어젯밤에도 불안하다고 떨었으면서 인터뷰 직전까지 안절부절못했다.
인터뷰에서 가장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으면서 말이다.
도대체 왜 떨었던 건지 모르겠다.
“오빠, 우리 점심 먹고 쇼핑 좀 해도 돼?”
“그래, 다음 일정까지 시간 꽤 있으니까 쉬어도 괜찮아. 근데 뭐 사려고?”
“아이 쇼핑!”
“그래… 일단 밥 먹으러 가자.”
당당하게 아이 쇼핑을 외치는 김혜림을 묘한 눈으로 바라본 태영이 오빠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앞장서며 대기실을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오빠가 문을 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야, 애들 사인해달라는데?”
“응? 누가?”
“아까 너희랑 같이 방송 출연했던 사람들이랑 스태프들.”
“아…….”
같이 출연했던 사람들이라면 일본 연예인들일 텐데, 연예인이 같은 연예인한테 사인을 해준다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금방 끝날 거 같은데 어때?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빨리 사인해드리고 밥 먹으러 가자!”
사인해주는 걸 이상하게 좋아하는 김혜림이 가장 먼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혁 오빠가 문을 열어젖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쳤지만, 한 명 한 명 사인하며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어 실력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한국 음식 좋아한다는 말에 ‘저도 돈카츠 좋아해요~’ 같은 상투적인 말일 뿐이었지만, 그런 짧은 말이라도 좋아해 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아, 안녕하세요…….”
“어…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어 할 줄 아세요?”
“조금 할 수 있어요.”
“조금이 아니라 되게 잘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 그래요? 감사합니다…….”
서툰 한국어에 조금 놀라면서도 활짝 웃으며 여성분이 건넨 물건을 받아들었다.
“와… 이거 갖고 있으시구나…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내밀던 것과 조금 달라서 뭔가 싶었는데 무려 데뷔 앨범이었다.
그것도 일본판이 아니라 한국에서 막 데뷔했을 때 발매된 앨범.
일본 데뷔는 시야에 넣고 있지 않을 때라 한국에서만 팔았던 건데 어떻게 구하신 거지?
중고로 구하셨나?
“데뷔하셨을 때가 제가 한국에서 유학했을 때라… 그때 샀어요.”
“유학이요? 그래서 이렇게 잘하시는구나. 혹시 어느 학교 다니셨어요?”
“고등학교라 잘 모르실 텐데… 선화 고등학교라고 서울에서 다녔어요…….”
“서, 선화 고등학교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랑 가까운 곳이네요… 하하…….”
선화 고등학교면 사립 학교 중에서도 돈 많은 학생들만 다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인데, 유정이랑 비슷할 정도로 엄청난 부잣집 아가씨셨구나…….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인정받은 기분이야.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나오예요. 오오야마 나오.”
“오오야마 나오님… 여기요!”
“가, 감사합니다!”
앨범을 건네니 고개를 푹 숙이고는 순식간에 달려가 버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다.
“쟤는 아무 여자나 다 꼬시나 봐…….”
“진짜 무서운 년이야……”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헛소리하는 둘을 노려봐준 뒤 계속해서 사인을 이어갔다.
팬 사인회는 아직 멀었는데 미리 연습하는 기분이야.
그렇게 대충 몇십 명은 사인을 해 준 뒤에야 겨우 끝이 났다.
생각보다 많았던 탓에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아이 쇼핑은 못 할 거 같은데?
* * *
“라멘은 왜 먹을 때마다 맛있지?”
“갑자기?”
“아까 먹었던 거 맛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라멘 얘기 꺼내는 게 조금 뜬금없었어.”
김혜림이 워낙 뜬금없는 소리를 자주하기는 해도 지금처럼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조용한 편이다.
갑자기 이러는 걸 보면 또 뭔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왜 그래? 긴장했어?”
“아니. 몇 번이나 했던 건데 새삼스레 긴장은 무슨…….”
“그럼 왜 그래 갑자기. 평소에는 쟤랑 같이 귀 막고 조용히 핸드폰만 보면서.”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소파에 누워 있는 박하연을 가리키니 김혜림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진짜 왜 이래?
왜 안 하던 짓을 하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평소랑 너무 달라서 그런지 갑자기 걱정된다.
