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4.유암화명(2)
-왔다, 이 새끼야.
-오. 빨라, 빨라.
유튜브를 보고 있던 스마트폰의 화면 위로, 메세지 도착을 알리는 팝업창이 반짝 떠올랐다. 답장을 남기며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지하철역 입구의 계단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던 성윤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익숙한 검은색 반무테 안경. 조금 거친 호흡. 성윤이 쪽 또한, 이내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내 쪽을 발견한 것인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 이몸 강림."
"... 웅장한 BGM이라도 틀어줘야 하나?"
"모르겠고 일단 좀 앉고 싶은데."
숨소리가 정말로 심상치 않았기에, 킥킥 웃음을 흘리면서도 슬쩍 벤치의 끝으로 몸을 붙였다. 정말로 전화를 받고서 꽤나 급하게 나온 것일까.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셔츠 자락 따위가 드문드문 눈에 보였다. 귀 부근에 난 땀 탓에 들러붙어있는 잔머리들이 계절감을 이상하게 만들어오는 듯했다. 아직 여름은 멀었지 않아?
"뛰어다닐 바에야 걷는다던 놈이 어쩐 일로 뛰어왔데."
잘 사는 집. 매사 여유 있는 태도이던 녀석이었기에,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것도저렇게, 땀까지 낼 정도로 흐트러지는 모습은 특히나.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듯 그렇잖아도 앞단을 잠그지 않고있던 외투를 휙 벗어버리는 녀석. 팔락거리며 휘둘러지는 손부채가 퍽 애처롭게 보였다.
"우리 사이에서 넌 이미 1급 요주의 대상이거든."
하지만, 그런 성윤이의 모습을 보고서 반쯤 장난 섞인 목소리로 묻는 내 말에 돌아온 것은 예상외로 사뭇 진지한 어투의 말이었다. 조금 가라앉은 듯 느껴지는 목소리의 의미가, 아직 가쁜 호흡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쉽사리 예상하기 힘들었다.
"농담?"
"그때 울고 짜고 했던 거 본 뒤로, '이 새끼 자살 안 하게 잘 봐주자'라고진짜 얘기하고 있는데."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말려올려가는 성윤이의 입꼬리. 그 표정은 무슨 의미냐는 듯 눈살을 찌푸려 보이자, 잠시 어물쩍 시간을 끌던 성윤이가 이내 툭 내뱉는 듯한 어투로 답했다. 이 자식들, 내가 없는 곳에서 그런 소리나 하고 있었다는 걸까.
"... 술김에 그랬던 거야. 술김에. 나 멀쩡해."
"그거야 네 생각이고. 남들이 보기엔 엄청 위태위태해 보이던데. 게다가 너, 친구도 우리밖에 없잖냐. 우리라도 안 봐줬다 진짜 고독사라도 해버리면 어떻게 해."
"안 해 그런 짓. 그리고 너희들 말고도 친구 있거든."
"구라 즐."
변명하듯 반론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도 썩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새삼 돌이켜보면, 확실히 꽤나 위태로웠던 것은 맞는 것 같으니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이 녀석들과 만났던 때에 한번 속에 든 것을 쏟아낸다는 느낌으로 감정을 토해낸 것이 계기였지 않은가.
그 뒤로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인 상대에게 지난 며칠간의 내 모습을 알아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명하자고 해도, '너희들 덕분에 괜찮아졌어'같은 말부끄러워서 내뱉을 자신도 없고.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휙 시선을 돌려버리자, 곧장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그래서, 이 조합으로 뭘 할 수 있죠."
"내가 고민 해와라 했잖아?"
그건 그거고, 여하 언제까지고 이곳에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럭저럭 숨을 고른 성윤이가 두서없이 꺼낸 화제에, 나 또한 두서없는 말로 답했다. 짧은 침묵.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할수 없다는 듯 굳어져있던 성윤이가,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켜 내 앞에서 뜨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미친 건가. 리얼로 생각을 안 해놨다고?"
"아 왜 욕해."
"욕 안 하게 생김?"
확실히, 나 같아도 부른 상대가 '진짜로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만'같은 태도로 일관한다 하면 저럴 것 같긴 하지만.
"그런 꼴로 그런 소리를 하니까 주변에서 쳐다보잖아."
"과연 이게 전적으로 제 잘못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그래."
피식 웃음소리와 함께 긍정의 뜻을 전하자, 곧장 '허 이 새끼 며칠 사이에 또라이 다 됐네'하는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가 두두두 쏘아졌다. 굳이 답해줄 이유는 없었기에, 그저 생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 그래도, 일단 어디든 가야겠긴 하다. 딱딱한데 너무 오래 앉아있었더니 엉덩이 아파."
"10분도 안 걸렸지 않아?"
"10분이면 충분히 길어."
조금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눌리고 있던 부분이 벤치로부터 떨어지기 무섭게, 꼬리뼈를 중심으로 욱신거리는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비틀비틀 움직이는 내 모습에, 또다시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지 마라."
"병쟁이네 병쟁이."
"... 어째 계속 부정하기 힘든 말들만 나오는걸."
"밥부터 먹을까."
"안 먹었어?"
"아니 이 새끼가 진짜..."
그딴 소리 할 거면 점심 무렵 애매한 시간에 사람 부르는 짓을 하지 말라며, 걸어가는동안 지겹도록 혼났다.
6.
"엑. 방송?"
"응. 너희들이 왔다 갔던 날부터 해서, 캠화면에까지 나오고 있어."
"뭔가 텐션 높아 보였던 건 청자들에게 물든 탓이었던 건가..."
