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5.만화방창(2)
-야 진짜 고맙다. 괜찮은 애 하나가 알바 해준다고 하니까 부모님 얼굴에 벌써 화색이 도시는데ㅋㅋ
-근데 내가 도와주면 더 바빠질 수도 있음
-얼굴 때문에 어그로 끌려서???????
-내가 일을 개못해서ㅋㅋ 지금 간다~
메세지를 전송한 뒤 곧장 스마트폰의 홀드 버튼을 눌러버린다. 웅웅거리는 메세지 착신음이 영진이의 규탄에 찬 목소리를 전해오는 듯했으나, 나중에 확인해보지 뭐. 유쾌한 기분에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슬금슬금 외출할 준비를 시작한다.
샤워를 끝내두었기에 간단히 양치질에 세안 정도만. 그다지 화장이 필요한 얼굴은 아니기도 했고 화장하는 법 같은 걸 배운 적도 없었기에, 그래도 신경은 쓴다는 의미에서 토너에 에센스. 로션에 수분크림을 주르륵 늘어놓고 적당히 펴 바른다. 처음 모습이 변했을 때에 몇 벌 사두었던 옷에서 크게 품목이 변하지 않았기에 바뀐 품목도 얼추 외워둔 터라 외출복을 고르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흐흫.
어느샌가 울음소리를 멈춘 스마트폰의 모습에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영진이의 모습이 겹쳐 보여 다시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너 암산 잘하잖아. 너 손재주 괜찮잖아. 따위의 말들이 적혀있는 메세지를 가볍게 훑어보고는, 인터넷을 켜 머리 묶는 법을 찾아본다.
어제 성윤이가 묶어주었던 것과 인터넷의 설명을 참고하며, 거울 앞에 선 채마음처럼 되지 않는 머리와 실랑이 하기를 잠시. 흰색 티셔츠 위에 아이보리색 셔츠. 남색 청바지로 끝인 단출한 옷차림이었지만, 삐져나오는 잔머리 없이 올려 묶은 머리에 모자까지 곁들이니 그럭저럭 단정해 보이는 모습이 되었다.
"... 모자가 조금 미스매치인가 싶긴 한데."
모자야, 필요할 때 벗으면 되는 거니까. '이걸로 충분한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어제 모자의 시선 차단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몸소 체험한 나로선 앞으로도 쭉 외출복에 챙 넓은 모자를 빼놓을 생각은 못하지 않을까 싶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갑과 스마트폰을 챙겨 방을 나섰다. 나란히 소파에 앉으신 채 tv를 보고 계신 부모님의 모습이 얼핏 보여왔다.
"출발하려고?"
"아, 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슬쩍 내 쪽을 향해오는 아버지의 시선. 짤막한 대답과 함께 샐쭉 웃어 보이고 있자니, 편히 쉬어야 할 일요일에 굳이 외출할 일정을 만들어 부모님께서 괜한 걱정을 하시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괜찮다 믿는다 말씀하시긴 해도, 아직 걱정이 많으실 거라는 건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인데.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힐끔힐끔 부모님의 모습을 살폈다. 혼자 외출하겠다는 나를 신경 쓰시는 기색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는 모를 일이니까.
"와. 데려다줄까?"
"... 아뇨,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 싶어서요."
"애도 아니고 알바 좀 하는 것 가지고 무슨."
휘휘 허공에 손을 내저으시는 아버지. 잠시 말없이 듣고만 계시던 어머니께서, 조금 망설이시는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받으셨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힘들겠다 싶으면 바로 영진이 어머니 한테건 우리한테건 말해야 한다?"
"으음... 영진이네 어머니한테 제가 윤서라는 걸 설명하는 것부터가 좀 걱정이긴 한데."
"영진이랑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일단 영진이가 잘 설명해두겠다고 하긴 했는데..."
"오해 생길 것 같다 싶으면 꼭 전화하고. 알겠지?"
"아하하... 네, 그럴 것 같으면 꼭 전화할게요."
조금 떨떠름한 감이 남아있긴 했지만, 가겠다고 못을 박아두었으니 이 이상 미적거려보아야 시간 버리는 일밖에는 안되겠지. 언제든지 오라며 특별히 시간은 안정해뒀지만, 굳이 가겠다 말을 꺼낸 쪽에서 늦을 필요도 없을테고.
"점심은 밖에서 사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드세요."
"늦을 거 같으면 전화하고. 데리러 갈 테니까."
"네."
할 말은 다 하셨다는 듯 입을 다무시며 다시금 tv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시는 아버지. 무심한 척하시면서도 잔걱정 많으시다 싶은 부분이 정말로 아버지다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싱긋 미소 지어 보이 신 어머니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셨을뿐.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봐주는 이 없음에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현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
4.