원래 지금쯤이면 집중해야 한다면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을 때다.
그런데 지금은 한숨을 내쉬면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무대에 지장이 가는 것도 걱정되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애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 같아서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진통제 먹을래?”
“그거 아니거든?”
“그럼 뭔데…….”
혹시 생리인 건가 싶었는데 아닌가 보다.
그럼 저러는 이유가 뭐냐고.
뭐 잘못 먹었나?
“소화제?”
“아픈 거 아니라고…….”
“……”
아픈 게 아니면 갑자기 변덕이라도 부리고 싶어진 걸까?
아닐 거다.
아마 갑작스러운 변덕은 아니다.
무대에 서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게 김혜림인 만큼 그럴 리가 없다.
변덕 같은 가벼운 이유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다.
“긴장도 아니면 뭔데. 갑자기 루틴까지 무시하고.”
“그냥…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서.”
“여기까지?”
“외국 방송에서 인터뷰도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한테 사인도 해 주고, 이제는 음악 방송에도 나가는 거니까… 뭔가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뭐야 왜 이렇게 새벽 감성이야?”
“어쩌라고! 사람이 갑자기 감성적일 때도 있고 어?! 막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김혜립답지 않게 굉장히 감성적이다.
평소에는 이상한 소리 하면서 박하연한테 놀림 받거나 날 놀리거나 하던 애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나까지 감성적으로 변하잖아.
“우리 데뷔 몇 년 차였지?”
“3년.”
“벌써 3년이나 됐어?”
“되게 빠른 거 같지 않아? 난 아직도 1년 차인 거 같아. 데뷔 1년 기념 행사했던 게 바로 며칠 전인 거 같은데…….”
“난 데뷔한 게 엊그제 같아.”
“……넌 또 언제 일어났냐?”
방금까지만 해도 조용히 누워 있던 박하연이 옆에 앉아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화에 끼어든다.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던 애가 이렇게 옆에 앉아 있으니 조금 기분이 이상하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원래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한 명은 자는 척하면서 음악 듣고, 한 명은 음악 들으면서 핸드폰하고, 마지막 한 명은 가만히 앉아서 무대에 섰을 때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야 하는데…….
김혜림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는 바람에 다들 루틴이 완전히 박살이 나 버렸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색다른 기분이다.
그것도 굉장히.
무대 올라가기 전에 이렇게 셋이서 떠드는 게 얼마 만이지?
“우리 데뷔 무대 촬영했을 때 기억나냐? 진짜 대박 힘들었잖아.”
“아… 얘가 자꾸 실수해서 울상이었던 거?”
“내, 내가 언제…….”
“다 기억하고 있거든? 잔뜩 긴장해서 계속 실수했던 거.”
“……”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고생했다며 작게 한숨을 내쉰 둘이 기분 나쁜 미소로 날 바라본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지만, 한치의 거짓말도 없이 사실이기에 할 말이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조용히 시선을 피하는 것뿐이다.
“실수 한 번 할 때마다 우리랑 스태프들 눈치 봤던 귀여운 우리 막내가 이제는 언니들한테 대들기나 하고… 너무 건방져진 거 같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예전에는 술도 잘 못 마셔서 언니~ 언니~ 거리면서 매달렸었는데.”
“내가? 그런 적 없거든? 맘대로 날조하지 마.”
“그래~ 필름 끊겨서 기억 못 하겠지~”
“그때 찍은 영상 보여줬던 거 같은데? 너무 충격적이어서 기억에서 지워버렸냐?”
“……몰라.”
필사적으로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해보지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 때문에 자꾸만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때는 주량 조절이라는 걸 아예 못할 때라서 어쩔 수 없었다.
안주나 물도 없이 마구 마시던 그때의 나를 진심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술에 꼴아서 내 자취방 바닥 청소해주던 게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 술을 즐기는 나쁜 여자가 돼버렸어…….”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였는데… 지금은 그냥 성격 더러운 여자가 돼버렸지……”
“그때도 엄마라고 부르면서 라면 끓여달라고 했었으면서 애기는 무슨. 너희는 엄마가 애기야?”
“그때의 막내는 애기 엄마였지.”
“엄마인데 애기였지.”
“……뭐라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두 사람을 살짝 노려봐준 뒤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엄마 타령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지만, 적어도 애기 취급은 끝나서 다행이다.