돈가스가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썰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며 지난 한주 간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었더니, 성윤이의 놀라움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텐션이 높아져있던가, 내가? 평소랑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돌아다닐 생각이 든 건, 조금 충동적인 일이었긴 했지만.
"그냥 좀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나돌아다닐 생각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은데."
"내 기억으론, 너 콩쿠르에서 상장 받을 때도 무덤덤했었어. 그런 놈이 기분 좋은 일 좀 생겼다고 이렇게 앞뒤 생각 안 하고 사람 불러내는 건 지켜봐온 입장에서 좀 이상하지."
"음... 별로 기쁜 일이 아니었던 걸지도."
"원장님 우시겠다. 너 엄청 아끼셨다며. 요즘에도 연락드리고 있나?"
"스승의 날 때나 한 번씩?"
건네져오는 질문에건성으로 대답하고는, 성윤이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본다. 그러고 보면, 뭔가 문자 주고받을 때에도 기분 좋은 일 있냐는 둥 하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아졌던 것 같기도 하고. 오늘 강 영후 의사도, 표정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고.
"... 이 모습이 되기 전이랑, 성격이 좀 변했나?"
"그 모습이 되기 전이랑...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찾아가기 전후의 차이가 너무 큰데. 좀 발랄해졌다 해야 되나."
"으음..."
병원에서 나서며 이미 점심을 해결해버린 터라, 내 자링 앞에는 차갑게 식인 탄산음료가 담긴 컵이 한 잔 있을 뿐이었다. 그런가? 하는 고민에 빙글빙글 잔을 돌리고 있자니, 보글보글 거리며 기포가 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해왔다.
"뭐, 너희들 덕분일지도."
"... 갑자기 무슨."
겨우 돈가스를 다 썰어낸 모양인지, 2조각을 겹친 돈가스를 양껏 우물거리고 있던 성윤이가 살풋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냐'같은 감성적인 의미 의미보다는,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기에 되돌아온 질문이었을 것이다. 답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비식 논꼬리가 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과일향 나는 음료를 가볍게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달콤한 맛. 탄산 특유의 상쾌한 청량감. 알게 모르게목이 말라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는걸.
"뭐라고 해야 되려나... 좀, 세상사 다 잃어버려서 세상에서 나만큼 불행한 일을 겪은 인간이 또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던 것 같거든."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발상에 빠져 살고 계셨다는 건 알겠는데, 의문형이시네요."
"의식 안 하고 살아서 그랬는지도 몰랐는데, 오늘 의사 선생님이랑 얘기해보니 좀 그랬던 거 같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접시 위의 샐러드와 밥을 남겨둔 채 돈가스만이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또다시 양껏 고기만을 입안에 집어넣은 성윤이가, 계속해봐라고 말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죄다 의미 없는 짓이 돼버린 것 같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시작해야 되려나 하는 막막한 생각도들고 그랬던 것 같아. 그 와중에, 좀 어색한 감이 있어도 너희가 전이랑 달라질 것도 없다는 둥 말해줬고."
"므 즈 으이어 으이이-"
"삼키고 말해 더러운 놈아."
한참 동안 우물거림이 이어지기에 물이라도 떠올까 하여 정수기를 다녀오자, 목이 막힌 듯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모로 굉장한 녀석이구나, 하는 생각이 멍하니 들었다.
"... 으허. 죽는 줄 알았네."
"무슨 짓을 하면 돈가스를 먹다 죽을 뻔 하는 거야."
"뭔가 2조각씩 먹으니까 몇 조각까지 들어갈지 실험해보고 싶어졌어."
결과는 묻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뭐, 우리도 좀... 그렇긴 하지. 달라질 것이 없다고는 말 안 했어. 계속 친구일 수 있을 거라 말했지."
"그거나 그거나."
"달라 임마. 남남 관계가 아니고 남녀 관계여서야, 여러모로 배려해야 될 부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네가 그걸 거리 두는 거라 생각하지만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해야 된다고 셋이서 한 두 시간쯤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있었던 건 아냐?"
"그럴 것 같았으니 같다고 말하는 건데."
녀석들이랑 함께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추억은 못되더라도 괜찮은 술 안줏거리는 되어줄 만한 그런 이야기들.
"누가 문과 새끼 아니랄까봐, 말하는 족족 알아먹을 수가 없네."
"우리 모두 다, 항상 그랬다는 뜻이야. 당장 너만 해도, 고등학교 때 가족이랑 대판 싸워서 통장 들고 가출했을 때 너 빼고 다 같이 모여서 '당분간 가족 얘기 꺼내지도 말자'라면서 분위기 안 어색하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했었고."
"그때 결국 들켜서 내가 개지랄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너희들이 내 눈치 보면서 문자 보낼 때 말조심하려는 거 뻔히 보이거든."
"... 허. 걍 그만두라고 말해둬야겠네."
"이런 사람이 보고 있는데 전처럼 색드립 난무하는 건, 내가 그래라 해도 너희가 불편하지 않겠어?"
"하라면 할 수 있을 놈이 하나 있지 않냐?"
"웃고 말지 뭐. 걘 진짜 여자 있는데서도 그러는데 뭐."
석윤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성윤이와 함께 킥킥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지금도 나를 배려해서라기보단 '다른 애들이 하지 말라니까 안 함'같은 태도로 그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 너희는 아무것도 안 변했다고 말하고 싶었어.너희가 그대로 있어준 덕분에, 딱히 내가 무슨 죽을 만큼 불행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고."
"아니, 존나 많이 바뀌었다니까."
"그냥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 감성 없는 놈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볕이 퍽 쾌청했다. 슬슬 조금 더 얇은 옷을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한창때의 봄 날씨를 만끽하며, 반쯤 남은 탄산음료를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