아직 오픈 준비 시간인지라 손님 한 명 없이 적적한 분위기만이 맴돌고 있는 빵집의 한켠. 달콤하고 따끈따끈한 빵 냄새가 연신 피어오르고 있는 주방의 훈기와는 달리, 어스름한 조명 몇 개가 켜져 있을 뿐인 홀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기분마저 들어오는 듯했다.
"아... 아니, 확실히 그런 종류의 병에 걸려버렸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아하하... 좀, 독특해 보이는 모습이 돼버렸긴 하죠."
그런 홀의 분위기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다 싶은 푸근한 목소리로, 영진이네 아주머니께서 격한 놀라움을 표하셨다. 그래. 의심이 아닌 놀라움.
영진이네 부모님의 반응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생각했던 방향과 달랐다. 불신용 내지는 그에 준하는 어색함을 예상했건만, 두 분의 반응은 한결같은 놀라움만이 느껴질 뿐 그 외의 감정은 거의 느끼기 힘들었다.
"저기, 그. 역시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가족 정도가 아니고서야 쉽게 믿기 힘든 일인 거 같은데..."
"아아. 의심은 안 드냐고?"
조심스럽게 끄덕여지는 내 고개를 보시곤, 두 분께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시며 슬그머니 옆으로 나란히 서있던 영진이에게로 시선을 옮기셨다. 그에 따라 내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영진이를 향해서. 갑작스럽게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시선들에, 영진이의 눈동자가 곧장 무슨 일이냐는 듯 가느다랗게 떠졌다.
"... 저 왜요."
"사기건 협박이건 뭐건, 이 녀석이 이런 이쁘장한 여자랑 제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역시 그렇죠?"
"아니 무슨..."
놀리듯이 내뱉어진 아저씨의 목소리에 이어, 후후후- 하는 아주머니의 웃음소리가 가느다랗게 이어졌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도끼눈을 한 영진이가 무언가 반론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묵직한 한숨과 함께 입을 다물어버린다.
"거기서 네가 수긍해버리면 보는 내 쪽이 오히려 가슴 아픈데."
"... 괜히 못 믿겠다고 하시는 것보단 낫지 뭐."
모태솔로인 제 아들이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라는 점이 나라는 증명이 될 수 있다니. 어느 의미, 자신의 아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 정도로 높다는 뜻으로해석해도 좋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마냥 불쌍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정말로 윤서라는 거지?"
"아, 네. 역시 믿기 힘드시겠지만..."
"아니아니아니, 아줌마도 아저씨도 믿는다니까? 그냥, 고생도 많을 텐데 아들이 억지 부린 것 때문에 괜히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조금 나지막하게 늘어지는 아주머니의 눈꼬리가 눈에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 두 분은 옛날부터 이런 성격이셨었지. 본인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이 피해보는 쪽을 더 신경 쓰고, 부탁하기보다는 무리하는 쪽을 선택하는 그런.
"아뇨, 아니에요. 그렇잖아도 언제까지고 집안에서 놀고먹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는 분들이랑 같이 일할 수 있다고 하면 제가 더 고맙죠."
"굳이 일 시킬 필요 없이 앞치마 둘러놓고 가게 앞에만 세워놔도 일당 치러줄 만하겠구먼."
"당신도 정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곧장 아저씨의 숨넘어갈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퍽,보다는 펑-에 가까운 듯한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일단 아주머니의 팔이 휘둘러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으흠, 흠. 윤서라면 예의도 바르고 성격도 나긋나긋하고 하니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겸사겸사, 으음..."
"편하신 대로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이제 그냥저냥 익숙해져서."
"으음... 역시 신경 쓰이는걸..."
하하하, 하며 떨떠름한 웃음을 흘리시는 아주머니. 뒤에 이어질 말이 내 변한 외견에 관한 것이라는 것 정도는 어렵잖게 상상할 수 있었기에, 냉큼 마음대로 말씀하셔도 괜찮다며 확실히 못을 박아버리기로 한다. 나쁜 의미로 하시는 말씀도 아니실 텐데 아무렴 어떨까.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로 고맙다 얘. 솔직히,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 덕을 톡톡히 봤었거든. 꽤 귀염상으로 생겼어서, 그 애 보러 오는 젊은 친구들이 엄청 늘었었다니까?"
"아하하... 제 얼굴이 그 정도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는걸요."
"으으응! 무슨 소리를! 솔직히, 그 애보다 훨씬 귀엽게 생겼는데. 유리벽 너머로 눈웃음만 지어줘도 손님이 줄을 설걸?"
"농담도."
말 자체에 기쁘다기보다는, 내 기분을 생각해 어떻게든 띄워주시려는 배려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여나 남자였던 녀석이 이런 꼴이라고 기분 나빠하시거나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도 했었고, 이래저래 아직까지는 아는 얼굴들을 만날 때에는 긍정적인 예상보다는 부정적인 예상이 더욱 많이 들었기에...
"아무튼! 효과가 좋길래 귀여운유니폼도 준비해두고 했는데, 입을 사람이 없어서..."
... 그런 건 예상 밖인데요.