나이 22살 먹고도 애기 취급당하면 솔직히 짜증 나잖아.
근데 엄마는 나이 먹는다고 사라질 것 같지도 않아서 불안하네.
“데뷔 1년 기념 파티 때 얘랑 선생님이랑 싸웠던 것도 생각나네.”
“아! 선생님한테 왜 엄마 집에 혼자 두고 왔냐고 잔소리했던 거?”
“그래, 그거. 진짜 어이없어서 웃겼었는데 그때.”
“그게 뭐가 웃겨! 임신한 사람을 집에 혼자 내버려 두고 오면 안 되지!”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까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는 정말로 장난 아니게 살벌했었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욱하고 올라온다.
아무리 우리를 축하하러 온 거라고는 해도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를 집에 혼자 두고 술이나 마시러 온 게 잘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도 임신 때문에 반강제로 휴직하게 된 탓인지 우울증까지 왔었는데, 그런 사람을 놔두고 파티에 와서 웃고 떠들고 있다니.
진짜 어이가 없어서 슬쩍 불러내서 잔소리를 조금 했는데, 결국은 대판 싸우는 지경까지 갔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이겨서 집으로 돌려보냈었지.
집에서 혼자 멍하니 있는 엄마를 보고는 꽤 충격을 받은 건지 그 후로는 애처가가 되겠다며 아주 난리였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아무튼 뭐 그런 일도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 두 번째 파티 때는 언니랑 시우랑 같이 왔잖아.”
“아… 시우 진짜 너무 귀여워서 또 보고 싶다. 안 그래요? 전 시우 씨?”
“시아 씨, 동생이 자기랑 똑같은 이름이면 어떤 기분인가요?”
“딱히 기분 나쁜 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고… 뭔가 되게 애매한 기분이네요…….”
2년 전에 태어난 엄마와 아빠의 아이.
나한테는 남동생이 되는 아이인데, 하필이면 이름이 개명 전의 내 이름과 똑같다.
그때는 신시우였으니까 굳이 따지면 성이 다르니까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그래도 굳이 그 이름으로 할 필요가 있냐고.
도대체 시우만 몇 명이야…….
“좋으면서 싫은 척하네.”
“안 좋거든요…….”
“안 좋다는 애가 동생만 보면 실실 웃어?”
“시우는 좋아해. 하필 이름이 시우인 게 조금 그럴 뿐이야.”
“동생 이름이 싫다는 거네?”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그럼 좋다는 거네?”
“당연히 좋지. 근데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싫은지 좋은지 딱 정해야지. 싫다고 하면 바로 시우한테 알려주려고 했는데 아깝다.”
“하아…….”
둘이 무슨 미리 리허설이라도 한 것처럼 죽이 척척 맞는다.
날 놀릴 때만 잘 맞는 거 같아.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근데 너희 시우한테 아줌마 소리 듣잖아. 난 누나 소리 듣는데.”
“야, 우리한테도 누나라고 불러주거든?”
“저번에 만났을 때 누나라고 해 준 거 못 들었냐?”
“강제로 시켜서?”
“어, 어쨌든 누나라고 했으면 된 거지…….”
“그러게 말이야… 시아 씨 갑자기 선을 세게 넘네…….”
아줌마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둘의 표정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시우한테 아줌마라는 말을 들었던 게 꽤 충격적이었나 보다.
아직 2살밖에 안 된 아기인데 뭘 그렇게 풀이 죽는 건지 모르겠다.
아, 시우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네.
날 볼 때마다 방긋방긋 웃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귀여운지 몰라.
혹시 날 닮은 건가?
피가 이어지지도 않았고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엄연히 누나 동생이니까 닮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
“그럴 리가 없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라도 방금 했던 바보 같은 생각을 무심코 내뱉지 않도록 입을 다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분명 대기실에 들어오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떠들었을 텐데, 되게 오랜만에 수다를 떤 거 같은 기분이다.
데뷔 전에는 이렇게 떠드는 게 당연했었다.
세븐즈로 데뷔조에 있었을 때도, 걸즈세븐의 첫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데뷔가 걸린 콘서트의 대기실에서도.
우리 셋 중에 한 명 이상은 꼭 잔뜩 긴장해서 벌벌 떨었었다.
그리고 그 초조함과 긴장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허세를 부렸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커진 다거나 말을 많이 한다거나 같은 눈에 띄는 변화 덕분에 그 허세를 본 다른 멤버들에게 금방 들키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허세는커녕 긴장조차 하지 않고 각자의 루틴에만 집중한다.
오늘처럼 떠드는 게 굉장히 오랜만일 정도로 무대 전의 긴장감이라는 것이 많이 희미해졌다.
그렇다고 대충 준비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쓸데없이 긴장해서 떨지 않게 됐다는 의미다.
이런 걸 보면 조금은 성장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예전에는 두 사람이 언니다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3년이나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보면 그쪽은 거의 성장하지 않은 것 같다.
다른 건 변해도 성격이나 이런 건 역시 잘 변하지 않는구나.
“얘들아, 준비 다 했니?”
“벌써 저희 차례예요?”
“조금 있으면 올라가야 해. 다 된 거 같네.”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으로 정신 없는 표정의 신 팀장님이 들어왔다.
준비는 진작에 끝나 있었기에 문제는 없지만, 오랜만에 대기실에서 떠드는 이 느낌이 조금 그리워서 아쉽다.
그리웠던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버린 거 같아.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운 건 그리운 거고 무대는 무대다.
대기실에서 떠들고 싶으면 나중에 이어폰 꽂고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때려서라도 일으키면 되겠지.
“이제 슬슬 나가자.”
“네~ 야, 박하연! 빨리 가게 일어나!”
“왜 이래… 너무 흥분하지 마.”
“흥분 안 했거든? 평소대로거든?”
“퍽이나…….”
신 팀장님의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김혜림이 박하연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밀어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사옥 복도에서 내 어깨를 밀면서 연습실로 향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랑 똑같다.
기분 좋은 미소로 걸어가는 김혜림과 그런 김혜림에게 잡혀 귀찮아하는 박하연.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분명 변한 것도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남을 귀찮게 하는 걸 좋아하는 김혜림의 짜증 나는 면모라거나, 얼굴은 무서운 주제에 은근히 4차원 소녀 감성인 박하연의 엉뚱한 면모 같은 것 말이다.
그대로다.
그걸 깨달으니 언니다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 같아졌다.
쟤들이 언니다워진다는 걸 머릿속으로 그리지도 못하겠다.
귀찮게 굴지 않는 김혜림과 엉뚱하지 않은 박하연이라니.
지금처럼 대하지 못하고 서먹해질 게 분명하다.
그런 주제에 얘네가 언니다워지기를 바랐다고?
진짜 바보 같다.
바보 같았다.
언니다워지기는 무슨,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떠드는 편이 낫다.
“야, 빨리 안 나오고 뭐 해?”
“갑자기 무서워진 듯.”
“아니거든…….”
이상하다는 듯 날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얘네는 이제 멤버이자 친구나 마찬가지잖아.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무서워서 그룹 해체하자고 할지도 몰라.
변할 일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으려나?
아니 뭐 언젠가는 해체하겠지.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닐 뿐이다.
해체하더라도 그건 우리 사이가 틀어져서라기보다는 시스터스라는 그룹으로서의 수명이 다된 거겠지.
솔직히 얘네들이랑 싸우고 사이가 틀어지는 건 상상이 잘 안 되니까.
“혹시 뭐 문제 있니?”
“아뇨, 없어요.”
“저도요.”
“저도 없어요.”
스태프와 무언가 얘기를 나누던 신 팀장님이 매번 듣는 똑같은 말을 건넨다.
지겨울 법도 한데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꼭 이렇게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신다.
그만큼 일에 철두철미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하던 대로 해. 알았지?”
“네.”
신 팀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무대 뒤편으로 이동하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밝고 경쾌한 노랫소리와 조금 웅성거리는 관객들의 소리.
한국과는 달리 조금 적막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본의 관객들은 조용하다.
한국이었으면 호응이 좋지 않다고 하겠지만, 여기서는 이게 일반적인 모습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진짜 적응 안 됐었지.”
“조용한 거?”
“응. 무대 끝나도 박수 정도만 치고 환호성도 웬만하면 없잖아. 난 처음에 우리가 실수한 줄 알았어.”
“맞아. 그래서 그때 김시아 실수한 거 아니냐고 막 울었잖아.”
“내가 언제…….”
또 내 기억 속에 없는 얘기를 꺼내며 자기들끼리 히죽거린다.
관객들의 호응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조금 풀이 죽었던 건 사실이지만, 김혜림의 말처럼 울먹이지는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기껏해야 한숨 정도였다.
대체 내가 언제 울었다는 건지…….
“너 숙소 돌아가서 맥주 마시고 울었어. 기억 안 나지?”
“난 너 술 맛있다고 막 마시더니 갑자기 울어서 되게 놀랐던 거 아직도 기억나.”
“……”
아무래도 정말로 울었던 모양이다.
편의점에서 샀던 술이 탄산이랑 과일 맛 덕분에 맛있어서 조금 빠르게 마셨었는데, 설마 그 후에 울어버렸을 줄이야.
앞으로 술은 안 마셔야겠다…….
떨떠름한 기분에 괜스레 인이어를 한 번 확인해본다.
그러자 스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온다.
뭔가 이상이 있냐고 묻는 거 같길래 괜찮다고 웃어 보인 뒤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외국인이랑 대화하는 게 무대에 나가는 것보다 더 긴장된다.
“야, 김시아! 긴장하지 마!”
“안 했어.”
“그래.”
김혜림 얘는 무슨 착각을 한 건지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
잠깐 한숨 좀 쉬었다고 바로 긴장했다고 하냐.
무대 올라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뒤에 달라붙은 김혜림을 살며시 밀어내며 스태프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어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무대가 끝나자마자 터져 나온 거다.
이 정도의 함성이 나올 정도면 꽤 유명한 가수겠거니 싶었는데, 역시나 일본에서 굉장히 유명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다.
일본 특유의 감성이 녹아있는 잔잔한 노래를 주로 부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이미지 변화라도 꾀한 걸까?
의상이나 무대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달랐다.
물론 전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다.
그런 것보다도 인사나 하자.
국가는 달라도 연예계에서는 선배나 마찬가지이기에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살짝 웃어준다.
무슨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 아가씨 같아.
성격 더러운 아침 드라마 아가씨 말고 교양 있고 차분한 성격의 아가씨.
딱 유정이네.
“방금 그 사람 박하연이 네가 좋아하던 사람 아니야?”
같이 미소 지으며 인사했던 김혜림이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박하연의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좋아해야 할 박하연은 반응이 없다.
“존나 여신…….”
“……맛이 갔는데?”
“야, 정신 차려! 우리 바로 다음이야!”
“응…….”
살짝 어두워진 무대가 우리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그걸 보고 초조해진 건지 김혜림이 박하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든다.
좋아하는 가수 한 번 봤다고 이 모양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좋아했던 거야.
한숨이 절로 나오는 모습을 보며 다시 스태프들을 바라본다.
언제쯤 나가면 되는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나가면 된다며 손짓한다.
“나가도 된대.”
“벌써?! 박하연 미친년아 정신 차려!”
“저, 정신 차렸으니까 그만 좀 흔들어……!”
“정신 차렸으면 가자.”
“너 실수하면 죽어 진짜!”
“날 뭐로 보고… 실수 안 해.”
정신없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직 조명도 채 켜지지 않아 조금 어둡고, 관객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수군거리는 소리는 조금씩 들리지만, 적막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두컴컴하고 조용하다.
그런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으니 뭔가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다.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있을 수 없는데 말이지.
“후우…….”
작게 심호흡하며 살짝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어느새 따라온 둘이 각자 자리에 서 있다.
무대 위에서는 누가 봐도 아이돌이네.
그리고 이런 짜증 날 정도로 변덕쟁이 같은 둘이랑 계속 활동하겠지.
언젠가 해체할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되게 묘하네.
인정하기는 싫은데 엄청 안심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다.
뭐가 그리 무섭냐면 해체할 때 어떻게 될지가 조금 무섭다.
솔직히 울거나 슬퍼할 거 같지는 않다.
근데 또 혹시 모르지.
막상 그때가 되면 펑펑 울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눈물샘을 잠가놓는 연습을 하도록 하자.
이 무대가 끝나고 난 후부터 연습할까?
너무 서두를 필요는 딱히 없겠지.
천천히 연습하자.
분명히 다가오겠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